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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문성해 시인

부흐고비 2021. 2. 18. 17:10

냄비 / 문성해


할인점에서 고르고 고른
새 냄비를 하나 사서 안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때마침 폭설 내려
이사온 지 얼마 안된 불안한 길마저 다 지워지고
한순간 허공에 걸린 아파트만을 보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품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위안을 얻는 것이었다

깊고 우묵한 이 냄비 속에서 그 동안
내가 끓여낼 밥이 저 폭설만큼 많아서일까
내가 삶아낼 나물이 저 산의 나무들만큼 첩첩이어서일까
천지간 일이 다 냄비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고
불과 열을 이겨낼 냄비의 세월에 비하면
그깟 길 하나 못 찾는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품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밥 익는 김처럼
한 줄의 말씀이 길게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깨지지 않는 거울 / 문성해

빗방울들 손과 손을 맞잡고 질펀하게 누워 있다/ 검은 거울을 만들고 있다/ 거울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거리의 모든 것을 비춘다/ 먹구름이 지나가고 웅성거리며 가로수들이 걸어들어간다/ 어깨를 접은 건물이 거울 속에 웅크리고 있다/ 개미들이 거울을 벗어나기 위해 사투 중이다/ 거울 한복판에서 죽은 세포를 발견하게 될 때의 경악!/ 사람들은 오래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붙들리게 된다/ 거울은 깨져야 한다/ 깨지는 일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듯/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거울은 얼굴을 흩뜨리며 깨지는 연습을 한다/ 그러나 튀어나간 물 파편들은 또다른 거울을 만들 뿐,/ 복제거울이 판치는 거리를/ 여자들이 짧은 치마를 움켜 잡은 채 빠르게 귀가하고 있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움푹움푹 골이 패이는 거울/ 깨질 듯 끝내 깨지지는 못하고/ 사람들 얼굴에도 들러붙어/ 번질거리기 시작한다//

들판의 수족관 / 문성해

아파트 단지 맞은 편에 들판이 있다/ 이 들판은 머잖아 대형 수족관이 들어설 예정지다/ 투자자인 스페인 기업은 몇 년 째 소식 없고/ 들판은 푸르게 방치되어 있다/ 이 곳으로 살러 올 치어(稚魚)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벌써 태어나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수초처럼 넘실거리는 풀들,/ 치어들 혼(魂)이 이곳으로 와서/ 유순한 짐승처럼 그것을 뜯어먹고 있다// 대형 수족관은 그러나 지금 한창 건설중인지도 모른다/ 열대어가 그려진 커다란 입간판 뒤로/ 어릴 때 깨버린 어항 속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다// 물 대신 빽빽히 들어차 있는 공기 속에/ 물고기 알을 잔뜩 매단 풀들 키를 낮추는 곳/ 바람 불면 두런두런 넓어져 가는 수족관 속으로/ 어느 새 길들이 들어와 경계를 긋기 시작한다// 언제부턴가, 그 길로 사람들이 소풍을 간다/ 물 빠진 수족관 속을 헤엄치듯 걸어보는 사람들/ 말 할 때마다 보글보글 공기방울이 신기한 것도 잠깐,/ 가지고 온 생고기를 구워대고// 골프족들은 들판을 가로지르며 스윙을 해댄다/ 기계충 자리처럼 패인 들판으로/ 부화되지 못한 물고기 알들 떨어져 내리고/ 어디선가 다시 개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몇 년 후,/ 스페인 군단이 포크레인을 몰고 오고,/ 웅장한 대형 수족관이 마침내 완성되는 날/ 사람들은 볼 것이다/ 유리 속에 갇혀 더 이상 밟아볼 수 없는 들판을…/ 바람 불면/ 파란 잎사귀 뒤로 숨던 그때의 치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첫사랑 / 문성해

마당에서 비눗물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 애의 퉁퉁 분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점심 전이었고/ 삼촌 방에선 정오를 알리는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고/ 담장 밖 돼지우리에선 산달을 앞둔 커다란 몸이 뒤척이는 소리/ 아무래도 흘러나오는 것들이 유독 많았던 그날/ 내 몸에서 비릿한 초경과 함께 울음이 흘러나왔고/ 학교에서 나를 데리고 온 그애 곁에서 문득 외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고 있었고/ 이북 방송을 다시 듣기 시작한 삼촌이/ 먼 길 가는 기러기들 행렬을 바라보며 한숨을 흘렸다/ 안방에서 자고 있는 막냇동생처럼 조용했지만/ 내 안의 피가 몽땅 흘러나가고 남모를 피로 조용히 바꾸어진 그날 저녁/ 나는 기르던 토끼를/ 태연히 식구들과 둘러앉아 먹을 수가 있게 되었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핏빛 같은 노을이 떠내려가는 수챗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그날부터였을 거다/ 내 몸이 둥실둥실 보름달처럼 부풀기 시작한 것은//

 

늙은 쌍둥이들 / 문성해

신호등 앞에 서 있는/ 늙은 쌍둥이들// 조금 더 크지도/ 조금 더 작지도 않은 늙은 쌍둥이들// 이 바람은/ 어제와 다른 바람이고/ 이 태양은/ 어제와 다른 태양인데/ 아기로부터 아기를 떼어가는 세월 속에서// , 놀라워라/ 아직까지도 일란성인/ 늙은 쌍둥이들// 바람도 태양도 떼어가지 못한/ 늙은 쌍둥이들// 클랙슨 소리 빵빵대는/ 급류 속을/ 비틀비틀/ 냉동 고등어 한손으로 흘러가는//

 

백주대낮에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치는 이유 / 문성해

이 시절에는요/ 여자들이/ 시렁 위에 얹힌 작지만 앙칼진 칼 하나씩 손에 들고 나오는데요/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쳐도 암말 못하는 건/ 지천에 내걸린 풋것들을 오살지게 베어다/ 서방과 새끼들을 거두기 때문인데요/ 이 시절에는요/ 세상 모든 여자들은 코밑이 거뭇해지고/ 팔뚝 속에 알이 차올라서는/ 지천에 돋는 풋것들이 아까워라, 아까워라/ 저도 모르게 들판과 한판 엉겨붙게 되는데요/ 난생처음 억세디억센 수컷이 되는데요/ 가끔씩 그 독한 칼날에/ 논배미가 잘리고 칡뿌리가 잘리고 수맥이 잘리기도 하는데요/ 이 시절 여자들은요/ 푸줏간 안주인이 내걸린 고기들을 슥슥 잘라가듯/ 이 나무 이 바람 이 구름을/ 훌훌 베어 망태기에 담아서는/ 종다리처럼 지저귀며 언덕을 넘어가는데요/ 하늘도 암말 못한다는데요//

 

난초도둑 / 문성해

도둑이 되려면 난초도둑쯤은 돼야지/ 돈다발과 패물을 자루 속에 쓸어 담기보단/ 하나에 몇 억 한다는 난초 분 하나는/ 업고 나와야 일등 도둑이지// 천하의 도둑은 장물의 맘을 살펴야 하는 법/ 그 가는 옆구리들의 떨림에 집중해야 난초도둑이지/ 암, 뒤꿈치를 들고// 허공에 한 획을 긋는 난초들처럼/ 나도 세상에 나서 큰 도둑이나 한번 돼 보아야지// 밖에서 트럭은 부릉부릉 빨리 서두르라지만/ 나는 개의치 않을 거야/ 귀를 찢는 보안벨이 울려도/ 천천히 걸어 나올 거야/ 나 같은 것 백 명은 팔아도 못살 그것을/ 내 천한 심장 가까이 기대인 채로// 난 민들레 씨앗 내려앉는 언덕에다 그것을 심어 줄 테야/ 더덕더덕 억센 뿌리를 내리게 둘 거야/ 몇 억을 눈 녹듯 사라지게 할 거야// 왕후의 자리에서 여염의 촌부로 만들어 줄 거야/ 다시는 뽑아 가지 못하게 하늘을 끌어당겨 가려 줄 테야//

 

술도가가 있는 골목 / 문성해

산사춘 복분자 오가피주 백세주 매실주는 물론이거니와/ 막걸리 한 병을 마시다가도 그 병을 들어 만든 곳을 확인하는 일/ 그때마다 나는 경상북도 문경의/ 어느 오래된 술도가 골목을 더듬더듬 헤매지도 않고 흘러들어가게 된다/ 산사나무 열매나 복분자 오가피 냄새와/ 시큼덜큰한 막걸리 냄새가 흘러나오는 그 골목을 찾아들면/ 누런 냄새 위에 쓰러져 누운 술꾼이 있고/ 삐끔 열린 솟을대문 안에는 조금쯤 요망한 자세로 누워 깔깔거리는 여자들이 있다/ 어느새 나는 노란 한되들이 술 주전자를 들고/ 한모금 두모금 마시며 가는 간 큰 애가 되어/ 미나리꽝이나 앞산이나 저수지가 타박타박/ 내 눈 속을 아프지도 않게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며/ 하늘과 땅과 마을과 들판 중에서도 내가 참 크다 하고/ 돌아앉은 뒷산도 그때만큼은 내 편이란 생각을 하며/ 이런 술도가가 있는 우리 마을을 내가 참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옆집 새댁이 내는 스란치마 소리처럼/ 조금쯤 은밀하고/ 조금쯤 세상에서 붕 떠나 있는/ 그 술도가 골목을 어린 나는 어미의 품처럼 파고들었으니/ 지금도 술을 받아놓고 술병을 들고 소재지를 확인하는 나는/ 술 한잔 마시지 않고도/ 어느새 그 많은 술도가를 다 편람한 듯 마음이 화끈해지고/ 그 골목에서 술꾼들의 오줌을 다 받아먹고 사는 맨드라미 모양/ 너도 나도 이해할 수 있는 수굿한 고개가 되곤 한다//

 

종다리, 종아리 / 문성해

산수유 개나리꽃 지천인 언덕에 여학생들이 몰려다닙니다/ 디카며 핸드폰으로 얼굴들을 찍느라 야단들인데/ 교복 치마 아래가 맨종아리입니다// 산수유 개나리꽃 가지들도 탱탱한 맨종아리입니다/ 붉은 종아리들이 몰려다니기 좋은 계절입니다// 애기님들이여/ 얼굴이 꽃인 시절은 곧 지난답니다// 울긋불긋한 얼굴들 말고/ 꽃을 매달아도 좋을 맨종아리로 노닐다 가세요/ 꼬집으면 종다리 소리를 내는//

 

목련보신탕 / 문성해

파주시 광탄면 지날 때면/ 유독 눈에 띄는 간판/ 목련보신탕// 왜 하필 목련보신탕인가/ 지도에는 없는 목련이라는 지명이 있다던가/ 목련이 한창일 때 그 보신탕집이 들어섰다던가/ 그맘때 도살된 개들 눈에는 하얗게 목련이 질려 있어/ 고깃살이 꽃잎처럼 부드럽다던가/ 그 집 평상에선 좋든 싫든 목련을 바라보며 음식을 들게 된다던가/ 그때 꼭 한둘은 목련에 얽힌 추억담을 이야기하게 된다던가/ 급기야 뼈다귀 쌓이는 것도 꽃잎으로 보이면/ 당신은 빼도 박도 못하는 목련교도가 된다던가// 그 흔한 네온 빛 하나 담지 못한/ 하얀 바탕 검은 글씨의/ 목련보신탕/ 꽃 이름 후광을 입어/ 매캐한 누린내가 없어지는 그 이름/ 목련보신탕//

 

봄꽃들 / 문성해

진달래나 홍매화나 박태기 같은 꽃들/ 마술사가 피워낸 조화인 양 자꾸 손이 가게 된다/ 분명 가지는 어제 보던 회초리로 쓰기에도 뭣한 가지인데/ 탱탱해진 젖꼭지나/ 잔뜩 충혈된 목젖 같은 꽃들이/ 잎사귀도 하나 없이 직설법으로 매달려 있다// 삽십년 전 내가 살던 동네에도 꼭 그런 꽃들이 있었으니/ 그 꽃들만 떴다 하면/ 엄마들은 자식들 건사하느라 바빴으니/ 학교도 중퇴하고/ 몇 명씩 우글우글 몰려다니는 되바라진 것들이/ 그 애들 들락거리던 만화가게나 분식점은 화사한 욕설로 넘쳐났으니// 눈 깜짝할 새/ 구겨진 치마도 매만지지 않고 골목에서 사라지던/ 말만한 그 꽃들처럼/ 나도 한때는/ 침을 찍 뱉으며 내가 좋아하던 이층집 그 아이에게/ 불쑥 꽃을 피우고픈 나이가 있었으니//

 

점심꽃 / 문성해

지난밤 나리 태풍에 코스모스가 무더기무더기로 넘어져있다/ 온갖 악다구니 빛깔이 뒤범벅이다// 저 난리 속에서도/ 저 아비규환 속에서도 피는 꽃이 있다/ 쌈박하게 죽지도 못하고 지지리 못나게 피는 꽃이 있다/ 그래도 한번은 피고 죽어야 한다고 모질게 피는 꽃이 있다// 숨 막히게 피는 꽃/ 마음에 점을 찍는 점심처럼/ 제 마음에 점을 찍고 가는 꽃이 있다/ 제 마음에 피고 가는 가늘디가는 꽃이 있다//

 

치자꽃 / 문성해

재작년 일산 오일장에서 치자꽃을 난생 처음 보았더라,/ 마침 장 구경 나온 여자 둘을 보고/ 장사꾼은 처첩 간 아니냐고 수작을 걸고/ 처에 해당하는 여자도 첩에 해당하는 여자도 싫지 않은 듯 호호거리는데/ 때마침 나온 치자꽃 두어 송이만 하얗게 얼굴 붉히더라// 한 나무에 매달려 있던 그 꽃들/ 바람에 흔들리며 시시덕거리며 서로 너나들이하며/ 얼굴도 부비고 암수한몸인 양 앉아 있더라// 앙숙지간인 처첩 간도 세월이 지나면 한편이 된다던가/ 그네들이 갔다가 오는 곳을 모르는 세상의 허구많은 꽃나무들이여/ 잇몸이 내려앉은 서방처럼 홀로 추억만 되새김질할 뿐인,// 올해 다시 그곳에 가보니/ 예전의 그 농 걸던 장사꾼과 여자들은 보이지 않고/ 그때의 치자꽃만 두어 송이 걸어나왔더라/ 장 구경 나와 서로 맛난 것 챙겨주던 그 여자들 모양/ 눈부신 햇살을 서로 먹여주고 있더라//

 

각시투구꽃을 생각함 / 문성해

시 한 줄 쓰려고/ 저녁을 일찍 먹고 설거지를 하고/ 설치는 아이들을 닦달하여 잠자리로 보내고/ 시 한 줄 쓰려고/ 아파트 베란다에 붙어 우는 늦여름 매미와/ 찌르레기 소리를 멀리 쫓아내 버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먼 남녘의 고향집 전화도 대충 끊고/ 그 곳 일가붙이의 참담한 소식도 떨궈 내고/ 시 한 줄 쓰려고/ 바닥을 치는 통장 잔고와/ 세금독촉장들도 머리에서 짐짓 물리치고/ 시 한 줄 쓰려고/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난 각시투구꽃의 모양이/ 새초롬하고 정갈한 각시 같다는 것과/ 맹독성인 이 꽃을 진통제로 사용했다는 보고서를 떠올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난데없이 우리 집 창으로 뛰쳐 들어온 섬서구 메뚜기 한/ 마리가 어쩌면 시가 될 순 없을까 구차한 생각을 하다가/ 그 틈을 타고 쳐들어온/ 윗집의 뽕짝 노래를 저주하다가/ 또 뛰쳐 올라간 나를 그 집 노부부가 있는 대로 저주할/ 것이란 생각을 하다가/ 어느 먼 산 중턱에서 홀로 흔들리고 있을/ 각시투구 꽃의 밤을 생각한다/ 그 수많은 곡절과 무서움과 고요함을 차곡차곡 재우고 또/ 재워 기어코 한 방울의 맹독을 완성하고 있을//

 

첫물 수련 / 문성해

수련이 언제 이리 피었나/ 흙탕물 논물 위에 첫 수련이 돋았구나// 오늘 아침 세수도 못하고 짓무른 눈가 비비며 보는데/ 누가 지어주나 이름도 기다리지 않고/ 수련이 작년의 이름으로 내 곁에 왔네// 첫 수련의 주둥이가/ 막막한 수면을 뚫고 나오는 그 힘으로// 드넓은 고추밭에 첫 고추가 매달리고/ 아이 몸에 첫 두드러기가 돋고/ 마른하늘에선 첫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야// 그다음엔/ 후득후득 일제히 돋아나면 되는 것/ 터져나오면 되는 것// 그 힘으로/ 희부윰한 새벽을 찢으며/ 첫 기러기떼가 날아오르는 것이야//

 

모란 해후 / 문성해

모란이 핀 것을 네해 만에 본다/ 모란은 몰래 옛 애인 창문 앞을 서성거리다 가는/ 모가지가 수굿한 여자 같아서/ 인기척에 벌컥 열어젖히는 창문보다 먼저 떨어진다// 모란은 화가 많아서/ 제 화를 다스릴 줄 모르는 여자의/ 아궁이 앞에 발갛게 비춰지는 볼살 같아서/ 연기가 채 삭기도 전에 치마끈을 올리고 사라지고 만다/ 모란을 한장 한장 벗기면/ 연기 한 토막을 들고 섰는 듯/ 몰려오는 낭패감이여// 모란이 피어나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모란은/ 연못 앞에 벗어놓은 붉은 신발 같아서/ 가슴에 인주를 문지르는 손바닥 같아서// 모란을 보고 나면/ 눈 깜짝할 새 네해가 또 가버릴 것 같아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인 양/ 이리도 안쓰럽게 반가워지는 것이다//

 

황매실이 있는 풍경 / 문성해

유월도 다 지난 오일장에/ 할마시 하나/ 누렇게 곪은 황매실을 펼쳐놓고 앉았네// 담장이 흔들리게/ 대문을 닫으면/ 휑하니 가는 것만/ 가는 게 아니라서// 맵차게 시고도 탱탱한 청매실의 시절은 갔다고 하네// 누가 가고/ 누가 오는 기척도 없이// 한 매실에/ 청매실이 가고/ 황매실이 와서는/ 한 몸에/ 젊은이가 가고/ 늙은이가 와서는// 이 곧고 푸른 계절의 한복판/ 이 난장과 흥정의 한복판에/ 누렇게 뼈에서 살이 다 들뜨고 있다//

 

산수유국에 들다 / 문성해

그곳 서방정토의 삼월에는/ 꽃 이름을 앞 세운 국가들이 나뭇가지마다 열린다네/ 단 하나의 시조설화도 없이/ 산수유국 목련국 진달래국 매화국이/ 가난한 가지마다 봉긋봉긋 솟아오른다네/ 향기가 없으면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는 나라/ 향기로운 코 하나로 누구나 백성이 되는 나라/ 스스로 치장하고 목청 높여 백성들을 부르는 나라/ 하늘 아래 이보다 더 아름답고 곡진한 국가는 없을 터/ 그곳 서방정토의 삼월에는/ 백성을 호객하며 핵폭발로 태어나는 국가들이 있다네/ 거창한 국민헌장도 영토도 없는 나라/ 일체의 세금도 의무도 지우지 않는 나라/ 알 수 없는 곳에서 아기가 오듯 흥성스러운 날에/ 코에 담뿍 꽃분을 묻힌 백성들의 붕붕거리리는 한때*가 지나면/ 알 수 없는 곳으로 늙은이가 져내리듯/ 캄캄하게 져버리는 나라들이 있다네/ 그건 한순간의 일이라서/ 단 한명의 열혈 백성도 따라갈 수 없다네//

* 장석주의 시 「붕붕거리는 한때」에서 인용함.

 

바구미를 죽이는 밤 / 문성해

처음엔 작은 활자들이 기어 나오는 줄 알았다/ 신문지에 검은 쌀을 붓고 바구미를 눌러 죽이는 밤/ 턱이 갈라진 바구미들을/ 처음엔 서캐를 눌러 죽이듯 손톱으로 눌러 죽이다가/ 휴지로 감아 죽이다가/ 마침내 럭셔리하게 자루 달린 국자로 때려 죽인다/ 죽음의 방식을 바꾸자 기세 좋던 놈들이 주춤주춤,/ 죽은 척 나자빠져 있다가 잽싸게 도망치는 놈도 있다/ 놈들에게도 뇌가 있다는 것이 도무지 우습다// 혐오도 죄책감도 없이/ 눌러 죽이고 찍어 죽이고 비벼 죽이는 밤/ 그나저나 살해가 이리 지겨워도 되나/ 고만 죽이고 싶다 해도 기를 쓰고 나온다/ 깟 것들이 먹으면 대체 얼마나 먹는다고/ 쌀 한 톨을 두고 대치하는 나의 전선이여/ 아침에는 학습지를 파는 전화와 싸우고/ 오후에는 종이박스를 두고 경비와 실랑이하고/ 밤에는 하찮은 벌레들과 싸움을 한다/ 누가 등이 딱딱한 적들을 자꾸만 내게로 내보낸다// 열기로 적으로 환해지는 밤,/ 누군가 와서 자꾸만 내 이불을 걷어 간다는 생각,/ 자꾸만 내게서 양수 같은 어둠을 걷어 간다는 생각,/ 날이 새도록 터뜨려 죽이는 이 어둠은 가히 옳은가//

아랫도리 / 문성해

신생아들은 보통 아랫도리를 입히지 않는다/ 대신 기저귀를 채워 놓는다/ 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수술을 했을 때도/ 아랫도리는 벗겨져 있었다/ 할머니가 병원에서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 아기처럼 조그마해져선 기저귀 하나만 달랑 차고 계셨다/ 사랑할 때도 아랫도리는 벗어야한다/ 배설이 실제적이듯이/ 삶이 실전에 돌입할 때는 다 아랫도리를 벗어야 한다// 때문에 위대한 동화작가도/ 아랫도리가 물고기인 인어를 생각해내었는지 모른다/ 거리에 아랫도리를 가린 사람들이 의기양양 활보하고 있다/ 그들이 아랫도리를 벗는 날은/ 한없이 곱상해지고 슬퍼지고 부끄러워지고 촉촉해진다/ 살아가는 진액이 다 그 속에 숨겨져 있다// 신문 사회면에도/ 아랫도리가 벗겨져 있었다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걸 보면/ 눈길을 확 끄는 그 말 속에는 분명/ 사람의 뿌리가 숨겨져 있다//

두릅 / 문성해

농아 아저씨 한 분이 갖다 준 참두릅/ 베란다에 둔 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느 날 신문지에서 펴보니/ 가시가 잔뜩 세어져 있다// 김포문예대학 첫 수업 때/ 내게 입 좀 크게 열어 말해달라던 그가/ 수업 때면 맨 앞자리에서/ 귀에 두 손을 나팔처럼 대고 엎질러진 튀밥처럼 내 소리를 쓸어 담다가/ 언젠가부터는 그마저도 더럽게 안 읽히는지 보이지 않길래/ 나는 그가 어느 산비탈 두릅나무에게서/ 계속해서 시를 배울 것이란 생각을 했다// 몸에서 목소리 대신 가시가 나오는/ 그 두릅나무 선생은 때가 되면/ 울퉁불퉁 몸엣것을 툭툭 불거지게 내놓으며/ 나처럼 달달한 칭찬 대신/ 날카로운 가시들을 마구 방출할 것이다/ 맘에 안 들면 아예 벌판 위로 벌렁 내다꽂을 것이다// 그 두릅나무 선생이 보내온 가시 앞에/ 이제야 쪼그리고 앉으니/ 막 세어지기 시작한 두릅나무 앞에서의/ 서두르던 기척과/ 푸르죽죽 두릅물이 오른 손목과/ 웅웅거리는 불편한 귓속이 보인다/ 귓바퀴 앞에까지 와서 되돌아가던 새소리도 들린다//

틀니 / 문성해

웃고 있다./ 물 담긴 사기그릇 속에서/ 흠뻑 웃고 있다.//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저리 신나게 웃는 어머니를,// 어금니 사이/ 푸른 이끼 한줄,/ 나 몰래 무슨 즐거움 씹어 잡수셨을까// 나는 불안하다/ 턱이 없는 어머니가/ 아침이면 턱 안에서/ 굳게 갇힐 웃음이,// 턱을 빠져나온 웃음이 밤마다/ 목욕탕을 뒤흔든다// 저 웃음을 어머니 턱 안에서/ 완성시켜드리고 싶다//

 

눈사람의 시 / 문성해

눈사람이 홀로 밤을 맞고 있다/ 저런 눈사람으로 골목에 나앉아 있어본 적 있는가// 세상의 집이란 집은/ 모두 제 가족을 끌어안고/ 도무지 모르는 빛으로 동그랗게 불 밝히고/ 내겐 더이상 젖은 몸을 누일 집이 없고/ 더운 숨을 섞을 가족이 없고/ 이 골목과/ 이 밤과/ 이 둥그스름한 슬픔만 남아// 골똘히 들여다본 적 있는가/ 봐도 봐도 희디흰 몸속 같은 세상/ 흰 생쥐들이 한마리 두 마리/ 몸속에서 기어나와/ 나머지 몸들에게 말을 거는// 이 순간을/ 이 슬픔을/ 미천이라고 해야 하나/ 고결이라고 해야 하나// 눈발 하나하나가/ 더운 살로 덮이는/ 이 순간을/ 성숙이라고 해야 하나/ 장엄이라고 해야 하나//

 

무덤의 그 마음을 / 문성해

무덤이 제 앞에 가솔들 냥/ 비석과 어린 소나무들을 거느리는 그 마음을 내 알겠어요/ 무덤이 삐죽삐죽 솟은 쑥대머리 위로/ 민들레나 명아주 풀을 키우는 그 마음을 내 알겠어요/ 무덤이 달빛 설레는 밤이면/ 그림자 일렁이는 그 마음을 내 알겠어요/ 무덤이 승냥이 길게 우는 소리에/ 흙구멍들을 옴찔옴찔하는 그 마음을 내 알겠어요/ 무덤이 긴 세월동안/ 조금씩 조금씩 마을로 흘러내리는 그 마음을 내 알겠어요//

 

취업일기 / 문성해

한전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주부검침원 자리를 부탁하려고 이력서를 들고 간다 그래도 바짝 하면 월 백이십에 공휴일은 쉬니 그만한 일자리도 없다 싶어 용기를 낸 길, 벌써 봄이라고 이 땅에 뿌리를 박는 민들레 제비꽃 들, 그 조그맣고 기대에 찬 얼굴에 대고 조만간 잔디에 밀려나갈 것이라고 나는 말해줄 수 없다 그에 비하면 밀려날 걱정 없이 남의 뒤란에 걸린 계량기나 들여다보면서 늙는 것도 괜찮다 싶다가도 그래도 뭔가 좀 억울하고 섭섭해지는 기분에 설운 방게처럼 옆걸음질 치는데 명동성당 앞에는 엊그제 돌아가신 추기경님 추모 행렬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대통령 앞에서도 할 말 다했다는 추기경님도 이 땅에서는 임시직이셨나, 그나저나 취업이 되더라도 일이년은 기다려야 한다는데 그동안은 앳된 얼굴의 저 민들레처럼 저 제비꽃처럼 내일 따윈 안중에도 없이 팔락거려도 될까//

 

밤비 오는 소리를 두고 / 문성해

바람에 나뭇잎들이 비벼대는 소리라 굳이 믿는 것이다/ 한창 재미나는 저녁 연속극을 끌 수가 없는 것이다/ 빨래가 널린 옥상을 괜히 한번 염두에 둬보는 것이다/ 뭔가에 환호할 나이는 지났다고 뭉그적거려보는 것이다/ 속는 셈치고 커튼을 열고 베란다 문을 여는 수고가 하기 싫은 것이다/ 누가 이기나 최대한 견딜 때까지 견뎌보는 것이다/ 손익 계산부터 해보는 것이다//

 

 



문성해 시인

1963년 경북 문경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 <매일신문>,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자라』 『아주 친근한 소용돌이』 『입술을 건너간 이름』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내가 모르는 한 사람』 이 있다

<대구시협상> <김달진문학상>  <젊은시인상> <시산맥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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