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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지하 시인

부흐고비 2021. 2. 21. 09:29

빈 산 / 김지하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 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 임진택 선생이 부르시는 '빈산'

 

 

무화과 / 김지하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 이봐/ 내게 꽃 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 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서 속 꽃 피는 게/ 그게 무화가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둥글기 때문에 / 김지하

거리에서/ 아이들 공놀이에 갑자기 뛰어들어/ 손으로 마구 공 주무르는 건/ 철부지여서가 아니야/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골동상 유리창 느닷없이 깨뜨리고/ 옛 항아리 미친 듯 쓰다듬는 건/ 훔치려는 게 아니야/ 이것 봐, 자넨 몰라서 그래/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노점상 좌판 위에 수북수북히 쌓아 놓은/ 사과알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건/ 아니야/ 먹고 싶어서가 아니야/ 돈이 없어서가 아니야/ 모난 것, 모난 것에만 싸여 살아/ 둥근 데 허천이 난 내 눈에 그저/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좁은 바지 차림 아가씨/ 뒷모습에 불현듯 걸음 바빠지는 건/ 맵시 좋아서가 아니야/ 반해서도 아니야/ 천만의 말씀/ 색골이어서는 더욱 절대 아니야/ 둥글기 때문// 불룩한 젖가슴 도톰한 입술/ 새빨간 젖꼭지나 새빨간 연지/ 그 때문도 아니야/ 뚫어져라 끝내 마주 쳐다보는 건/ 모두 다 그건/ 딱딱한 데, 뾰족한 데 얻어맞고 찔려 산 내겐/ 환장하게 보드랍고 미치고 초치게/ 둥글기 때문//

 

초파일 밤 / 김지하

꽃 같네요./ 꽃밭 같네요/ 물기 어린 눈에는 이승 같질 않네요/ 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저기 저 꽃밭/ 살아 못 간다면 살아 못 간다면/ 황천길에만은 꽃구경할 수 있을까요/ 삼도천을 건너면 저기에 이를까요/ 벽돌담 너머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오색영롱한 꽃밭을 두고/ 돌아섭니다/ 쇠창살 등에 지고/ 침침한 감방 향해 돌아섭니다/ 굳은 시멘트벽 속에/ 저벅거리는 교도관의 발자욱 울림 속에/ 캄캄한 내 가슴의 옥죄임 속에도/ 부처님은 오실까요/ 연등은 켜질까요/ 고개 가로저어/ 더 깊숙이 감방 속으로 발을 옮기며/ 두 눈 질끈 감으면/ 더욱더 영롱히 떠오르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아아 참말 꽃 같네요/ 참말 꽃밭 같네요//

 

애린 / 김지하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 끝에 서서/ 돌아살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오리 햇빛/ 애린/ 나.//

회귀 / 김지하

목련은 피어/ 흰 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돌아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친구들 모두/ 짧은 눈부심 뒤에 남기고/ 이리로 혹은 저리로/ 아메리카로 혹은 유럽으로/ 하나 둘씩 혹은 감옥으로 혹은 저승으로// 가데/ 검은 등걸 속/ 애틋한 그리움 움트던/ 겨울날 그리움만 남기고/ 무성한 잎새 시절/ 기인 긴 기다림만 남기고// 봄날은 가데/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아 저 모든 꽃들이 가데.//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 골목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는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오적(五賊) / 김지하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것다./ 옛날도, 먼 옛날 상달 초사훗날 백두산아래 나라선 뒷날/ 배꼽으로 보고 똥구멍으로 듣던 중엔 으뜸/ 아동방(我東方)이 바야흐로 단군아래 으뜸/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냐/ 포식한 농민은 배터져 죽는 게 일쑤요/ 비단옷 신물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고재봉 제 비록 도둑이라곤 하나/ 공자님 당년에고 도척이 났고/ 부정부패 가렴주구 처처에 그득하나/ 요순시절에도 시흉은 있었으니/ 아마도 현군양상(賢君良相)인들 세상 버릇 도벽(盜癖)이야/ 여든까지 차마 어찌할 수 있겠느냐/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죽/ 남북간에 오종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 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제별(狾䋢), 국회의원(獪狋猿), 고급공무원(跍礏功無獂), 장성(長猩), 장차관(瞕矔)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하고 목질기기가 동탁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五賊)의 소굴이렷다./ 사람마다 뱃속이 오장육보로 되었으되/ 이놈들의 배안에는 큰 황소불알만한 도둑보가 겉붙어 오장칠보,/ 본시 한 왕초에게 도둑질을 배웠으나 재조는 각각이라/ 밤낮없이 도둑질만 일삼으니 그 재조 또한 신기(神技)에 이르렀것다./ 하루는 다섯 놈이 모여/ 십 년 전 이맘때 우리 서로 피로써 맹세코 도둑질을 개업한 뒤/ 날이 날로 느느니 기술이요 쌓이느니 황금이라, 황금 십 만 근을 걸어놓고 그간에 일취월장 묘기(妙技)를 어디 한번 서로 겨룸이 어떠한가/ 이렇게 뜻을 모아 도(盜)짜 한자 크게 써 걸어놓고 도둑시합을 벌이는데/ 때는 양춘가절(陽春佳節)이라 날씨는 화창, 바람은 건듯, 구름은 둥실/ 저마다 골프채 하나씩 비껴들고 꼰아잡고/ 행여 질세라 다투어 내달아 비전(泌傳)의 신기(神技)를 자랑해쌌는다.//
첫째 도둑 나온다 제별(狾䋢)이란 놈 나온다/ 돈으로 옷 해 입고 돈으로 모자 해 쓰고 돈으로 구두 해 신고 돈으로 장갑 해 끼고/ 금시계, 금반지, 금팔찌, 금단추, 금 넥타이핀, 금 카후스 보턴, 금박클, 금니빨, 금손톱, 금발톱, 금작크, 금시계줄./ 디룩디룩 방댕이, 불룩불룩 아랫배, 방귀를 뽕뽕 뀌며 아그작 아그작 나온다/ 저놈 재조봐라 저 제별(狾䋢)놈 재조 봐라/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초 치고 간장 치고 계자 치고 고추장 치고 미원까지 톡톡 쳐서 실고추 과 마늘 곁들여 낼름/ 세금 받은 은행돈, 외국서 빚낸 돈, 왼갖 특혜 좋은 이권은 모조리 꿀꺽/ 이쁜 년 꾀어서 첩 삼아 밤낮으로 작신작신 새끼 까기 여념 없다/ 수두룩 까낸 딸년들 모조리 칼 쥔 놈께 시앗으로 밤참에 진상하여/ 귀뜀에 정보 얻고 수의계약 낙찰시켜 헐값에 땅 샀다가 길 뚫리면 한몫 잡고/ 천(千)원 공사(工事) 오원에 쓱싹, 노동자 임금은 언제나 외상 외상/ 둘러치는 재조는 손오공 할애비요 구워삶는 재조는 뙤놈 술수 뺨치겄다.//
또 한 놈이 나온다./ 국회의원(獪狋猿)/ 나온다./ 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 가래 끓는 목소리로 응승거리며 나온다/ 털투성이 몽둥이에 혁명 공약 휘휘 감고/ 혁명 공약 모자 쓰고 혁명 공약 배지 차고/ 가래를 퉤퉤, 골프채 번쩍, 깃발같이 높이 들고 대갈일성, 쪽 째진 배암 샛바닥에 구호가 와그르르/ 혁명이닷, 구악(舊惡)은 신악(新惡)으로! 개조(改造)닷, 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 근대화닷, 부정선거는 선거부정으로! 중농(重農)이닷, 빈농(貧農)은 이농(離農으로!/ 건설이닷, 모든 집은 와우식(臥牛式)으로! 사회정화(社會淨化)닷, 정인숙(鄭仁淑)을, 정인숙(鄭仁淑)을 철두철미 본받아랏!/ 궐기하랏, 궐기하랏! 한국은행권아, 막걸리야, 주먹들아, 빈대표야, 곰보표야, 째보표야,/ 올빼미야, 쪽제비야, 사꾸라야, 유령(幽靈)들아, 표도둑질 성전(聖戰)에로 총궐기하랏!/ 손자(孫子)에도 병불염사(兵不厭詐), 치자즉(治者卽) 도자(盜者)요 공약 즉(公約卽) 공약(空約)이니/ 우매(愚昧) 국민 그리 알고 저리 멀찍 비켜서랏, 냄새난다 퉤 -/ 골프 좀 쳐야겄다.//
셋째 놈이 나온다 고급공무원(跍礏功無獂) 나온다./ 풍신은 고무풍선, 독사같이 모난 눈, 푸르족족 엄한 살,/ 콱다문 입꼬라지 청백리(淸白吏) 분명쿠나/ 단 것을 갖다주니 쩔레쩔레 고개 저어 우린 단것 좋아 않소,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말구/ 어허 저놈 뒤 좀 봐라 낯짝 하나 더 붙었다/ 이쪽 보고 히뜩히뜩 저쪽 보고 헤끗헤끗, 피두피둥 유들유들 숫기도 좋거니와 이빨 꼴이 가관이다./ 단것 너무 처먹어서 새까맣게 썩었구나, 썩다못해 문들어져 오리(汚吏)가 분명쿠나/ 산같이 높은 책상 바다같이 깊은 의자 우뚝나직 걸터앉아/ 공(功)은 쥐뿔 없는 놈이 하늘같이 높이 앉아 한 손으로 노땡큐요 다른 손은 땡큐땡큐/ 되는 것도 절대 안 돼, 안 될 것도 문제 없어, 책상 위엔 서류뭉치, 책상 밑엔 지폐뭉치/ 높은 놈껜 삽살개요 아랫놈껜 사냥개라, 공금은 잘라먹고 뇌물은 청(請)해먹고/ 내가 언제 그랬더냐 흰구름아 물어보자 요정(料亭)마담 위아래로 모두 별탈 없다더냐.//
넷째놈이 나온다 장성(長猩)놈이 나온다/ 키크기 팔대장성, 제 밑에 졸개행렬 길기가 만리장성/ 온몸에 털이 숭숭, 고리눈, 범아가리, 벌룸코, 탑삭수염, 짐승이 분명쿠나/ 금은 백동 청동 황동, 비단공단 울긋불긋, 천근만근 훈장으로 온몸을 덮고 감아/ 시커먼 개다리를 여기 차고 저기 차고/ 엉금엉금 기나온다 장성(長猩)놈 재조 봐라/ 쫄병들 줄 쌀가마니 모래 가득 채워놓고 쌀은 빼다 팔아먹고/ 쫄병 먹일 소돼지는 털 한 개씩 나눠주고 살은 혼자 몽창 먹고/ 엄동설한 막사 없어 얼어죽는 쫄병들을/ 일만 하면 땀이 난다 온종일 사역시켜/ 막사 지을 재목 갖다 제 집 크게 지어놓고/ 부속 차량 피복 연탄 부식에 봉급까지, 위문품까지 떼어먹고/ 배고파 탈영한 놈 군기 잡자 주어패서 영창에 집어놓고/ 열중쉬엇 열중열중열중쉬엇 열중/ 빵빵들 데려다가 제마누라 화냥끼 노리개로 묶어두고/ 저는 따로 첩을 두어 운우어수(雲雨魚水) 공방전(攻防戰)에 병법(兵法)이 신출귀몰(神出鬼沒)//
마지막 놈 나온다/ 장차관(瞕矔)이 나온다/ 허옇게 백태 끼어 삐적삐적 술지게미 가득 고여 삐져나와/ 추접무화(無化) 눈꼽 낀 눈 형형하게 부라리며 왼손은 골프채로 국방을 지휘하고/ 오른손은 주물럭주물럭 계집 젖통 위에다가 증산 수출 건설이라 깔짝깔짝 쓰노라니/ 호호 아이 간지럽사와요/ 이런 무식한 년, 국사(國事)가 간지러워?/ 굶더라도 수출이닷, 안 팔려도 증산이닷, 아사(餓死)한놈 뼉다귀로 현해탄에 다리 놓아 가미사마 배알하잣!/ 째진 북소리 깨진 나팔소리 삐삐빼빼 불어대며 속셈은 먹을 궁리/ 검정 세단 있는데도 벤쯔를 사다놓고 청렴결백 시위코자 코로나만 타는구나/ 예산에서 몽땅 먹고 입찰에서 왕창 먹고 행여나 냄새날라 질근질근 껌 씹으며/ 켄트를 피워 물고 외래품 철저 단속 공문을 휙휙휙휙 내갈겨 쓰고 나서 어허 거참 달필(達筆)이다./ 추문듣고 뒤쫓아온 말 잘하는 반벙어리 신문기자 앞에 놓고/ 일국(一國)의 재상더러 부정(不正)이 웬말인가 귀거래사(歸去來辭) 꿍얼꿍얼, 자네 핸디 몇이더라?//
오적(五賊)의 이 절륜한 솜씨를 구경하던 귀신들이/ 깜짝 놀라서 어마 뜨거라 저놈들한테 붙잡히면 뼉다귀도 못 추리것다/ 똥줄 빠지게 내빼 버렸으니 요즘엔 제사 지내는 사람마저 드물어졌것다./ 이리 한참 시합이 구시월 똥호박 무르익듯 몰씬몰씬 무르익어가는데/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나라 망신시키는 오적(五賊)을 잡아들여라/ 추상같은 어명이 쾅,/ 청천하늘에 날벼락 치듯 쾅쾅쾅 연거푸 떨어져 내려 쏟아져 퍼부어싸니/ 네이- 당장에 잡아 대령하겠나이다, 대답하고 물러선다/ 포도대장 물러선다 포도대장 거동 봐라/ 울뚝불뚝 돼지코에 술찌꺼기 허어옇게 묻은 메기 주둥이, 침은 질질질/ 장비 사돈네 팔촌 같은 텁석부리 수염, 사람 여럿 잡아먹어 피가 벌건 왕방울 눈깔/ 마빡에 주먹혹이 뛸 때마다 털렁털렁/ 열십자 팔벌리고 멧돌같이 좌충우돌, 사자같이 으르르르릉/ 이놈 내리훑고 저놈 굴비 엮어/ 종삼 명동 양동 무교동 청계천 쉬파리 답십리 왕파리 왕십리 똥파리 모두 쓸어모아다 꿀리고 치고 패고 차고 밟고/ 꼬집어 뜯고 물어뜯고 업어메치고 뒤집어 던지고 꼰아 추스리고 걷어 팽개치고/ 때리고 부수고 개키고 까집고 비틀고 조이고/ 꺾고 깎고 벳기고 쑤셔대고 몽구라뜨리고/ 직신작신 조지고 지지고 노들강변 버들같이 휘휘낭창 꾸부러뜨리고/ 육모방망이, 세모쇳장, 갈쿠리, 긴 칼, 짧은 칼, 큰칼, 작은칼 오라 수갑 곤장 난장 곤봉 호각/ 개다리 소다리 장총 기관총 수류탄 최루탄 발연탄 구토탄 똥탄 오줌탄 뜸물탄 석탄 백탄/ 모조리 갖다 늘어놓고 어흥 -/ 호랑이 방귓소리 같은 으름장에 깜짝, 도매금으로 끌려와 쪼그린 된민증들이 발발/ 전라도 갯땅쇠 꾀수놈이 발발 오뉴월 동장군(冬將軍) 만난 듯이 발발발 떨어댄다./ 이놈/ 네놈이 오적(五賊)이지/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날치기요/ 날치기면 더욱 좋다. 날치기, 들치기, 밀치기, 소매치기, 네다바이 다 합쳐서/ 오적(五賊)이 그 아니냐/ 아이구 난 날치기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펨프요/ 펨프면 더욱 좋다. 펨프, 창녀, 포주, 깡패, 쪽쟁이 다 합쳐서/ 풍속사범 오적(五賊)이 바로 그것 아니더냐/ 아이구 난 펨프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껌팔이요/ 껌팔이면 더욱 좋다. 껌팔이, 담배팔이, 양말팔이, 도롭프스팔이, 쪼코렛팔이 다 합쳐서/ 외래품 팔아먹는 오적(五賊)이 그 아니냐/ 아이구 난 껌팔이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거지요/ 거지면 더더욱 좋다. 거지, 문둥이, 시라이, 양아치, 비렁뱅이 다 합쳐서/ 우범 오적(五賊)이란 너를 두고 이름이다. 가자 이놈 큰집으로 바삐 가자/ 애고 애고 난 아니요, 오적(五賊)만은 아니어라우. 나는 본시 갯땅쇠로/ 농사로는 밥 못 먹어 돈벌라고 서울 왔소. 내게 죄가 있다면은/ 어젯밤에 배고파서 국화빵 한 개 훔쳐먹은 그 죄밖엔 없습넨다./ 이리 바짝 저리 죄고 위로 틀고 아래로 따닥/ 찜질 매질 물질 불질 무두질에 당근질에 비행기 태워 공중잡이/ 고춧가루 비눗물에 식초까지 퍼부어도 싹아지없이 쏙쏙 기어나오는건/ 아니랑께롱/ 한마디뿐이겄다/ 포도대장 할 수 없어 꾀수놈을 사알살 꼬실른다 저것봐라/ 오적(五賊)은 무엇이며 어디 있나 말만 하면 네 목숨은 살려주마/ 꾀수놈 이 말듣고 옳다꾸나 대답한다./ 오적(五賊)이라 하는 것은 재벌, 국회의원(獪狋猿), 고급공무원(跍礏功無獂), 장성(長猩), 장차관(瞕矔)이란 다섯 짐승, 시방 동빙고동에서 도둑시합 열고 있소./ 으흠, 거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 정녕 그게 짐승이냐?/ 그라문이라우, 짐승도 아조 흉악한 짐승이지라우./ 옳다됐다 내 새끼야 그 말을 진작하지/ 포도대장 하도 좋아 제 무릎을 탁 치는데/ 어떻게 우악스럽게 처 버렸던지 무릎뼈가 파싹 깨져버렸것다, 그러허나/ 아무리 죽을 지경이라도 사(死)는 사(私)요, 공(功)은 공(公)이라/ 네놈 꾀수 앞장서라, 당장에 잡아다가 능지처참한 연후에 나도 출세해야겄다./ 꾀수놈 앞세우고 포도대장 출도한다/ 범눈깔 부릅뜨고 백주대로상에 헷드라이트 왕눈깔을 미친 듯이 부릅뜨고/ 부릉 부릉 부르릉 찍찍/ 소리소리 내지르며 질풍같이 내닫는다/ 비켜라 비켜서라/ 안 비키면 오적(五賊)이다/ 간다 간다 내가 간다/ 부릉 부릉 부르릉 찍찍 우당우당 우당탕 쿵쾅/ 오적(五賊) 잡으러 내가 간다/ 남산을 훌렁 넘어 한강물 바라보니 동빙고동 예로구나/ 우뢰 같은 저 함성 범같은 늠름 기상 이완대장(李浣大將) 재래(再來)로다/ 시합장에 뛰어들어 포도대장 대갈일성,/ 이놈들 오적(五賊)은 듣거라/ 너희 한같 비천한 축생의 몸으로/ 방자하게 백성의 고혈 빨아 주지육림 가소롭다/ 대역무도 국위손상, 백성원성 분분하매 어명으로 체포하니 오라를 받으렷다.//
이리 호령하고 가만히 들러보니 눈 하나 깜짝하는 놈 없이 제 일에만 열중하는데/ 생김생김은 짐승이로되 호화찬란한 짐승이라/ 포도대장 깜짝 놀라 사면을 살펴보는데/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이게 어느 천국이냐/ 서슬 푸른 용트림이 기둥처처 승천하고 맑고 푸른 수영장엔 벌거벗은 선녀(仙女) 가득/ 몇십 리 수풀들이 정원 속에 그득그득, 백만 원짜리 정원수(庭園樹)에 백만 원짜리 외국(外國) 개/ 천만 원짜리 수석비석(瘦石肥石), 천만 원짜리 석등석불(石燈石佛), 일억 원짜리 붕어 잉어, 일억 원짜리 참새 메추리/ 문(門)도 자동, 벽도 자동, 술도 자동, 밥도 자동, 계집질 화냥질 분탕질도 자동자동/ 여대생(女大生) 식모 두고 경제학박사 회계두고 임학(林學)박사 원정(園丁)두고 경영학박사 집사두고/ 가정교사는 철학박사 비서는 정치학박사 미용사는 미학(美學)박사 박사박사박사박사/ 잔디 행여 죽을세라 잔디에다 스팀 넣고, 붕어 행여 죽을세라 연못 속에 에어컨 넣고/ 새들 행여 죽을세라 새장 속에 히터 넣고, 개밥 행여 상할세라 개집 속에 냉장고 넣고/ 대리석 양옥(洋屋)위에 조선기와 살쩍얹어 기둥은 코린트식(式) 대들보는 이오니아/ 선자추녀 쇠로 치고 굽도리 삿슈 박고 내외분합 그라스룸 석조(石造)벽에 갈포 발라/ 앞뒷퇴 널찍 터서 복판에 메인홀 두고 알 매달아 부연 얹고/ 기와위에 이층 올려 이층 위에 옥상 트고 살미살창 가로닫이 도자창(盜字窓)으로 지어놓고/ 안팎 중문 솟을대문 페르샤풍(風), 본따놓고 목욕탕은 토이기풍(風), 돼지우리 왜풍(倭風)당당/ 집 밑에다 연못파고 연못 속에 석가산(石假山), 대대층층 모아놓고/ 열어재킨 문틈으로 집안을 언 듯 보니/ 자개 케비넷, 무광택 강철함롱, 봉그린 용장, 용그린 봉장, 삼천삼백삼십삼층장, 카네숀 그린 화초장, 운동장만한 옥쟁반, 삘딩같이 높이 솟은 금은 청동 놋촉대, 전자시계, 전자밥그릇, 전자주전자, 전자젓가락, 전자꽃병, 전자거울, 전자책, 전자가방,/ 쇠유리병, 흙나무그릇, 이조청자, 고려백자, 꺼꾸로 걸린 삐까소, 옆으로 붙인 샤갈,/ 석파란(石坡蘭)은 금칠액틀에 번들번들 끼워놓고,/ 내리닫이 족자는 사백 점 걸어두고, 산수화조호접인물 (山水花 鳥蝴蝶人物) 팔천팔백팔십팔점이 한꺼번에 와글와글,/ 백동토기, 당화기, 왜화기, 미국화기, 불란서화기, 애태리화기, 호피담뇨 씨운 테레비, 화류문갑 속의 쏘니 녹음기, 대모책상 위의 밋첼 카메라, 산호책장 곁의 알씨에이 영사기, 호박필통에 꽂힌 파카 만년필, 촛불 켠 샨들리에, 피마주 기름 스탠드라이트, 간접직접 직사곡사 천장바닥 벽조명이 휘황캄캄 호화율율./ 여편네들 치장 보니 청옥 머리핀, 백옥 구두장식,/ 황금 부로취, 백금 이빨, 밀화 귓구멍마게, 호박 밑구멍마게, 산호 똥구멍마게,/ 루비배꼽마게, 금파 단추, 진주 귀걸이, 야광주 코걸이, 자수정 목걸이, 싸파이어 팔지/ 에어랄드 발찌, 다이야몬드 허리띠, 터키석 안경대./ 유독 반지만은 금칠한 삼 원짜리 납반지가 번쩍번쩍 칠흑암야에 횃불처럼 도도무쌍(無雙)이라!/ 왼갖 음식 살펴보니 침 꼴깍 넘어가는 소리 천지가 진동한다/ 소털구이, 돼지콧구멍볶음, 염소수염튀김, 노루뿔삶음, 닭네발산적, 꿩지느라미말림,/ 도미날개지짐, 조기바톱젓, 민어 농어 방어 광어 은어 귀만 짤라 회무침,/ 낙지해삼비늘조림, 쇠고기 돈까스, 돼지고기 비후까스, 피안 뺀 복지리,/ 생율, 숙율, 능금, 배 씨만 발라 말리워서 금딱지로 싸놓은 것, 바나나식혜, 파인애플화채, 무화과 꽃닢 설탕 버무림,/ 롱가리트 유과, 메사돈 약과, 사카린 잡과, 개구리알 수란탕, 청포우무, 한천묵, 괭장망장과화주, 산또리, 계당주, 샴펭, 송엽주, 드라이찐, 자하주, 압산, 오가피주, 죠니워카, 구기주, 화이트호스, 신선주, 짐빔, 선약주, 나폴레옹 꼬냑, 약주, 탁주, 소주, 정종, 화주, 빼주, 보드카람주(酒)라!/ 아가리가 딱 벌어져 닫을 염도 않고 포도대장 침을 질질질질질질 흘려싸면서 가로되/ 놀랠 놀짜로다/ 저게모두 도둑질로 모아들인 재산인가/ 이럴 줄을 알았더면 나도 일찍암치 도둑이나 되었을 걸/ 원수로다 원수로다 양심(良心)이란 두글자가 철천지 원수로다//
이리 속으로 자탄망조하는 터에/ 한 놈이 쓰윽 다가와 써억 술잔을 권한다/ 보도 듣도 맛보도 못한 술인지라/ 허겁지겁 한잔 두잔 헐레벌떡 석잔 넉잔/ 이윽고 대취하여 포도대장 일어서서 일장연설 해보는데/ 안주를 어떻게나 많이 쳐먹었던지 이빨이 확 닳아 없어져 버린 아가리로/ 이빨을 딱딱 소리내 부딪쳐가면서 씹어뱉는 그 목소리 엄숙하고 그 조리 정연하기/ 성인군자의 말씀이라/ 만장하옵시고 존경하옵는 도둑님들!/ 도둑은 도둑의 죄가 아니요, 도둑을 만든 이 사회의 죄입네다/ 여러 도둑님들께옵선 도둑이 아니라 이 사회에 충실한 일꾼이니/ 부디 소신(所信)껏 그 길에 매진, 용진, 전진, 약진하시길 간절히 간절히 바라옵고 또 바라옵니다./ 이 말 끝에 박장대소 천지가 요란할 때/ 포도대장 뛰어나가 꾀수놈 낚궈채어 오라 묶어 세운 뒤에/ 요놈, 네놈을 무고죄로 입건한다./ 때는 노을이라/ 서산낙일에 객수(客愁)가 추연하네/ 외기러기 짝을 찾고 쪼각달 희게 비껴/ 강물은 붉게 타서 피 흐르는데/ 어쩔꺼나 두견이는 설리설리 울어쌌는데 어쩔거나/ 콩알 같은 꾀수묶 어 비틀비틀 포도대장 개트림에 돌아가네/ 어쩔꺼나 어쩔꺼나 우리꾀수 어쩔거나/ 전라도서 굶고 살다 서울 와 돈 번다더니/ 동대문 남대문 봉천동 모래내에 온갖 구박 다 당하고/ 기어이 가는구나 가막소로 가는구나/ 어쩔꺼나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한 사정 누가 있어 바로잡나/ 잘 가거라 꾀수야/ 부디부디 잘 가거라.//

꾀수는 그길로 가막소로 들어가고/ 오적(五賊)은 뒤에 포도대장 불러다가 그 용기를 어여삐 녀겨 저희 집 솟을대문,/ 바로 그 곁에 있는 개집 속에 살며 도둑을 지키라 하매, 포도대장 이 말 듣고 얼시구 좋아라/ 지화자 좋네 온갖 병기(兵器)를 다 가져다 삼엄하게 늘어놓고 개집 속에서 내내 잘 살다가/ 어느 맑게 개인 날 아침,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다 갑자기/ 벼락을 맞아 급살하니/ 이때 또한 오적(五賊)도 육공(六孔)으로 피를 토하며 꺼꾸러졌다는 이야기. 허허허/ 이런 행적이 백대에 민멸치 아니하고 인구(人口)에 회자하여/ 날 같은 거지시인의 싯귀에까지 올라 길이 길이 전해오겄다.//

 


 

                                                    강진 윤한봉 생가에서 빈산을 부르는 임진택 선생

 

 

[시온성] 김지하 시인 시 모음, 김지하가 말하는 지하라는 필명...

 

“김지하 시인 시 모음” - 시온성

“김지하 시인 시 모음” BY tempia7 ON 6. 13, 2007 "김지하시인시모음" "타는목마름으로" 신새벽뒷골목에네이름을쓴다민주주의여내머리는너를잊은지오래내발길은너를잊은지너무도너무도오래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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