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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평생의 친구 / 류인혜

부흐고비 2021. 2. 19. 10:24

일 년 만에 동창회에 갔다 온 친구가 네 사람에 관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사람이 다르다고 일어난 일이 네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로 통일된다. 네 사람의 일이 모두 죽음에 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남자 동창 두 명이 병으로 떠났고, 두 여자 동창의 남편이 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우울한 친구의 음성이 아니라도 한 해 동안에 그런 일을 당해 모임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통계적으로 보면 이제는 갑자기 떠나기 쉬운 나이대에 이르렀다. 하늘이 준 연한을 사람이 어찌 짐작하리요만 갑자기 일을 당한 사람들은 억울한 죽음을 쉽게 순복하기 어렵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0년이 넘어서야 동기들이 만났다. 50대의 중늙은이가 되어서 어린 날을 추억하며 감동하는 일을 시작한 지 몇 해가 되었다. 총동창회의 운동회를 계기로 전날에 우리기만 모여 저녁을 먹고, 회의를 하고, 불참한 동기의 안부를 묻는 일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제는 남의 부인과 남편이 된 사람의 이름을 함부러 불러도 괜찮고, 누가 시비를 걸어도 상관이 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모여서 그렇게 희희낙락하는 재미가 있어 동창회의 모임들이 번성하나 보다.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은 가끔 같이 여행도 한단다. 우리는 아직 덜 늙어서 그런 일은 허용이 안 된다고 농담을 하지만 요즘 나온 영화의 안내를 보니 편하게 되기에는 아직 세월이 많이 남아있다. 70대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어 신나게 사는 영화다. 그 제목이 이제는 <죽어도 좋아>이다. 더 이상의 기쁨은 없다는 뜻인데 사람이 만나서 얼마나 즐거우면 그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인생의 괴로움을 통과하여 여분으로 얻는 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의 속궁합이 딱 맞아서 온 천하에 내어놓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나 보다. 신문에 나온 포스터의 두 사람의 활짝 웃는 표정이 너무 천진하다.

그 영화가 화제에 오른 계기로 남자와 여자의 인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늙어서 서로 등을 긁어 줄 상대가 있으면 복이라고 한다. 악처가 효자보다 낫다는 말도 있다. 남이던 부부가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가정의 시작은 젊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이다. 둘이서 결혼이라는 의식을 시작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죽을 때까지 함께 살 것을 맹세하며 공식적으로 허락을 얻는다. 젊어서 만나는 것은 후손을 위한 것이다. 건강한 마음과 몸으로 부부의 관계를 맺어 가정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가구를 장만하고 솥을 사고 숟가락, 젓가락을 사서 살아간다. 세월이 흐르면 아이가 태어나고, 수많은 사건을 해결하면서 한 가정의 역사를 마련한다.

그러나 가장 큰 원수가 만난 것이 부부라는 말도 있다. 사소한 일에도 의심하여 싸우며, 가정의 기선을 잡기 위해 싸우며, 미워서 싸우며, 살아가기가 힘이 들어서 싸우며 사는 것이 부부다. 남편과는 몇 번 크게 싸웠다. 원인을 따지면 우습다. 간단한 일로 시작한 말다툼이 커져서 나중에는 서로 원수같이 되어서 만남을 저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을 당하면 함께 살아온 생활이 흔들리는 것이다. 둘이서 하던 일을 혼자 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열심히 미워하며 싸우던 상대를 잃은 허전함은 당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허망함이다.

여자가 나이가 들어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었을 때 남편이 죽으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다고 우스개를 한다. 정말로 그런지 궁금했는데 얼마 전 남편을 먼저 보낸 사람의 마음을 엿보는 기회가 있었다. 농담 속에 뼈가 있다고 지나가는 생면부지의 남자를 보면서 "내 남자다"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인다는 말이 "나는 남자가 좋아, 이불 속에서 같이 있을 사람을 만나고 싶어."라고 하자 모두들 와르르 웃었다. 웃음 끝에 달리는 연민의 자락에 가슴 아파서 그를 바로 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젊음으로 만나 오래 함께 살면서 자손들이 자리 잡아가는 것을 도와주고 힘이 다했을 때, 앞서거니 따라 가거니로 떠나게 되면 얼마나 귀한 복이 될까. 그렇게 평생 동안 마음대로 시비를 붙을 수 있고, 농담도 나누며 살아갈 친구를 우리는 소홀히 하고 있다.


 

류인혜 수필가는 1984년 '한국수필'에서 수필 <우물>로 추천 완료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1985년 '현대시조'에 시조 <아침>과 <숲>으로 초회 추천 되었으며, 이어서 <낮도깨비>로 추천 완료하였다. '한국수필'등단 작가들의 모임인 '한국시필작가회' 창립발기인 8명 중의 한 사람으로 제9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수필'편집위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한국수필가협회, 현대시조문학회, 죽순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1993년 첫 번째 수필집 '풀처럼 이슬처럼'은 사유 깊은 작품세계로 수필 문단의 관심을 받았다.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받아 세 번째 수필집 '순환'을 선우미디어에서 발간하였다.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두어 '생명의 숲'과 '숲과 문화'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계간 '수필세계'에 테마에세이 <나무이야기>를 연재했다. 1999년에 발간한 두 번째 수필집 '움직이는 미술관'으로 제18회 '한국수필문학상(한국수필가협회)'을 수상했으며 2007년 '나무 이야기'(선우올리브북스1)로 제23회 '펜문학상(국제펜클럽한국본부)'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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