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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그리운 '사로잡힘' / 최소원

부흐고비 2021. 2. 19. 09:11

나는 요즘 '사로잡힌다는 것' 에 대해 종종 생각해 본다.
아니, 종종 생각해 보는 정도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그리움과 향수를 가지고 생각하고 느끼고 연구하고 상상한다. 생각하고 연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님을 잘 알지만 나는 그래도 계속 연구를 해 본다. 굳이 말하자면 '사로잡힘에 관해 생각하는 것' 에 사로잡혀 있다고나 할까.

나는 예전에는 원래 무엇에 '빠지기를' 잘하는 성격이었다.
뭔가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옆도 못 돌아보고 그것에만 열중하다가 나중에 부모님에게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으니 적당한 조치를 취해야겠다."
는 경고(?)를 받고서야 '아, 내가 또 그랬구나' 하고 깨닫곤 했다.
그래서 자라면서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들어온 이야기도 아마 "균형 감각을 가져라" 는 말이 아니었나 싶다.

중, 고등학교 때는 어머니의 표현을 빌면 '친구한테 엎어져서' 간도 쓸개도 다 빼 줄 지경이 되어 있었고, 대학교 때는 써클에 맹목적으로 정신없이 빠져서 학교를 다니는 것인지 써클을 다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을 바쳤다.

책을 읽을 때도 내가 지금 책을 읽어야 하는지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앞뒤 생각 없이 책에 열중하다가 중요한 시험을 망치는 일이 허다했다. 대학 입시를 눈앞에 둔 고등학교 3학년 때에도 책가방 가득 소설책을 넣어가지고 다녔으니….

그러니 사랑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거의가 내 마음을 전할 기회가 없는 짝사랑이어서 별반 로맨틱한 사연은 없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나대로 사랑을 하고 있었는데 그 짝사랑하는 일에 완전히 몰두해서 일기장에는 그 이야기뿐이었고 온통 '그' 뿐인 세상이었으며 '나는 사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까지 썼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회사에 다닐 때, 프로젝트의 데드라인(마감 날짜)이 다가와 우리 팀 전부가 야근을 했던 적이 있다. 며칠 동안이나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낮도 밤도 없이 작업을 했는데, 열중해서 일을 하다 눈을 들어 창밖을 보면 어스름히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혀는 깔깔했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그 피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뿌듯한 만족감으로 다가왔다. 다른 일은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고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프로젝트에만 매달렸다.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고 책도 신문도 T.V도 보지 않았다. 나중에는 옷 갈아입고 잠시 눈 붙이러 하루에 한 번 쯤 집에 가는 것도 시간이 아깝고 귀찮아서 어디 오피스텔 같은 곳에 침대를 놓고 일하다가 잠깐 자고 또 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일 중독이 되어 있었다.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그리고 직장인이 된 후에도 나는 여전히 무엇인가에 빠져서 치열하게 살았고 계속해서 주위 사람들의 걱정과 질책과 때로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실, 뭔가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생활을 아주 단조롭게 만든다.
그 외의 것에는 관심도 생각도 마비되고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며 온 마음과 열정과 몸의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기꺼이 사로 잡힌다….
어찌 보면 평형 감각을 상실할 수도 있고 주위의 다른 상황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고 짜증나게 할 수도 있고 그래서 단세포적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고 설익은 집요함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지만 돌이켜 보면 무척 행복한 기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을 재어 보거나 손익을 따질 수도 없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료하면서 완전한 상태. 그래서 행복한 기분에 취해 있기도 훨씬 더 쉽지 않았나 싶다. 한 가지만 충족되면 무조건 행복해 졌으니까.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내가 단점이라고 생각해 왔던 '한번 빠지면 옆도 못 돌아보는 것'을 고치려고 애를 썼다. 사실 애를 쓰기 이전에 우선은 주부의 잡다한 일상사가 뭔가에 정신없이 빠지고 열중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기도 하지만 내 나름대로도 노력을 했다. 새로운 일에 관심을 가질 때도 앞뒤 전후를 생각하고 주위와 조화를 이루면서 열중하려고 했고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을 가슴 깊이 새기며 일부러 현재의 내가 빠져 있는 것과는 다른 것들을 찾아다니고 만났다.

그 결과 나는 더 이상은 무엇에건 물불을 못 가리고 지나치게 몰두하는 일이 없어지게 되었고 '그래, 나이가 불혹이 가까워 오니 어디든 혹해서 빠지는 버릇은 버리고 물 흐르듯 살아야지.' 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요즘 평소에 바라던 대로 물 흐르듯 우아하고 여유 있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내가 바랬던 생활, 무엇에도 휘둘리는 법 없이 한 발 떨어진 곳에서 그윽하게 관조하듯 바라볼 수 있는 생활, 그렇게 살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 생활이 언제부터인가 이상스레 나를 지치고 짜증나게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떤 것에도 예전 같은 열정이 안 생기고 신이 나지 않는데다가 금세 회의가 생기고 마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수필에서 '나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가족 때문에 내가 해야 하는 일들에서 조금 자유로왔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라고 쓴 것을 보고 무척 공감을 했던 적이 있는데 요즘에는 '그래서 자유로와지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심드렁하기만 하다. 열정도 식고 신명도 없는 이 생활이 내가 원하던 '물 흐르듯 여유 있게' 사는 것이 아님은 분명한데…. 우아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도 적성에 맞아야 하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나에게는 이 '관조' 의 템포로 사는 것이 무의욕과 무기력과 무위(無爲)로 나타나고 있으니….

요사이 거의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이 묻는다.
"글쓰기 그만 두었어?" "그만 두기는요 .... 그냥 바쁘니까 그렇지요 ..."
컴퓨터를 켜 놓고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앉아 있어 보지만 글은 잘 되지 않고 언젠가 어느 소설가 한 분이 우리 글모임에서 했던 말만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저는 그 소설을 쓸 때 무척 행복했어요. 거기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거든요. 어머니가 밥 먹 으라고 해도 신경질을 냈지요."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크고 성장해 가는 것만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금 '사로잡히는 것'을 그리워하게 되었는데 이제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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