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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목월 시인

부흐고비 2021. 2. 24. 21:02

이별의 노래 / 박목월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만술아비의 축문 / 박목월

아배요 아배요/ 내 눈이 티눈인 걸/ 아배도 알지러요./ 등잔불도 없는 제사상에/ 축문이 당한기요./ 눌러 눌러/ 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가이소./ 윤사월 보릿고개/ 아배도 알지러요./ 간고등어 한 손이믄/ 아배 소원 풀어드리련만/ 저승길 배고플라요/ 소금에 밥인나마 많이 묵고 묵고 가이소.// 여보게 만술아비/ 니 정성이 엄첩다./ 이승 저승 다 다녀도/ 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락꼬,/ 망령도 응감하여, 되돌아가는 저승길에/ 니 정성 느껴느껴 세상에는 굵은 밤이슬이 온다.//

산도화 / 박목월

산은/ 구강산/ 보랏빛 석산//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산이 날 에워싸고 /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귤 / 박목월

밤에 귤을 깐다./ 겨울밤에 혼자 까는 귤/ 나의 시가/ 귤나무에 열릴 수 없지만/ 앓은 어린 것의/ 입술을 축이려고/ 겨울밤 자정에 혼자 까는 귤./ 가슴에 젖어오는 고독감을 나타내는/ 형용사가 없지만/ 밤에 혼자 귤을 까는/ 한 인간의 고독감을 나타내는/ 말이 있을 순 없지만/ 한밤에 향긋한 귤향기가 스민/ 한 인간의 가는 손가락//

나무 / 박목월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가정家庭 / 박목월

지상(地上)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詩人)의 가정(家庭)에는/ 알 전등(電燈)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地上)/ 연민한 삶의 길이어./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地上)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성탄절의 촛불 / 박목월

촛불을 켠다./ 눈을 실어 나르는 구름/ 위에서는 별자리가/ 서서히 옮아가는/ 오늘밤/ 크리스마스이브에/ 눈이 내리는 지상에서는/ 구석마다 촛불이 켜진다./ 믿음으로써만/ 화목할 수 있는 지상에서/ 오늘 밤 켜지는 촛불/ 어느 곳에서 켜든/ 모든 불빛은/ 그곳으로 향하는/ 오늘밤/ 작은 베들레헴에서/ 지구 반 바퀴의 이편 거리/ 한국에는 한국의 눈이 내리는 오늘 밤/ 촛불로 밝혀지는/ 환한 장지문/ 촛불을 켠다.//

4월의 노래 / 박목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송아지 / 박목월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부활절 아침의 기도 / 박목월

주여/ 저에게/ 이름을 주옵소서./ 당신의/ 부르심을 입어/ 저도 무엇이 되고 싶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태어나기 전의/ 이 혼돈과 어둠의 세계에서/ 새로운 탄생의/ 빛을 보게 하시고/ 진실로 혼매한 심령에/ 눈동자를 베풀어주십시오.// ‘나’라는/ 이 완고한 돌문을/ 열리게 하옵시고/ 당신의 음성이/ 불길이 되어/ 저를 태워 주십시오.// 그리하여/ 바람과 동굴의/ 저의 입에/ 신앙의 신선한/ 열매를 물리게 하옵시고/ 당신의 부르심을 입어/ 저도/ 무엇이 되고 싶습니다.// 주여/ 간절한/ 새벽의 기도를 들으시고/ 저에게/ 이름을 주옵소서.//

청노루 / 박목월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총성 / 박목월

청청 우는 엠원의/ 총소리는 깨끗한 것/ 모조리 아낌없이 버렸으므로/ 비로소 철(徹)한 인격(人格)……/ 그것은 신격(神格)의 자리다./ 그런 맑은 쇳소리./ 아아 나는 전선(戰線)이 비롯되는/ 어느 산머리에서/ 산이 오히려 기겁을 해서/ 무너지는 맑은 소리에/ 감동한다./ 쩡, 스르르청/ 엄숙한 것에서/ 한결 모질게 이룩한/ 바르고, 준엄하고, 높고, 깨끗한/ 뜻의 소리/ 아/ 엠원은 쩡 스르르청/ 부정한 것의 가슴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그 영혼을/ 꿰뚫고, 바수고, 깨고, 차고/ 깨우치려 가는 것이다.//

나그네 /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장사익의 노래 : 나그네


나무
/ 박목월

유성(儒城)에서 조치원(鳥致院)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修道僧)일까, 묵중(默重)하게 서 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公州)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過客)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溫陽)으로 우회(迂廻)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문을 지키는/ 파수병(把守兵) 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默重)한 그들의, 침울(沈鬱)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난(蘭) / 박목월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내 주었으면/ 여유있는 하직이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가지를 뻗고 조용히 살아가고/ 그 섭섭한 뜻이 꽃망울 이루어/ 머얼리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엄마하고 / 박목월

엄마하고 길을 가면/ 나는/ 키가 더 커진다.// 엄마하고 얘길 하면/ 나는/ 말이 술술 나온다.// 그리고 엄마하고 자면/ 나는/ 자면서도 엄마를 꿈에 보게 된다.// 참말이야, 엄마는/ 내가/ 자면서도 빙그레/ 웃는다고 하셨어.//

이런 시() / 박목월

슬며시 다가와서/ 나의 어깨를 툭치며/ 
아는 체 하는/ 그런 詩,/ 대수롭지 않게/ 스쳐가는 듯한 말씨로써/ 가슴을 쩡 울리게 하는/ 그런 詩,/ 

읽고 나면/ 아, 그런가부다 하고/ 지내쳤다가/ 
어느 순간에/ 번개처럼/ 번쩍 떠오르는/ 그런 詩,/ 

투박하고/ 어수룩하고/ 은근하면서/ 슬기로운/ 그런 詩/ 

하늘 한자락이/ 바다에 적셔지 듯한/ 푸나무와/ 
푸나무 사이의/ 싱그러운/ 그것 같은/ 그런 詩,/ 

밤 늦게 돌아오는 길에/ 문득 쳐다보는,/ 갈라진 구름 틈서리로/ 밤하늘의/ 눈동자 같은/ 그런 詩.//

 

달빛 / 박목월

달빛이/ 잔잔한/ 바다./ - 아가, 어서 자렴.// 밤이슬이/ 자욱한/ 잎새./ - 아가, 꿈나라로 돛을 펴렴.// 기슭을/ 찰랑이는/ 물결./ 초밤별이 새알 형제 잠드는 등지를/ 기웃거린다.// 달빛 이/ 수런대는/ 잎새,/ 꿈꾸면서 머금는/ 착한 마음.// 아가,/ 잘 자렴./ - 달빛이 잔잔한 바다.// 꿈꾸면서/ 머금는 착한 마음./ - 내일은 환한 아침/ 이슬처럼 눈을 떠라.//

 

달빛 / 박목월

달빛을 걸어가는 흰 고무신./ 오냐 오냐 옥색 고무신/ 님을 만나러 가지러?/ 아닙니다, ./ 낭군을 마중 가나?/ 아닙니다, ./ 돌개울이 디딤돌도/ 안골짜기로 기어오르는/ 달밤이지러 얘./ 아무렴,/ 그저 안 가봅니까 얘./ 오냐 오냐 흰 고무신/ 달빛을 걸어가는 옥색 고무신.//

 

박목월 -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본명은 영종(泳鍾)으로, 1915년 경상북도 월성군(현 경주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수리조합장을 지내기도 하는 등 비교적 여유 있는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어릴 적엔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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