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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자판기 / 송복련

부흐고비 2021. 2. 22. 09:08

허겁지겁 쫓아다니다가 문득 만난 자판기. 스토리 웨이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음료들을 보는 순간 심한 갈증을 느낀다. 지폐를 넣자 캔 사이다 하나가 덜커덩 떨어진다. 뚜껑을 젖히니 딱, 소리가 나고 찬김이 피어오른다. 음료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땀이 걷히고 서늘해진다.

얼마나 편리한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고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쫓기듯 살아가는 요즈음 사람들에게 딱 어울리는 상징물이다. 자판기에 진열되는 상품들은 날마다 진화한다. 과자와 라면이 있나 하면 책까지 팔고 있다. 이웃나라에서는 아이스크림, 피자, 화장품도 판다니, 가만히 있어도 필요한 사람들을 향해 공격적으로 다가오는 상술에 그저 놀랄 뿐이다. 500원이면 처방을 받는 ‘마음 약방 자판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분노조절장치가 고장 난 어떤 사람이 처방서를 받아들고 추천하는 산책길에 나섰다는 글을 읽고 참 재미있는 자판기도 있다 싶었다.

자판기 안에서 보내오는 시선은 사뭇 매혹적이다. 밝은 조명 아래 눈부신 자태를 뽐내며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은, 광고속의 인물들처럼 클래식하거나 섹시하다. 갇힌 것들의 도열한 모습은 영화가 보여준 업소들의 풍경처럼 농염하다. 선택의 순간을 기다리며 불빛 아래 제 몸매를 광고한다. 거기에는 인공미를 가미하여 달콤한 맛은 갈증만 더 부추기고 있을 뿐 순수미를 찾기 어렵다.

그들이 자리 잡은 곳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길거리 문화를 볼 수 있다. 복권판매소나 떡볶이와 호떡이 있는 포장마차나 좌판 들, 모두가 부담 없는 가격으로 길거리에 나와 있다. 먹으며 걷거나 허기를 잠시 속일 때 요긴한 것들이다. 외국 여행에서 눈에 띄는 풍경도 그랬다. 카페마다 바깥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풍경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풍경이 되는 셈이다.

기계가 건네는 덜커덩거리는 소리와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음은 감정을 느낄 수 없어 답답하다. 여기저기서 인건비를 아낀다고 기계들을 모셔 놓아 감흥 없는 것들과 마주할 때가 많다. 사람을 밀어내는 일은 어디까지 가려는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현금 인출기가 은행직원을 감축시키고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드론이 뜨자 사라질 업종들을 점치는 소리도 들린다. 가상영화에서 본 이야기들이 하나 둘 현실이 되는 바람에 사람이 기계 앞에서 자꾸 주눅이 든다. 사람의 손과 발이 확장된 이래 최악의 사태가 다가오는 것인가. 이세돌과 아고라가 대결하는 장면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지폐와 동전이라야 입을 여는 자판기는, 돈 앞에서는 한없이 너그럽다가도 주머니가 비어있으면 막무가내로 침묵한다. 때때로 배신을 하는데 삼킨 동전을 내놓지 않아 손바닥으로 두들겨 맞거나 발에 걷어차이기도 한다. 그깟 작은 돈에 흥분하느냐고 하지만 정작 화가 나는 것은 최소한 미안하다고 해야 할 형편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주고받는 철저한 계산방식으로 덤이 없는 것들에게 인정머리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길거리로 나온 것들에게 하루 한 차례 주인이 다녀간다. 빈자리를 채우고 돈은 거두어가 버린다. 종일 수고를 했지만 제 것이 되지 못하는 자판기. 먹어도먹어도 허기지는 뱃속을 가진 자판기는 한편으로는 밥벌이를 나간 이들이 겪는 수고와 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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