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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파초가 있는 풍경 / 김나현

부흐고비 2021. 2. 22. 12:53

파초를 날마다 보고 산다. 익숙해지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내성을 키워야 하는 ‘집콕’ 생활에 적잖이 위로가 된다. 여름 땡볕 아래에서 푸른 잎을 맘껏 펼친 자유와 당당함이 부러워서일까. 그런 무던한 파초 하나 집에 있었으면 했다.

파초를 들먹이면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을 아니 떠올릴 수 없다. 박연구 수필가가 고서점에서 고색이 창연한 마분지로 된 수필집 한 권을 들고 몸을 떨기까지 했다던 그 ‘무서록’. 책장에 범우문고판 ‘무서록’이 있어 가끔 꺼내 든다. 거기에 실린 짧은 수필 ‘파초’를 읽곤 하는데 몇 군데 밑줄을 그어놓았다. 특히 “나는 그 밑에 의자를 놓고 가끔 남국의 정조情調를 명상한다”는 문장을 되짚으며 파초를 심은 정원을 꿈꾸곤 한다.

절에 들를 때 나무인가 싶을 만큼 푸르른 풍채가 듬직하던 파초. 쌍계사 팔상전과 금당 가는 길에, 직지사 응진전에, 예천 장안사, 해인사, 사천 다솔사 적멸보궁에, 법당에서 흘러나오는 독경소리를 잎사귀에 새겼을 파초가 눈에 들기 시작했다. 그 잎에 투두둑 듣는 빗소리를 들으려고 창가에 심었다는 옛 문인의 고상한 풍취를 흉내 내고 싶었음일까. 이런 속내를 읽은 지인이 1m는 너끈히 되는 파초를 심은 화분을 들고 왔다. 여린 초록 잎을 달고 온 파초 분을 보는 순간, 해후상봉한 듯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뭉클해졌다. 가슴이 두근대기까지 했다. “요게 언제 자라서 키 큰 내가 들어설 만치 그늘이 지나” 하며 한심해했다는 ‘파초’를 쓴 작가처럼.

차향이 밴 어느 집에서 분양받았노라고, 그 집 마당에 있다는 파초를 보러 염치를 챙길 새 없이 당장 달려갔다. 수영역 인근 주택가 골목에 있는 대문을 들어서니, 하늘이 제 영역인 듯 3m는 좋이 자란 늠름한 파초가 보란 듯 눈앞에 있다. 절에만 있는 줄 알았던 파초가 도심 주택에 있다는 게 놀라웠다. 회포를 풀듯 한동안 파초와 눈 맞추고, 차를 즐긴다는 그곳 요천당(樂堂)으로 들어섰다. 차방에서 너울대는 파초를 내다보며 주인이 우려 주는 차를 마시는 운치가 그만이었다. 비 오는 날에 창문을 활짝 열고 앉아있고 싶은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나올 때 보니 대문간에 엎어놓은 장독이 하나 있다. 앉아 파초를 감상하는 자리란다. 앞집 사람도 옥상에 올라 파초를 보는 기쁨을 누린다니. 파초집 주인도, 이웃도 부러울 지경이다.

파초가 온 지 며칠째 되던 날, 또르르 말린 싹이 한 뼘이나 솟아있다. 어느 한시에서처럼 ‘봉함된 서찰’처럼 품을 돌돌 여미고서. 잎을 보고 싶은 마음이 성급하지만 부담 줄까 무심한 척 엿보는 중이다. 비라도 내리는 어느 날엔가는 뜬금없이 요천당으로 달려갈지도 모르겠다. 활동반경이 강제로 닫혀버린 일상을 파초에 듣는 빗소리로 달래볼까 싶다. 마당이 있으면 반나절 해가 지나가는 자리에 파초를 심고, 그 잎이 드리운 푸른 하늘 아래 의자 하나 놓아두련만.

칩거하다시피 하던 여름 막바지에는 파초를 찾아 길을 나섰다. 표충사로, 인근 신흥사로 들렀지만 파초는 없었다. 실망하고 돌아오다 배내골 어디쯤 지날 때였다. 초록색 줄기가 선명하게 보이는 절 하나가 스쳐 가는데 멀리서 봐도 파초가 분명했다. 가던 길을 돌려 그곳으로 가니 입구에 모과가 조랑조랑 열린 법관사라는 절이다. 가정집처럼 아담한 절에 찢어져 너풀거리는 파초가 파수꾼인 양 우뚝 서 있다. 후끈한 늦여름에 숨죽인 절 풍경이 전혀 적요하지 않다. 푸른 기운을 주는 파초가 있어서일 것이다. 때마침 소나기 한줄기가 마당을 훑고 지나자 커다란 잎이 놀란 듯 춤을 춘다.

파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소녀 적에 들었지 싶은 가수 문정선이 부른 ‘파초의 꿈’이다. ‘태양의 언덕 위에 /꿈을 심으면 /파초의 푸른 꿈은 /이뤄지겠지’. 이런 노랫말이 코로나 시대를 건너는 모두에게 따듯한 위안을 건넨다. 하많은 외로움 속에서도 언젠가 땅을 딛고 일어서리라는 노랫말처럼, 졸지에 터전이 바뀌고도 당나귀 귀 모양으로 잎을 펼쳐가는 파초가 대견하다. 좀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 중에도 꿋꿋함을 잃지 않는 우리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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