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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요리하는 중년 / 양일섶

부흐고비 2021. 2. 21. 08:53

인생의 종점까지는 아직 까마득하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고 싶을 정도로 삼시 세끼를 챙겨 먹는 것이 힘들어질 때가 있다. 삼일이나 일주일 정도 버틸 수 있는 신비한 약이 없을까, 과학자들은 뭣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남편이 퇴직한 후, 밥 때문에 외출도 못하고 있다.'는 아주머니들의 푸념을 자주 듣는다. 먹는 것 때문에 가정불화가 자주 발생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집에서 밥만 축내는 나도 '삼식이'가 아닌지 염려가 된다.

직장 동료들이 요리한 옻닭이나 추어탕을 먹어 본 적이 몇 번 있다. 맛을 떠나서 직접 요리하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지만 나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직장생활 30년을 끝낼 때까지 내가 끓일 수 있는 것은 라면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보다 일찍 퇴직한 아내는 현실에 적응을 잘하고 있다. 한자를 배우면서 '아이돌보미'를 하고, 산악자전거를 타러 다닌다. 막내아들은 고3보다 더 바쁜 대학 졸업반이다. 식구들과 달리 한갓진 나는 리모컨만 만지작거릴 따름이었다.

뭔가를 해야 했다. 굳이 가정을 위한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삼식이'라는 말만 듣지 않으면 충분하다. 잔소리와 눈칫밥에서 벗어나기 위해 며칠 밤을 고민했다.

"그래! 요리를 배우자."

무엇이든 인터넷으로 배울 수 있는 좋은 세상이다. 굳이 학원에 다닐 필요가 없다. 내가 아내보다 더 오래 살거나, 혹시 혼자 살지도 모를 일이다. 요리만 할 줄 알면 특별한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요리를 배우자는 명분을 앞세워 정신무장을 단단히 했다. 힘들었던 훈련병 시절과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이고 고속도로 주행을 끝냈을 때의 기분을 떠올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음 날 새벽밥을 먹고 막내는 학교에, 아내는 동호회 회원들과 자전거를 타고 '간절곶'까지 간다며 집을 나갔다. 설거지를 끝내고 컴퓨터의 전원을 눌렀다. 긴장된 마음으로 검색창에 '된장찌개'를 입력했다. 30분 이상 관련 정보를 정독한 후에야 비로소 감이 잡혔다. 마트에서 두부, 조개, 땡초를 구입하여 간신히 첫 요리를 완성했다.

그 후 새로운 음식 한 가지를 만들기 위해 적어도 10곳 이상의 요리 관련 사이트를 방문했다. 이것저것을 비교한 후, 나름대로 방향을 잡고 식단표를 만들었다. 1년 정도는 새벽에 일어나 식사를 준비했다. 찌개를 끓이고, 나물이나 볶음 요리를 만드는데 2시간 이상 걸리곤 했다. 계란탕, 김치찌개, 콩나물무침이 막내와 아내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었다. 자신감과 용기가 생겼다. 새롭고,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다. 시장과 마트를 샅샅이 훑었다. 서툰 칼 솜씨로 손가락을 베어 피를 보거나, 음식을 짜고 맵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소한 실수는 지속적인 노력으로 해결되었다. 어떤 요리에 간장을 넣고 소금을 풀어야 하는지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주부들의 고충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제법 할 수 있는 요리의 종류가 늘어났다. 학창시절 누나 집에서 먹었던 매콤한 어묵볶음, 거제도에 여행가서 해장국삼아 먹었던 홍합탕, 비싸게 사먹었던 간장게장, 애들이 좋아하는 닭볶음탕, 아내가 좋아하는 잡채와 대구찜도 몇 번을 시도한 끝에 고유한 맛과 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가족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까지 몰랐던 작은 행복을 느꼈다.

작년 겨울, 처갓집에서 김장을 했다. 나는 김장과 어울리지 않는 동태를 들고 갔다. 여자들이 배추를 치대는 동안 나는 점심을 준비했다. 큰 사위가 요리하는 모습을 처음 본 처가 식구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동탯국을 끓여 점심을 대접했다. 모두의 입이 벌어졌다. 공장을 경영하는 동서는 식당을 동업하자는 농담까지 하면서 두 그릇이나 비워주었다. 1년 넘게 요리를 독학하면서 최고의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나는 더 이상 식충이가 아니라 스스로 세끼를 해결할 수 있는 '자립형 삼식이'가 되었다.

친구들은 내가 요리를 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궁리 끝에 내가 만든 음식을 사진으로 찍어 블로그에 올렸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같은 모양의 그릇이 계속 올라오는 것을 보고서야 사실로 인정해 주었다. 사진을 찍다보니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처럼 음식에도 때깔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빨간 고추, 파란 부추와 미나리, 달걀노른자, 하얀 만가닥버섯 등은 색상을 맞추는데 제격이다. 눈에 보이는 색깔이 음식에 대한 호감을 한층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화장을 하고 좋은 옷을 입으려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며칠 전, '양념게장'을 백 번째 사진으로 블로그에 올렸다. 2년 전 내가 계획했던 '요리 100편'의 대장정이 마침내 달성되었다. 지인들의 칭찬보다는 당당하고 자신 있게 요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더 흐뭇하게 느껴진다. 이제 주방은 안방보다 더 편한 장소가 되었다.

초보를 거치지 않은 전문가는 없다. 무엇을 하든 경험과 경력이 중요하다. 가족을 위해 30년을 요리한 아내도 있는데 경력 2년짜리인 내가 요리를 한다고 내세울 수는 없다. 그동안 배운 것이라면 신선한 제철음식을 많이 먹는 습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즐겁게 시장에 가고, 신나게 요리를 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을 때, 그 음식은 최고의 음식이 된다. 한 가지 더 바란다면 열심히 일하고 퇴직한 남자들이 쓸데없는 자존심 버리고 항상 바쁘고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

막내는 취업을 해서 객지로 떠나고 없다. 요즘 아내와 나는 정해진 순서 없이 요리를 한다. 아내가 주방에 있으면 나는 소파에 누워 메이저리그 야구를 본다. 내가 요리를 할 때면 아내는 안방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다. 내 인생 최고의 선택 중에 하나는 스스로 요리를 배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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