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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육체의 정직함 / 지설완

부흐고비 2021. 2. 21. 15:32

‘인도와 티베트 여행기’에 꺼얼무에서 라싸까지 1,115Km를 버스로 30 시간 간다는 장면이 있다. 티베트 여행을 허가증도 없이 불법으로 버스를 타고 간다. 요변을 해결해야 할 때만 차를 세운다. 이때 우루루 내려서 풀밭으로 내려가서 볼일을 본다는 내용의 글을 읽으면서 몇 달 전의 일이 떠올랐다. 티베트를 여행했던 작가는 휴게소도 없는 허허벌판을 서른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더 신 시간을 가야 하는 열악한 상황이니 정당방위다. 나의 어처구니 없는 일을 이 작가의 글에서 떠올리는 건 뻔뻔하다.

동유럽여행 구 일째 밤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 길다는 슬로베니아의 포스토니아 종유동굴을 보았다. 슬로베니아에 발을 디뎠다는 것이 현실감이 없다. 종유동굴을 보기 위해 코끼리 열차를 타고 수많을 얼굴을 한 종유석을 보았다. 동굴 안에는 몇 명의 가이드가 각각 다른 외국어로 안내하고 있다. 그나마 영어가 낫겠다는 생각에 영어권 가이드 옆으로 갔다. 중간 중간 외국인들은 웃었지만 나는 웃고 싶어도 웃을 수가 없다.

블래드에서 점심을 먹었다. 호숫가 베란다 식탁에는 와인과 와인 잔, 샐러드가 세팅되었다. 우리 식탁은 아니다. 우리 테이블에는 후식도 없고 간이 안 된 생선요리였다. 호수 건너 산 위에 고성과 식당 앞의 호수를 감상 할 수 있는 것으로 형편없는 식사를 탕감해주었다.

채근하는 이가 없으니 게으름피우면서 버스에 올랐다. 오스트리아 짤츠브르크로 간다. 대략 여섯 시간 걸린다고 했다. 버스가 고속도로로 들어서니 안내인은 내일 관광할 곳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행들은 졸면서 듣는 둥 마는 둥 휴게소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고속도로 매점은 화장실이 대부분 무료다. 물론 물건을 좀 사야한다. 자상한 안내인은 가능한 화장실을 무료로 이용하도록 신경을 쓴다. 잔 돈이라도 절약하라는 의미인가. 하긴 생수나 화장실 이용에 비용지불을 적응을 못하고 불평하는 한국 여행객의 입막음인가.

이번 휴게소에선 일행 중에서 맥주를 들고 올라왔다. 유럽 맥주가 맛있다고 하더니 소문대로 맛있다. 각 나라 맥주를 맛보는 일도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한 두 시간 내로 휴게소를 들리기 때문에 맥주를 마시는 일을 문제가 아니다.

예정보다 늦은 시간에 국경에 도착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입국 심사를 했다. 다른 국가 입국 할 때 보다 오래 걸린다. 다른 국경들에선 여권을 걷어가거나 입국할 예정인 그 국가 직원이 버스로 올라와 우리가 들고 있는 여권을 제대로 보지 않고 훑어보고 내려갔었는데 여기선 모두 내리라고 한다. 사무실에서 한 사람 한사람 꼼꼼하게 검사를 한다. 버스 안에서 통관을 기다리는 화물트럭의 긴 줄을 보고는 불안했는데 역시 늦어진다. 이곳 국경 화장실 인심도 야박하다.

예상대로 고속도로에서 버스가 제대로 가질 못한다. 급기야는 사고가 나서 국도로 우회를 해야 한단다. 한 시간이 두 시간이 되고 세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고 있다. 휴게소는 보이지 않는다. 주유소라도 가보려고 하지만 마흔 명을 어디다 풀어놓는가. 또 한 시간이 지나고 있다.

한 명 또 한 명이 버스 앞으로 나와 안내자에게 사정을 한다. 유쾌한 버스 안이 어느덧 무겁고 어두워졌다. 맛나게 마시던 맥주가 저주가 되었다. 몸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

폭동의 순간이 이런 냄새이리라. 기사와 안내인도 눈치를 챘는지 차를 세웠다. 해가 산 밑으로 넘어가다가 나뭇가지를 놓지 못하고 있는 순간이다.

모두들 서두르면서 내렸다. 티베트의 허허로운 벌판의 여행객처럼. 인가가 없는 한가한 곳이면 금상첨화인데 집들이 드문드문 있는 그림 같은 마을이었다. 폭발할 것 같다. 누군가 우리 모습을 인터넷에라도 올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나중에 했다. ‘눈 가리고 아웅’하며 생리의 반란을 재웠다. 고통이 사라지고 안도의 숨이 나온다. 서글프다. 아들이 실종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그 순간에도 있던 체면이 이 순간에는 간 곳 없다. 오호 애재(哀哉)라 . 새벽 두 시가 다 되어서 오스트리아 국경 숙소에 도착했다. 저녁을 거른 우리에게 햄버거를 나누어 준다. 긴 여행에 끼니는 ‘꼬박꼬박’이란 신념으로 룸메이트와 다 식은 햄버거를 먹으면서 목이 멜까 미리 염려하면서 캔을 경쾌하게 땄다. 내 육체의 정직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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