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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밥솥과 요강 / 김나현

부흐고비 2021. 2. 22. 13:02

밥솥과 요강을 보자기에 싸서 들었다. 미리 잡아 놓은 이삿날에 세간붙이를 대표한 두 물건을 옮기는 일이다. 해묵은 이 집에서 이사할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애초에 품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기연미연하고 믿기지 않는다.

스무 해 전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다들 막다른 집이라며 풍수지리를 들먹였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사는 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다.비가 오면 주방 천장에서는 비가 샜고, 어느 폭우 때는 차오른 빗물이 금 간 벽으로 새어들어 자다가 혼비백산한 적도 있다. 재개발지역의 묵은 집이라 손댈 필요성이 없는 집은 늘 눅눅했다. 좁은 공간에서 다 큰 어른들과 부대끼니 애들은 애들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받는 스트레스가 컸다. 더구나 아홉 형제의 맏이로 집안 대소사를 치를 때는 불편함이 컸다.

이삿날을 정하고도 뭐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우선 버릴 물건과 가져갈 물건을 가렸다. 붙박이 가구처럼 한 자리에만 있던 살림을 끄집어내자 숨죽이고 있던 지난 시간이 먼지처럼 일었다. 옷가지며 살림살이에 깃든 기억이 뭉클뭉클 튀어나왔다.이사는 단순히 짐을 옮기는 작업이 아니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살아갈 마음을 다잡는 시간이기도 했다.

생각 같아서는, 이곳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을 미련 두지 않고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문간에 내어놓았다가 들여 놓기를 반복했다. 도로 챙겨 들인 것은 대부분 남편 물건이다. 내 마음이 그를 붙들었다가 내려놓았다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게 이삿날이 가까워지자 케케묵고 눅진한 곳을 벗어나는 후련함 보다는 오만가지 감회가 착잡하게 밀려들었다.

잦은 이사에 힘들어하는 이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반대였다. 언제 아파트가 들어설지 모르는 재개발 청사진은 어느 때 현실이 될지 모르는 가마득한 훗날의 얘기였다. 차라리 주거지를 자주 옮긴 편이 나을 뻔했다. 안정된 보금자리에의 갈망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 속처럼 암물하고 실현될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이사할 집을 구하러 다니고 틈틈이 짐정리를 했다. 혼자 이사 준비할 동안 내 건강상태는 나락으로 치달았던 모양이다. 의지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듯 몸 여기저기서 이상 신호가 감지되었다. 지속된 긴장감이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나 보았다. 치통이 극심했다. 급기야 어금니 세 개를 뽑아내고야 나를 놓아 주었다. 떠나려면 가슴에 남은 화인까지 모조리 뽑아내고 가라며 뿌리째 나를 흔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집을 계약하고 잔금을 치른 날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새집 현관문을 열었다. 가구 하나 없는 텅 빈 집이 정적으로 새 주인을 반겼다. 거실 한 쪽 벽에 무릎을 가슴팍에 오도카니 안고서 기대앉았다. 장차 펼쳐질 미지의 삶보다는 여기까지 온 무사함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창으로 길게 들이친 해가 이제 괜찮다며 따사롭게 나를 감쌌다. 지독한 압박감으로 견뎌온 그간의 일들이 떠올라 딸과 부둥켜안고 감격에 복받쳤다. 가파른 오르막의 끝이었다. 살다보면 더 높은 재도 넘을 일이 있겠지만, 이제 걸음 조심하며 내려가는 일만 남앗다.

좋은 게 좋다고 손이 없는 날을 택해서 이사하기로 했다. 살아오면서 몇 번의 이사를 그냥저냥 했다. 그러나 집안에 큰일을 겪으며 마음 졸인 때문인지 주변 말에 솔깃해졌다. 이사날짜를 손 없는 날에 맞출 수 없으면, 손이 없는 날에 요강과 밥솥 등 기본 살림을 새집으로 미리 옮기라는 거다. 날짜에 따라 방향을 바꾸어 일을 방해한다는 손이 하늘로 올라간 틈을 타 재빨리 이사 형식을 취하라고, 달막거리며 밥을 해 먹거나 하룻밤을 자며 이사한 티를 내면 더 좋다고도 했다. 말하자면 두 물건이 들어간 날이 정말로 이사한 날이고, 뒷날 가재도구를 옮기는 건 나머지 살림살이가 들어가는 것이란다. 신혼 때에 친정어머니가 사 준 요강이 이리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여태 살아오며 이런 속설을 추종한 적 없다. 그러나 심기가 불안했던 이때는 속설이라도 따르고 싶었다.

드디어 대표 세간을 옮기는 날이다. 밥솥과 요강을 보물단지처럼 챙겨들고서 새 동네로 들어선다. 그동안 몇 번 들락거려서인지 낯이 영 설지는 않다. 마음 붙이고 살 동네라 여겨 그런가. 마주치는 주민과 눈 맞추고 잘 부탁한다는 인사라도 건네고 싶다. 그들에게는 별 의미 없을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날이란 걸 그들이 알리가 없다.

챙겨온 이삿짐을 안방에 동그마니 내려놓았다. 가져온 쌀부터 씻어 솥에 안쳤다. 서먹한 집과 친해지자면 밥을 해먹는 일이 먼저일 거다. 새 주인을 기다리며 적적했을 집도 달그락거리며 밥하는 소리가 반가웠을게다. 오래지 않아 구수한 밥물냄새가 솔솔 핀다. 앙금처럼 가라앉았던 심사가 밥 뜸 드는 냄새에 화색이 돈다. 잔뜩 위축된 삶도 밥물도 잦히듯 부디 살맛나게 뜸 들었으면.

밥솥이 조용해지자 텅빈 집에 다시 적요가 깃든다. 그 공간에 뎅그러니 혼자다. 삼십여 해 살림을 지켜본 요강이 저만치서 바라보는 눈길이 측은하다. 어머니의 걱정 담긴 얼굴이 눈시울에 일렁인다. 챙겨온 밑반찬 두어 개 꺼내놓고 밥솥째 들고 앉았다. 주사위처럼 던져진 삶을 굳세게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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