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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겸상의 추억 / 김나현

부흐고비 2021. 2. 22. 13:05

분명 만장輓章이다. 큰집 높다란 담 안쪽으로 불긋불긋한 천이 나부낀다. 담장 안쪽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오겠다는 기별 없이 찾아온 고향 마을에서 큰집 담장을 올려다보고 서 있다.

출가외인이라고 그랬는지, 살기에 급급할 거라 그랬는지. 집에서는 내게 할아버지의 부음을 전하지 않았다. 어느 날 불쑥 찾은 고향에서 할아버지가 만장으로 나를 반겼다. 작은어머니가 그랬다. “할아버지가 너를 불렀는 갑다.”라고.

할아버지 생신일은 내 생일이기도 하다. 아궁이 불에 노릇하게 구운 도톰하게 살진 조기가 밥상에 오르는 이날, 할아버지와 겸상하는 나는 친척 앞에서 당당했다. 할아버지 생신 상 맞은편에 내 밥과 국을 올리면 내 생일상도 되었다. 나와 할아버지만 독상을 받고 다른 친척은 큰 상에 빙 둘러앉았다.

길고 하얀 턱수염에 송송 맺힌 막걸리 방울을 손바닥으로 쓱 훑어 내리거나, 장죽 대통을 화로에 통통 두드려 담뱃재를 털던 기억으로 남은 할아버지. 살아오며 만난 사람 다 견주어도 그분만큼 인자한 사람을 본 적 없다. 그 인자함이란 게 천성으로 우러나오는게 아니겠는지. 어릴 적에 할아버지가 호통을 치거나 버럭 화내는 걸 본 적 없다. 천생 양반답게 점잖았으며 느리고 찬찬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이 층에서 떨어진 일이 있다. 마을 친구가 20리 길을 버스를 타고 가 그 사실을 우리 집에 알렸다. 교실 유리창을 닦다 떨어졌다는 친구의 말에 가족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내 몸이 유리창과 같이 바닥으로 추락해 만신창이가 된 줄 알았던게다. 척추에 금이 간 사고였으니 작은 사고는 아니었다. 읍내에서 제일 큰 병원인 적십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당신이 너무 오래 살아 못 볼 걸 본다며 크게 상심하셨더라고 했다. 만 원권 지폐 속 세종대왕을 닮은 할아버지는, 마을회관 앞 양지바른 벽에 기댄 채 잠이 든 듯 숨을 거두셨다. 회관에서 드신 인절미가 목에 걸렸더라고 했다.

결혼 후 맞은 내 첫 생일 때다. 문득, 지난 생일을 돌아보니 집에서 생일 밥을 먹은 기억이 없는 거다. 생일 밥상을 받은 적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기억이 통 나지 않았다. 어머니께는 무척 죄송한 말이다. 할아버지와 겸상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는 내 생일상에 조기 한 마리 올리기도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이런 지난한 기억들에 마음 아파하시지만, 물질의 결핍은 그러려니 하고 겪는 일이었다. 빈곤이 일상인 중에도 온화한 환경 덕에 심적 불균형 없이 건강하게 성장했다. 이런 집안 분위기 중심에 할아버지가 계셨다.

한 마을 앞쪽으로 광산 김 씨 삼 형제가 나란히 터 잡고 살았다. 큰아버지와 아버지, 작은아버지 형제다. 요즘도 세 형제가 나란히 사는 데엔 변함이 없다. 큰집 할아버지와 할머니, 큰아버지, 큰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친정아버지도 몇 해 전 먼 나라로 가시니 삼형제 집은 적요하다. 명절이나 생일이라고 친척집을 돌며 밥을 먹던 때가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다. 작은집, 큰집에 대소사가 있을 때 여전히 오가기는 한다. 그러나 부모들이 차츰 세상을 뜨니 예전처럼 북적댈 일도 없다.

할아버지 출상 날이다. 큰집 안방 병풍 뒤에 모셨던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날이다. 사촌 지간 아이들도 분위기 살피며 손 모으고 둘러섰다. 할아버지가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문지방을 넘는다. 관례로 박 바가지가 깨지고 마당으로 조심조심 내려설 때다. 한 남자의 흐느낌이 꺽꺽 들린다. 울음의 주인은 아버지다. 그 소리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내 아버지의 아버지임을 일깨운다. 나도 따라 목이 멘다.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손녀가 되는 나는, 한 다리 건넌 사이라고 애달픈 마음이 아버지보다는 덜한 모양이다. 집안의 지축이던 어른이 거처하던 안방을 영영 떠나는 날이라 집안 공기가 무겁다. 할아버지와 특별하게 이어진 내 유년의 일부가 뭉텅 분리되어 나가는 상실감을 맛본다. 겸상의 추억마저 아득히 멀어지듯 안타깝다.

할아버지 기일은 유월 유두일이다. 음력 유월 보름이면 여름 기운이 완연할 시기다. 기일이 되면, 함박눈 펄펄 내릴 때 마당에서 전통혼례 올리며 운 큰집 올케가 도시에서 찾아온다. 우리 집 큰며느리인 올케도 읍내에서 올라오고, 막내인 작은집 며느리도 인근 도시에서 마다않고 온다. 당신은 사후 복도 어지간하신 게다. 겸상했던 나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래도 내 생일이면 어김없이 할아버지가 의식 속으로 찾아오신다. 그 인자한 표정과 하얀 수염에 온화한 눈빛을 하고서.

딸이 결혼한 후 처음 맞은 내 생일 때였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딸이 찰밥을 짓고 미역국을 끓여왔다. 마치 허한 내 속을 들여다본 양. 인터넷으로 요리법을 알아본 모양이다. 육아로 힘든 중에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는지. 그날 찰밥과 미역국에 조기 몇 마리의 조촐한 생일상은 그간 섧던 생일의 소회를 날려주었다. 내 생일이면 유독 나에게 애틋해진다. 무의식에 붙어있는, 할아버지와 함께 축하받으며 보낸 생일 추억 때문인가. 앞으로는 부러 챙기고 자축할 생각이다.

유두일 전후해 고향에 간 건 마음이 내킨 때문이었다. 어쩐지 부쩍 가고 싶더라니. 혹, 영의 기운이 있다면 작용한 건 아니었을까. 태어난 해는 달라도 같은 날에 태어나 혈육으로 맺어지고, 이승을 하직할 때 나를 불렀으니 보통 인연은 아닌 게다. 아득히 맺은 전생의 인연처럼 할아버지가 그립다.


 

김나현金娜賢: 경남 거창 출생

2004년 수필과비평 등단

1회 천강문학상 수필 동상, 2002년 수필문학상 수상

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 부산문인협회 회원, 부산수필문인협회 편집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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