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향일암 일출 / 박귀덕

부흐고비 2021. 2. 23. 17:10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날개를 펼치는 어슴새벽,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지 않으 면 도저히 찾아갈 수 없을 어둑한 길을 구불구불 돌아 향일암 아랫동네에 도착했다.

어둠을 밟으며 향일암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이곳을 몇 번 왔다 간 K 수필가의 안내에 따랐다. 먼동이 터오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려면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기에 에둘러 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통증이 무릎을 괴롭힌다. 땀은 등줄기로 흘러내려 허리춤에 쌓이고, 숨이 턱을 차고 올라도 계단 끝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그 많은 계단을 감춰두었기에 겁도 없이 그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제 와서 후회해 본들 돌이킬 수 없는 길,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힘들어도 그 길로 가야 했다.

원효대사가 수도하던 중 관세음보살을 만났다는 곳, 원통보전에서 스님이 새벽 염불을 한다. 초성을 길게 늘이는 듯 조이고, 높이듯 낮추기를 반복하며 가락 넣은 염불 소리, 그 소리가 절 마당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그 곡진함,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의미도 모른 채 반복해서 따라했다. 누군가로부터 위로받은 듯 산란한 마음이 차분해진다. 염불 소리가 남해를 가득 채운다. 저 멀리서 배 한 척이 물살을 가르며 달려온다. 중생들의 욕심, 시기, 질투, 원망, 미움들을 다 싣고 갈 그런 배였으면 좋겠다.

암자 마당에는 일출을 바라보기에 알맞은 곳이 있다. 긴 의자에 앉아 동백나무 가지 사이로 하늘에 널려 있는 젖은 구름을 본다. 4대 봉사한 며느리의 음덕인지, 해가 먹구름 위로 떠오르려고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먼동이 트니 하늘은 이내 한 폭의 수채화가 된다.

해가 떠오른다. 오늘을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만의 해다. 하늘과 구름과 바다와 새들과 나무가 오늘을 새롭게 시작하는 경이로운 아침 해가 구름을 젖히고,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일출을 기대하며 이곳에 올 땐,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며 당당하게 떠오르는 ‘상남자’를 닮은 해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뜨는 해는 구름 속에서 수줍게 올라온다. 초례청에 구경 나온 사람들 앞을 지나가는 새색시 같다. 게다가 엄마들의 소원까지 듬뿍 짊어져서인지 느리게 떠오른다. 더디게 떠오른 해가 제구실을 다하니, 햇살이 자연을 비추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순간순간 변신하는 해를 대상으로 연신 셔터를 눌렀다. 바다가 비단 옷자락을 휘감을 때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해와 접신했다.

절 마당엔 촛불이 켜 있다. 원통보전 곁에 쌓인 기왓장에도 불자들의 소원이 가득하다. 보살은 중생들의 소원을 만원으로 수집하고, 그 소원들은 스님의 새벽 염불이 되니, 그 곡진함에 탄복한 관세음보살은 금방이라도 대자대비로 중생들의 괴로움을 구제하여 평안한 삶을 살아가도록 자비를 베풀어 줄 듯하다.

공양간 가는 길목에 돌거북들이 동전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짊어지고 바다를 향해 가고 있다. 돌거북이 짊어진 저 짐들은 무슨 짐인가. 세상의 소망인가 번뇌인가. 사유하던 찰나 외진 곳에 등짐 없는 거북을 보았다. 반가웠다. 얼른 거북 등에 동전 한 닢 올려놓고 마음에 접어 두었던 소원 하나 꺼내 거북 등에 옮겨 실었다. 관세음보살을 만나거든 올해는 그 소원을 꼭 이루어 달라고 전해 주라면서.

향일암 주변에는 새들이 유난히 많았다.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며 날아다닌다. 곤줄박이, 박새, 직박구리, 참새, 꾀꼬리, 까치 등 그 수를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곤줄박이가 날아와 사진을 찍고 있는 K 수필가의 손등에 앉았다가 날아간다. 아마도 먹이를 주는 것으로 착각했나 보다. 옷을 곱게 입은 작고 예쁜 새 한 마리는 어느 보살의 환생인지 법당 안을 들락거린다. 곤줄박이는 나의 불심을 알아보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곁을 내주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는 살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새 먹이를 주지 마세요.”라는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관광객들이 주는 모이만 먹다 보면 본래의 야생성을 잃고 스스로 먹이를 찾지 않고, 사람들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려는 습성에 길들여지는 것을 경계하려 함인지, 아니면 작은 곤충들의 개체수를 조절하려 함인지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드는 표지판이다. 새들의 먹이인 곤충들이 많고, 천적이 없는 이곳 향일암은 새들의 천국 같다.

산을 내려오는데 물기 젖은 바위, 양쪽 길섶에 희귀 식물들이 널려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며 풀꽃들의 이름을 불러 본다. 평소에는 아무 관심 없이 지나치던 풀과 이끼였는데 이름을 불러주니 친구처럼 정겨워진다. 바위에 붙어 서식하는 콩짜개란, 일엽란, 석란, 비취란, 참나리, 털머위, 바위손도, 바위에 뿌리내리고 꽃봉오리를 추켜세운 비비취도 스님의 염불 소리가 보약이 되었나 보다. 싱그러운 풀들과 나무, 바위, 바닷물까지도 윤기를 지녔다. 올라갈 때는 어둠 속에 묻혀 보지 못했던 들꽃을 본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삽화 몇 컷 / 이옥순  (0) 2021.02.24
어느 분의 선물 / 오승휴  (0) 2021.02.23
겸상의 추억 / 김나현  (0) 2021.02.22
밥솥과 요강 / 김나현  (0) 2021.02.22
파초가 있는 풍경 / 김나현  (0) 2021.02.22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