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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느 분의 선물 / 오승휴

부흐고비 2021. 2. 23. 17:11

붓끝에 사랑과 정이 흐른다. 바람을 탄 붓끝이 산허리를 휘감아 돌며 먹구름에서 비를 부른다. 지상으로 내리는 빗물이 졸졸 끊임없다. 계곡을 흐르는 생명의 물줄기가 강물을 타고 출렁이며 바다에 이른다. 물줄기가 지나는 곳마다 생명체의 들숨날숨 소리가 바람소리와 화음을 이루고 있다. 거센 파도에 물보라 안개가 하늘을 날아 뭉게구름을 만든다. 산자락으로 내려앉는 동안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자연의 순환이요. 생명의 윤회다. 그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책상 앞 벽에 걸어놓은 액자 속 작품 ‘산(山)과 강(江)과 바다(海)’가 꿈틀대고 있다. 선배가 준 선물인데, 위에서 아래로 山은 전서체로 江은 행서체로 海는 초서체로 당신 자신이 쓴 한자 서예창작품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눈길을 끈다. 소박한 한 폭의 그림 같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여인의 치마폭에 감싸인 듯 편안하고 포근하다.

며칠 전 모임에서의 일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진행자가 나의 이름을 부르자 당황하였다. 연유를 잘 알지도 못한 채 얼떨결에 일어섰다. 수많은 선후배 직장동인들 앞에서 선배가 가까이 다가와 ‘산과 강과 바다’의 그 액자를 건네는 거였다. 얼굴을 붉히며 덥석 받았다. 선배가 자신의 작품을 선물로 주다니!

선물은 풋풋한 정과 사랑을 나누는 징표다. 선물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겠지만, 받는 상대편의 입장에 맞는 선물을 고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분수에 지나치면 가치를 잃고 만다. 무엇보다도 깃든 정성에 따라 그 가치와 격이 달라진다. 자신의 손수 창작한 작품이라면 거기에 담긴 정성이 오죽하랴. 산과 강과 바다는 생명체가 먹을 것을 구하고 휴식을 취하는 데에 필요한 삶의 터전이요, 자원의 보고(寶庫)이지 않은가.

“내 마음을 담은 작품이라네. 산과 강과 바다, 자연은 곧 생명이야.”

선배의 목소리에는 사랑의 온기가 묻어있었다.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그분은 잘 알려진 서예가요,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특선과 우수작품상 수상을 비롯해 수많은 수상경력을 가진 소문난 초대작가다. 뵐 때마다 건강한 모습으로 흥미진진한 얘깃거리를 쏟아내 부러움을 사는 분이다. 차곡차곡 내공을 쌓으며 달콤한 인생을 만들어가는 그분의 노력이 놀랍다. 더 놀라운 것은 따뜻하고 예리한 예술적 감수성이다. 직장을 퇴직한 후 사회봉사단체장으로 활동하면서도 서예를 삼십년 가까이 계속하고 있다.

그 작품에 담긴 의미와 내게 선물한 선배의 깊은 뜻을 생각하며 사색에 잠긴다. 왜 창작품을 선물했을까. 후배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분의 애틋한 후배사랑에 가슴이 뻐근해온다. 나는 서예부문에서는 문외한이다. 그런 내게 서예작품을 선물한 선배! ‘자연을 사랑하라. 삶을 통찰하고 어려운 시대를 아우르는, 나눔의 공동체의식을 지향하는 인생길을 걸어라’는 당부가 그 속에 숨어 있음직하다. 부족한 내게 아직도 기대감을 버리지 않는 선배가 무척이나 고맙고, 나 자신이 부끄럽다. 십여 년 전 내가 문단에 들어선 때도 축하화분과 명언집을 보내주셨던 분이 아닌가.

여유롭고 넉넉한 그 선배에게서는 늘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향기로움이 사뭇 오묘하고 고소하다. 퇴직한 선후배 모임에서도 손꼽힐 만큼 존경받는 어르신이다. 내가 젊었을 적엔 퇴직 후 선후배의 동인모임에 함께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 줄 미처 몰랐었다.

입안에 넣은 귤의 맛과 향기가 상큼하다. 고향 친구가 보내온 한라봉은 씹을수록 더 맛이 난다. 한라봉은 노란 색을 띄고 익은 후에도 귤나무에서 한동안 천천히 자신을 더 숙성시킨다. 귤이 노랗다고 다 맛깔스럽지는 않다. 제대로 맛을 내려면, 귤나무에서 꽃을 피워내 열매를 맺고 익어 숙성되기까지 춘하추동 사계절이 필요하다. 한 개의 과일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야 어련할까.

이제 와 생각하니 선배가 내게 준 선물이 적지 않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고마움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리. 여태껏 선배로부터 사랑이라는 선물을 받고 살아왔으니, 나도 보답하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즈음 인생을 백세(百歲)인생이라고들 한다. 남은 소중한 시간을 쪼개어서라도 선후배모임에서의 정 나눔에 성의껏 참여하련다.

고마운 게 어디 선배뿐이겠는가. 인연은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것이더냐. 힘들어 할 때 내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던 사람들, 인생길을 방황하고 있을 때 바른 길을 가라고 가르침을 주었던 분들, 정과 사랑에 목말라하는 나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던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분들을 한동안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인연은 보이지 않는 어느 분이 주시는 큰 선물이라 한다.

창문 앞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의 지저귐이 한낮의 햇살을 간지럽힌다. 오늘은 그리운 이들에게 전화라도 걸어 안부라도 물어야겠다. 어떻게들 지내고 계실까.


 

오승휴 수필가는 서귀포시 성산읍 신풍리에서 출생했으며, 제주시 연동에 살고 있다. 농협중앙회 제주지역본부장을 역임하였고, 

《수필과비평》에서 <어머니의 자리>로 신인상을 받고 수필문단에 등단했다. 수필집으로 2009년《내 마음을 알 거야》와 《담장을 넘을까 봐》를 펴냈으며, 제12회 수필과비평문학상을 수상했다. 귤림문학회 회장,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제주지부장, 수필과비평사 이사, 제주수필문학회 편집위원, 제주문인협회, 조엽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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