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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삽화 몇 컷 / 이옥순

부흐고비 2021. 2. 24. 07:07

가령 몽테뉴의 수상록은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하고서도 아직 읽는 중이다. 삽화나 공백 없이 천삼백 페이지가 넘는 책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살아있는 동안 내내 고민한 인류의 스승 몽테뉴가 체험에 몰두한 인생의 솔직한 고민을 담고 있는 인간 연구서라는데, 이 책만 펴면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한낮에 책을 읽으려니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이다.

벨 소리가 잠을 깨웠다. 주문한 책이 왔다. 세 권의 책을 읽기 쉬운 순서로 놓았다. 삽화가 있는 것을 맨 위, 공백을 둔 것은 그다음. 문자로만 된 두꺼운 책은 맨 아래 놓았다. 문자로만 된 책을 읽으려면 상당한 집중력과 시간이 필요하므로 따로 날을 잡아야 한다. 요즈음에는 삽화나 공백을 둔 책들이 많다. 그런 책을 만들고 선택한다는 건 그만큼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산속 생활 십 년째. 대여섯 평이 텃밭이고 마당은 밭의 스무 배가 넘는다. 자잘한 일이 많다. 일은 아침저녁으로 나누어 한다. 오늘도 눈뜨자마자 마당에 나가 장미꽃 진 자리도 잘라내고, 일 년 내내 흙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싹을 틔우는 개망초도 뽑았다. 옮겨 심은 마가목에 호스를 대놓고 상추밭까지 뛰어 들어와 상추를 앞지르는 채송화를 꽃밭으로 옮겨 심었다. 남은 일은 저녁나절로 미뤄두고 이마로 밀고 들어온 햇살을 피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낮은 그저 도시 속에 살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흔히 주부들이 그렇듯 집안을 정리하고 차 한 잔을 만들고 음악을 틀고 신문을 찾는다. 그즈음 골목으로부터 손수레 끄는 소리가 들려온다. 농사짓는 분들도 아침 일찍 밭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소리다. 동네 노인들도 한낮을 피해 아침저녁 나절에 주로 밭일을 한다. 일의 능률면에서 그렇다.

아침저녁이 중요하다. 하루의 여백 같지만, 사실은 특별한 시간이다. 새들도 아침저녁에 더 즐겁게 노래한다. 나뭇잎도 아침저녁에 빛나고 꽃들도 아침저녁에 생기가 넘친다. 오가는 발길에 밟혀 납작해진 질경이도 아침저녁 시간에 고개를 든다. 산속에서의 아침나절과 저녁나절의 기운은 만물을 조율하는 절대적인 힘이 있는 듯하다.

산그늘 진 마당에 참새 두 마리 내려앉는 시간. 찻잔 바닥에 남아있던 차가 갈색으로 말라가는 시간. 영혼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그 기운은, 상쾌하다 소쇄하다 삽상하다 고맙다 감사하다 그런 말로는 표현이 부족하다.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나른한 리듬이 슬슬 떠다니는 아침저녁 나절에는 모든 것이 자유롭게, 가볍게 존재한다.

나무탁자 위의 애호박 두 개. 오래되어 대오리가 빠진 소쿠리안의 보드라운 아욱 한 줌. 이른 아침 호박 넝쿨을 밭둑 따라 잘 뻗어 가도록 돌보다 찾아낸 이슬 묻은 호박을 놓고 돌아나가는 아랫집 노인의 젖은 바짓가랑이. 뒤따라가는 맑은 햇살. 뒤란에 온통 푸른빛이 일렁이는 삽화가 그려지는 날은 하루를 굳이 서둘러 시작하지 않는다.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결국에는 온 우주를 이룬다는 것을 천천히 음미한다.

삶의 삽화들을 오래 붙잡아 두고 싶은 날은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 짓고 살았다는 작은 통나무집을 떠올리곤 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실천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오두막집에는 의자가 세 개 있었다 한다. 하나는 고독을 위해서,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해서, 또 하나는 사교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 집에는 대체 의자가 몇 개인지도 모르겠다. 질경이가 고개를 드는 장면을 좀 더 오래 바라보고 싶은 날은 의자 세 개만 놓을 수 있는 작은 집이었으면 할 때가 있다. 그런 날은 마당을 뚝 떼어 호박이나 심어 먹게 아랫집 할머니께 주어버릴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저녁나절, 미루어둔 잡초 뽑기는 다시 내일로 넘긴다. 그리고 몽테뉴의 수상록을 펼친다. 삽화가 있는 소설은 낮이 상추밭에서 늑장을 부릴 때 읽을까 한다. 무기력한 낮을 견디려면 삽화 몇 컷이라도 있어야 하니까.

 

[옥천향수신문] 이옥순 수필가의 소소한 일상

 

옥천은 정서적으로 편안한 곳 - 옥천향수신문

수필 쓰는 이옥순(60) 작가는 군북면 비야대정로길에 산다. 10여 년 전 대전에서 이곳으로 이사 왔다. 그동안 수필집 ‘단감과 떫은 감’, ‘홍차가 우려지는 동안’이라는 주변 이야기를 담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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