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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느 여인의 눈물 / 이용수

부흐고비 2021. 2. 24. 07:09

그해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사무실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00동00호 집이다. 홈오토 화면이 안 나온다고 한다. 나는 그 아파트 설비기사였지만 구내통신 업무도 함께 맡아보았다. 간단한 공구와 홈오토 화면 부품을 챙겨 그 집을 방문했다.

집밖에서 벨을 눌렀다. 거실 벽면에 붙은 홈오토를 살펴보니 화면이 시커멓다. 기기를 탈착해 분해하고 화면을 바꾸어 벽에다 부착했다. 가느다란 실선을 연결할 때다. 내 손이 선을 제자리에 잇고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다른 생각이 가득 차올랐다. 넓은 실내는 아름답게 꾸며진 인테리어로 화려했다. 집안의 훈기는 바깥 기온과는 너무나 차이가 났다. 이런 따뜻한 집에 사는 사람이 부러웠다.

추운 겨울에도 기름 값이 아까워 보일러 사용을 하지 않는 내 처지가 떠올랐다. 그 순간 시야는 뿌옇게 흐려졌다. 홈오토 내부에 있는 가느다란 전선을 구분하여 연결하려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내부1.2.3.4번의 번호에 색깔별로 구분하여 이어야 하는데 앞이 안보여 맞추어 끼우기가 어렵다. 몇 번이나 손등으로 눈을 닦은 후 겨우 선을 잇고 피스볼트를 잠갔다.

수리한 홈오토를 점검해보니 화면이 아주 밝고 선명했다. 주인아주머니는 고마워하며 커피를 내게 건냈다. 또다시 눈앞이 침침해 눈을 닦고 커피를 마셨다. 그 순간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반쯤 마신 커피 잔을 탁자에 내려놓자마자 그 집을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그날은 늦추위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사무실의 경리가 수화기를 내게 건네며 입주민이 찾는다고 했다. 손가락을 가슴에 대며 “나를?”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냐고 물으니 한 달여 전에 홈오토 화면을 교체해준 집이란다. 무슨 고장인지 확인하자 주민은 “빨리 집으로 오세요.”하였다. 홈오토 화면이 또 안 나오나 하여 불안하였지만 화난 말씨가 아니어서 마음이 놓였다. 간단한 도구를 가지고 그 집 초인 벨을 눌렀다.

“어디가 고장입니까” 하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들어오라는 손짓만 계속한다. 준비해둔 다과를 소반에 담아 왔다. 앉으라는 아주머니의 권유에도 소반 앞에서 엉거주춤하게 서 있기만 했다. 거듭 재촉하는 말의 중력에 그만 소파에 앉았다. 아주머니의 속마음을 모르니 커피 맛이 더욱 소태 같았다. 마음은 온통 그분의 동정만 살피고 있다. 과일 접시를 보고서도 이 집에 온 이유를 몰라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잠시 후, 아주머니는 나를 천천히 바라보며 말을 뗐다. “지난번 우리 집에 와서 홈오토 수리하실 때 내가 혹시 잘못한 것 이 있습니까? 아저씨가 눈물을 닦으며 일을 하고, 일 끝나고 커피를 마실 때도 눈물을 흘리셔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하고 많이 미안했습니다. 그때 물어보고 사과드리려 했는데, 아저씨가 급하게 나가서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말씀해 주세요. 지금 사과드릴게요.”

그날이 떠올랐다.

“내 소망이라고는 세끼 밥 먹고 따뜻한 방에 잠자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집에 들어서는 순간 이 곳에 사는 분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고,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렸나 봅니다. 저에게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작은 단칸방에서 그와 같이 삽니다. 작은방이지만 아무리 추워도 보일러를 켜지 못합니다. 그때 저 자신의 처지가 떠올라 그랬습니다. 아주머니의 잘못은 하나도 없으니 이해해주세요.”

조용히 자초지종을 듣고 있던 아주머니는 말을 꺼냈다. 그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위로 언니, 오빠 이렇게 삼남매를 남겨두고 아버지는 직장에 다녔다. 아버지는 직장과 자녀 양육을 병행하기가 힘들어 재혼을 하였다. 새어머니는 1년도 채 살지 않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 후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는 또 다른 새어머니를 데리고 들어왔다. 아버지와 두 번째 새어머니가 싸울 때는 비극이 아니라 비참 그 자체였다. 결국 그 여자도 아버지 곁을 떠나고 말았다. 두 새어머니가 왔다간 후, 우리가 살고 있던 양옥집을 팔아야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여자가 둘이 왔다가더니 집 한 채가 날아갔다며 소곤거렸다”고 하였다.

교육대학 1학년 때 아버지는 세 번째 새어머니를 맞아들였다. 아버지가 새어머니에게 비싼 옷을 사줄 때는 아버지가 미워서 많이 울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있을 때, 친어머니에게는 그렇게도 인색하시더니 새어머니들에게는 왜 그렇게 잘해주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 너희들을 위해서이다. 내가 새어머니에게 잘해주면 새어머니도 너희들에게 잘 해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어린 시절 부터 새어머니 밑에서 성장하며 구박을 받았다는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소설 같아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네 분의 아내를 두었던 아버지가 생각난다며 눈물을 손등으로 닦는다. “아저씨, 힘드시겠어요. 그러나 아드님이 더 힘들겠어요. 아들 잘 키우세요.”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 눈물 속에는 못 다한 사연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묘한 감정으로 ‘세상에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도 있고, 저 같은 사람도 있잖아요?’ 맺혔던 그의 감정이 눈물로 쏟아져 나왔다. 마음이 짠했다. 나도 눈시울이 젖었다.

넓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화려한 겉모습만 보고 그의 말을 듣지 못했더라면, 그분은 마냥 행복한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잠깐 머무는 동안 그 여인의 뒷면에 숨겨진 눈물의 골짜기를 들여다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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