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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권민경 시인

부흐고비 2021. 3. 12. 11:35

오늘의 운세 / 권민경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오르는 몽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또, 내일/ 권민경

송아지의 노래 망아지의 노래//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한 번 먹어보라고 숟가락을 들이미는 손. 가느다란 팔목이 뻗어 있었다. 그 팔목을 타고 오르면 낯선 나라에 도착할 수 있을까. 루비 구두도 비단 구두도 없이― 길을 떠날 땐 운동화가 낫다./ 풀밭을 가로지르는 서툰 걸음.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 자주 퉷 침을 뱉고 발로 뭉개고/ 그러면서 시간이 흘러간다. 어느 해가 진다. 어느 길은 잠든다./ 첫 이슬을 맞고 목소리를 잃어버린다. 깊숙이 잠긴 목소리. 깊숙이 잠긴 사랑. 내일은 꺼낼 수 있길 빌면서 노숙을 하고,/ 머어 머어 멀리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그건 길을 떠나다 보면 만날 수 있는 노랫소리.// 멀리 머나먼// 나는 커튼이 반쯤 열린 작은 방에 앉아 어제처럼 앉아 오늘의 바람소리 듣고/ 자주 멀리 가는 꿈을 꾸고 행장을 궁리하고 국경 너머 내 길이 이어질 거라 믿으며 머나먼 전설을 읽고/ 가끔 찾아오는 까치에게 하는 이야기 우리는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갈까/ 오지 않은 시간을 확신하면서도 속눈썹은 자신이 없어 자꾸 신발 밑창이 닳고 고무 밑창을 원하고/ 평발로 가고 쑤시는 무릎으로 물과 불 속에서도 걷고 걷는데/ 먼 멀리 머나먼 먼 멀리 머나먼 나의 방이 자꾸 고동치고 맥박치고 나는 자꾸만 먼 새벽을 지나 멀리 그렇게나 머나먼// 매일 어디로// 아무도 부르지 않았고 아무도 찾지 않았고 머물 이유가 없었다. 플라스틱 소녀들이 늘어선 길가. 예쁘게 틀어 올린 머리채에 숨어 사는 자벌레. 부지런히 몸을 늘렸다 줄였지만 애초에 목적지가 없었다. 머리카락은 흩어지고 제멋대로 갈라지는 길. 모두 주름을 갖게 되었다./ 아침에 눈물 흘린다. 어째서 그런 식일까. 어째서 이런 식일까. 추억이 기분 나쁜 것으로, 괴기한 것으로 바뀌어 가는 동안 통조림을 까놓고 피크닉을 벌였다./ 도중에 어떤 괴물을 만났더라도, 지금은 기쁘다. 밤엔 잘 울지 않는다. 그럴 시간이 아니다.//

탈의실/ 권민경

등의 지퍼를 열면 밤과 낮이 갈리고/ 들리지 않는 리듬으로 하늘은 돌지/ 낡은 몸을 벗어놓고 멀리 가고 싶어/ 새 몸이 닳을 때까지 맴돌고 싶어/ 늘어서 있는 문/ 아무 칸이나 벌컥 여는 오늘/ 이번 생을 머리 위로 뒤집어 벗으면/ 벌거벗은 새빨간 몸이 드러나지/ 가죽 없는 꿈을 끌어안으면/ 상처에 새살이 돋네/ 딱지 앉은 곳마다 솟아나는 팔다리/ 바람을 헤집고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네/ 수백의 다리가 맨땅을 밟아 새 길을 내네/ 길을 달리던 몸이 커다란 새처럼 떠오르지/ 하늘까지 이어지는 지도를 따라/ 내 뒤를 쫓는 별들과 누군가에게 불리는 모든 종류의 이름/ 밤과 밤 사이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서 태어난/ 작은 얼굴들/ 얼굴은 포옹을 벗고 멀리 가고 싶지/ 멀리 외출해서 낯선 목소리로 불리고/ 새로운 표정 짓고파/ 그 여러 개의 몸뚱이가 사랑스러워서/ 오래오래 거울에 비추고 싶지//

종양의 맛 / 권민경

거대한 물혹과 한쪽 난소를 떼어낸 후/ 고기를 먹을 때면 뒤적거렸어/ 동물의 아픈 부분을 씹을까 조심스러워/ 그게 내 몸 같아서// 암센터 건너 늘어선 주택/ 큰 개 순하게 매여 있네/ 짖을 타이밍을 잊은 개는/ 긴 혀를 빼물고 헐떡인다/ 너의 몸 어디선가 고요하게/ 자라고 있을 거야// 나는 혹부리 여자/ 계절마다 새로운 혹이 돋고/ 모르는 새 유행에 민감해졌네/ 환자복 입고 딸기향 립글로스를 발랐지/ 향기는 소독되고/ 주택가를 떠도는 애드벌룬/ 종양은 부푼다// 사람들이 태아를 걱정할 무렵/ 나는 세상의 작은 혹들이 애틋했네/ 그런 처녀였지/ 종양을 잉태한 줄 모르고/ 손자는 먼 훗날의 이야기// 주렁주렁 열린 감자 겨울을 나고 좋은 씨감자 될 거야/ 품질이 좋고 맛 좋아// 퇴원을 축하하며/ 엄마는 오랫동안 고기를 삶았지/ 들통을 열어보면 작은 종양을 달고/ 열심히 꼴을 먹던 소가 떠올라/ 나는 오랫동안 접시를 뒤적이고//

나의 형식 / 권민경

나는 나로써/ 어제/ 어제의 사람// 어릴 적 골목에서 만난 개/ 질이 튀어나온 채 복판에 앉아 있었어요 무서워서 지나가지 못했죠/ 개는 아팠던 것뿐인데 난 뭐가 무서웠던 걸까요 지는 만날 튀어나오는 주제에// 네모 다음에 세모/ 다음은 평행 우주// 애써 꾸민 형식보다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좋아요/ 읽을 수 있는 말이란 결국 내 수준의 것/ 유치 무모 비겁한 것들/ 예수 정도는 서른 번 모른다 할 수 있어요// 폼을 재고 있는 사람의 폼/ 약통이 열리고/ 크기가 다른 알약이 쏟아져 나오면// 너머를 보여 주세요/ 이를테면/ 내장이라든가/ 말 못하는 동물이 보내던 눈빛/ 아픔을 호소하거나 두려워하는 감정/ 감정 너머에 생/ 살아 있다는 감각// 우리의 내용은 같을지 모르지만/ 목 뒤에 새겨진 글자가 다르고// 이번 형식을 뭐라고 부를까요/ 질탈/ 절단/ 무식함과 유치함/ 동물인 내가/ 누군가에게 보내는 눈빛/ 사랑도 도움도 요청하지 않고/ 작렬하는 한복판에 앉아 있겠어요/ 무서워 말고 지나가세요// 방금 전의 나는/ 시간을 후회할 줄 알며// 한 낮의 일이니까요//

안락사 / 권민경

커튼 뒤에서 잃어버린 어제를 찾았죠. 베개는 얼마나 잃은 꿈을 견뎌냈나요. 머리맡엔 단단한 구름과 말캉한 악몽이 쌓이고, 기억들을 팡팡 털어도 베개는 풍성해지지 않아요. 부풀어 오르지 않아요. 걸어온 길들은 푹 꺼져서 다신 되돌아오지 않아요.// 침대는 흰 배를 내놓고 앉아 있어요. 커튼을 치면 종기처럼 별이 돋아나고 터진 잠 속에서 깃털들이 솟구쳐요. 재채기가 나와요. 콧등은 주름지고 우리의 날들도 구겨져요. 지폐를 구기면 낯선 얼굴이 우릴 바라보는 것처럼 구겨진 삶이 우릴 바라보고 웃고 울어요. 그 새침하고 가여운 얼굴 속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눈물도 흘려요.// 바뀐 요일을 입으면 기운이 새로 솟아요. 오늘 지고 일어나면 또 얼마나 열매가 많은 날이 펼쳐질까요. 얼마나 많은 잘린 머릴 목격할까요. 별들이 태어나고 숲이 타오를까요. 이 한잠만 자고 일어나면........// 부러진 나무들이 일어나요. 번개가 기지개 켜요. 온 들판에 불이 일고, 우리의 수많은 잠들이, 꿈들이 하나하나 낯익은 얼굴이 되어 찾아와요. 못다 한 인사를 커튼 뒤에 감추고// 나는 잠들기 전에 내가 가진 모든 하루를 생각해요.//


 

 

 

 

권민경 시인은

1982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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