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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조정권 시인

부흐고비 2021. 3. 1. 10:44

산정묘지1 /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려진 생목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근성(根性) / 조정권

배추를 뽑아 보면서 안스럽게 버티다가/ 뽑혀져 나온 뿌리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여지껏 뿌리들이 흙 속에서 악착스럽게 힘을 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뿌리는 결국 제 몸통을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배추를 뽑아 보면서 이렇게 많은 배추들이 제각기/ 제 뿌리를 데리고 나옴을 볼 때/ 뿌리들이 모두 떠난 흙의 然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배추는 뽑히더라도 뿌리는 악착스리우리만큼 흙의 血을 몰고 나온다./ 부러지거나 끊어진 배추 뿌리에 묻어 있는 피/ 이놈들은 어둠 속에서도 흙의 肉을 물어뜯고 있었나 보다/ 이놈들은 흙 속에서 버티다가 버티다가/ 독하게 下半身을 잘라 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뽑혀지는 것은 절대로 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뽑혀지더라도 흙 속에는 아직도 뽑혀지지 않은/ 그 무엇이 악착스럽게 붙어 있다./ 흙의 肉을 이빨로 물어뜯은 채.//

고요로의 초대 / 조정권

잔디는 그냥 밟고 마당으로 들어오세요 열쇠는 현관문 손잡이 위쪽/ 담쟁이넝쿨로 덮인 돌벽 틈새를 더듬어 보시구요 키를 꽂기 전 조그맣게 노크하셔야 합니다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고치고 마중 나올 수 있게/ 대접할 만한 건 없지만 벽난로 옆을 보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작이 보일 거예요 그 옆에는/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 찬장에는 옛 그리스 문양이 새겨진 그릇들/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되었답니다/ 방마다 문을, 커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많은 집에 초대를 해 봤지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下人)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시고요/ 그 헐벗은 두 손도//

白紙 3 / 조정권

방황하는 이 옆에서는 아무 질문도 하지 말 것./ 침묵으로써,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출 것./ 그 옆에서는 다만 공손함으로써 그 영혼에 합당한 예절을 갖출 것./ 요란스러운 화장기를 벗길수록 인간의 영혼이란/ 고통苦痛,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 것, 살아온 날들과 또 살아야 할/ 수많은 날들의 두려움에 대하여 지상至上의 위안이란 마치 간섭과도 같은 것./ 그것은 또한 내가 내 스스로에 행하는 강요와도 같은 것/ 때때로 침묵함으로써, 이 시간에 나는 마음과 영혼과 빈손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느끼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뼈를 찔리는 일이 아닌가./ 뼛속 깊이 찔리는 그 실감나는 시간의 축적蓄績인 영혼/ 흔히 바쁘게 지나치다가도 유정有情한 눈길을 주다 보면/ 백지白紙는 비어 있음으로써 충일充溢한 불을 켜고 있다.//

수유리(水踰里) 시편(詩篇) / 조정권

여느 새벽보다도 일찍이 화계사 숲속의 약수(藥水)터로 오르다가 보았다.// 자색(紫色)안개에 휘감긴 아름드리 태고목(太古木)들의 숙연한 전신침묵(全身沈黙)을, 한결같이 그 주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큰 바위들의 단좌(端坐)를.// 그때던가 어제까지도 죽었다고 생각해오던 고목(古木)들의 출렁거리는 뿌리둥치께에서 놋쇠와 놋쇠가 부딪듯이 쩡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이 겨울내내 산중(山中)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있는 어느 강철의 근육을 향그러운 쇠망치로 때려 깨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수유리(水踰里)에 사는 옹(翁)을 / 조정권

수유리(水踰里)에 사는 옹(翁)을 처음 뵈러 가는 날, 시장 근처 공터를 지나다가 백운대(白雲台)쯤에서 굴러 내린 듯한 집채만한 바윗덩이를 굵은 동앗줄로 꽁꽁 묶는 이를 만났다. 「바위는 이미 묶지 않아도 묶여 있는데 또 묶을 게 뭐요?」 「묶여 있다는 것을 당신들이 안 보니까 이렇게 묶는 거죠.」// 기억나는 일이 있다. 두 번째 시집(詩集)을 어느 아는 분에게 드렸더니 며칠 후 책의 몰골을 열십자로 나눠 질긴 노끈으로 꽁꽁 묶어 보내왔다. 겉장과 속내용들을 한 장 한 장 풀을 발라 봉해 버린 채. 알겠다, 옹(翁)을 만나면서 책도 묶고 바위도 묶고 혀도 묶고 의미도 봉해 버리는 그 입.//

송곳눈 / 조정권

내가 아는 환쟁이 영감은/ 그림 한 장 그려 달라고 하자 보는 앞에서/ 제 눈을 송곳으로 찌른 모양이야/ 보기 싫은 작자 영 보지 않겠다고/ 제 눈알을 파 버린 셈이지/ 재미있는 것은 그 영감이 파 버린 눈으로/ 세상을 보며 그림은 그려 왔다는 점이야/ 두 눈을 뜨고 두루 세상을 보는 것보다/ 한쪽 눈만을 송곳처럼 뜨고 보는 편이 훨씬 참을 만했다는 거지/ 송곳 같은 눈으로 그림을 그렸으니 무엇을 그렸겠나/ 그려 놓고 나선 찢고/ 그려 놓고 나선 찢고/ 그림이란 그가 물 위에 써놓고 간 흔적일 뿐이지/ 물 위에 이름 뿌리고 간 영감/ 어느 바위틈에다 송곳눈을 박아 놓았을지도 모르지//

헐벗음 / 조정권

몸이란 각 부위의 시끄러움이요 삐걱거림이니./ 두개골, 환기통 없는 흡연실/ 목줄, 한숨 지나다니는 통로/ 등, 석탄층 매장돼 있는 곳/ 흉곽, 제방 공사가 소용없는 늪/ 대장, 모래 서식지/ 척추, 구부러지기 직전/ 팔다리, 곧 지팡이에 의존해야 되는 부위/ 입, 늙을수록 더 시끄럽거나 지루한 혓바닥 살아나는 곳./ 영안실 문을 나서/ 이대로 가도 어쩔 수 없다 끄덕이다가/ 행길 건너 시장통/ 순대국 집에서 가부좌한 돼지머리와 마주쳤다./ 겉봉 벌렁 열어놓은 코와 귀/ 옆 볼을 꾹 눌러 보니 웃는 게 아닌가./ 코를 꾸욱 눌러 보니 가을 하늘처럼/ 파안대소하는 게 아닌가./ 박장대소하는 게 아닌가.//

숯덩이 / 조정권

혁명(革命)이나 정변(政變)으로 단련된/ 근육(筋肉)투성이가 숯이다/ 스스로의 권력(權力)과 오만으로/ 구워낸 것이 숯이다/ 사람이 서로를 믿지 못한다고 한다 살기가 어려워진 탓이겠지/ 남대문시장(南大門市場)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밟는다/ 저놈의 숯덩이/ 수많은 생계(生計)를 밟고 올라선 저놈/ 사람들은 숯을 사 간다/ 남보다 더 강렬해지기 위해서/ 남 앞에 서서 따지고 할 말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숯을 사 간다/ 할말을 하지 못하고 사는 저 병신/ 안주머니에 시커멓게 손발을 감추고 있는 것도 숯이다/ 어둑어둑한 골목으로 들어가/ 손에 먹칠을 해가며 비틀어 죽인 것도 숯이다//

심골(心骨) / 조정권

한 덩이의 마음을 묵(墨)에다 개고 또 개면서 오랫동안 가슴으로 품어 온 비쩍 마른 갈필 하나로/ 풀어헤쳐 놓은/ 옛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일만개(一萬個)의 꽃송이를 전신에 단 꽃나무들이 한결같이 밤을 이루면서 몰려들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어디선가/ 일만개(一萬個)의 꽃송이를 전신에 단 꽃나무들이 사방에 고요한 암향(暗香)을 끼얹으며 방울을 터뜨리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저마다 고요한 방울소리로 찰랑대다가 어떤 놈은 적음(寂音)속으로 스며들고 어떤 놈은 갈필 선(線)의 끝간 곳으로 미끄럼질을 타고 내려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마르고 수척한 나뭇가지들이 점점 야위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림을 볼 때마다, 수척해가고 야위어가는 그놈들이/ 말라가면서 더 강골(强骨)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詩)를 쓰는 내게는 이러한 일이 보통이 아니다.//

코스모스 / 조정권

십삼촉보다 어두운 가슴을 안고 사는 이 꽃을/ 고사모사(高士慕師) 꽃이라 부르기를 청하옵니다./ 뜻이 높은 선비는 제 스승을 홀로 사모한다는 뜻이오나/ 함부로 절하고 엎드리는/ 다른 무리와 달리, 이 꽃은/ 제 뜻을 높이되/ 익으면 익을수록/ 머리를 수그리는 꽃이옵니다./ 눈 감고 사는 이 꽃은/ 여기저기 모여 피기를 꺼려/ 저 혼자 한 구석을 찾아/ 구석을 비로소 구석다운 분위기로 이루게 하는/ 고사모사(高士慕師) 꽃이옵니다.//

노점상 / 조정권

열 클립의 햇빛을/ M16 탄창에 장전하고/ 유채꽃밭에 난사합니다.// 5월의 이런 날씨 중랑천변에 앉아 팝니다.//

벼랑 끝 / 조정권

그대 보고 싶은 마음 죽이려고/ 산골로 찾아갔더니, 때 아닌/ 단풍 같은 눈만 한없이 내려/ 마음속 캄캄한 자물쇠로/ 점점 더 한밤중을 느꼈습니다./ 벼랑 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가다가 꽃을 만나면/ 마음은/ 꽃망울 속으로 가라앉아/ 재와 함께 섞이고,/ 벼랑 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어둠의 뿌리 / 조정권

열한 시 이후부터 밤은 마당에 혼자 남는다./ 지샐 곳이 없는 나뭇잎들이 구석에 모여/ 구석에 깃든 어둠을 한층 더 짙게 한다./ 이런 밤엔 누구와 자도 잠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돌맹이가 가득찬 밤하늘이 내리누르는/ 납덩이같은 어둠 때문만이 아니다./ 유난히도 마당 구석에 진하게 모여 있는 나뭇잎의 어둠 때문만이 아니다./ 이런 밤엔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제 뿌리를 그리워한다./ 기댈 곳이 없는 모든 것들이/ 차가운 흙 위에 등을 깔고 누워/ 흙 속의 어느 따스한 품을 간절히 생각하고 있다.//

1인 시위 / 조정권

무더운 날이었다. 얼굴에 셔터를 내린 전경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방석 깔아놓고 생수병을 든 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천남성(天南星) 같은 깃발 하나 보도블록 틈에 세워 놓고 누가 보든 말든 의사당을 향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어도 지나가는 차들은 모두 멈춘 채 듣고 있었다./ 고상함과 근엄을 갖춘/ 신분 높은 집을 식당으로 개조해 막국수를 마는 저 노래./ 도마 위의 활어를 웃음바다로 놓아주는 저 노래./ 차들이 모두 멈춘 채 서 있었다. 저 노래를 밟고 지나갈 순 없다며.//

머나 먼 / 조정권

발은 객지(客地)/ 죽어라 하고 뛰어내린 곳이/ 삶//

목숨 / 조정권

마음의 어디를 동여맨 체 살아가는 이를/ 사랑한 것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두 팔을 아래로 내린 채 눈을 감고/ 오늘 죽은 이는 내일 더 죽어 있고/ 모레엔 더욱 죽어 있을 거라고 너는 말했다/ 사랑할수록 있는 사람들 틈에서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 이 세상 여자면 누구나 바라는 아주 평범한 일/ 아무것도 원하지는 않으나 다만/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눈부신 일이 차례가 올 리 없다고 너는 말했다//

돌 / 조정권

그는 여기 있으나/ 그의 얼굴은 먼 바람 소리 속으로/ 여행을 떠나갔다/ 그리고 더 먼 곳에 가서/ 그의 마음을 만났다//

독락당 / 조정권

독락당 대월루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 버린 이.//

꽃잎 / 조정권

퇴근 시간 때 전철에 올라탄/ 등산복차림 사내가/ 산철쭉꽃가지 한 묶음 들고 내 옆자리에/ 그냥 말없이 앉아 있다/ 동덕여대역에서 내릴 때까지/ 나는 꽃을 무릎에 앉힌 두 손만 바라보았다.//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은/ 모두 무거운 것들이었구나.//

 

향그런 봄의 쇠망치소리를 들으며 / 조정권

여느 새벽보다도 일찍이/ 화계사 숲속의 약수터로 오르다가 보았다./ 자색 안개에 휘감긴 아름드리/ 태고목들의 숙연한 전신침묵을,/ 한결같이 그 주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큰 바위들의 단좌를./ 그때던가 어제까지도 죽었다고 생각해 오던/ 고목들의 출렁거리는 뿌리 둥치께에서/ 놋쇠와 놋쇠가 부딪듯이 쩡,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이 겨울 내내 산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어느 강철의 근육을 향그러운 쇠망치로/ 때려 깨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갑사 / 조정권

낙방(落房)에 홀로 남아/ 먼 하늘에서 참나무 장작패는 소리를/ 약으로 듣는 늦은 겨울날 오후//

 

포도 식구들 / 조정권

포도 한 송이에/ 식구들이 한데 모여 살고 있다/ 가난한 시절 좁은 방에서 열 식구가 산 적이 있었다/ 가족이란 저렇게 모여 사는 것이다/ 포도알 같이 저렇게 다닥다닥 살을 붙이고/ 웃고 또 울고 또 웃는 것처럼//

 

기억해 내기 / 조정권

혼자/ / .// 진 채/ 내게 배송된 꽃./ 발송인을 알 수 없던 꽃.// 그 꽃을 기억해 냈다./ 슈베르트 음악제가 한 달간 열린/ 알프스 산간 마을/ 한가로이 풀꽃에 코 대고 있는 소 떼들이/ 목에 달고 다니는 방울/ 그 아름다운 화음에서.//

 

그 어른 / 조정권

찔레 향 머문 자리에/ 누군가의 마음이 먼저 문안을 드렸구나./ 느껴지는 건 산 보다 산 속의/ 어른.// 이놈아 물통처럼 서 있지 말고/ 옛다, 이거나 받아라./ 밭에서 난 장대비 한 아름 꺾어 내게 던진다./ 젖은 고구마 잎사귀들 후두둑 쏟아진다.//

 

겨울 주례사 / 조정권

언 호숫가 겨울나무가 서 있다./ 흰 눈의 면사포를 쓰고 있다./ 눈이 온다./ 일생 겨울숲속에서 밑 둥은 얼어있을 것이다./ 바람 속에서/ 견디고 있는 마음과/ 벌서고 있는 마음/ 진정 두 마음은 한마음임을 약속하겠는가.//

 


 

조정권(趙鼎權) 시인은

194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 19690년 《현대시학》 창간호(3월호)에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虛心頌)』,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창과 석좌대우교수 역임. 2017년 11월 8일,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

 

수성(水性)의 시인 조정권

나는 지금 일산 정발산공원의 작은 연못을 바라보고 있다. 연못은 조용히 고여 있는 세상이다. 그 고요함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시라고 해도 될까 싶다. 몇 발자국만 걸어가면 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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