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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홍영철 시인

부흐고비 2021. 3. 11. 14:05

저무는 빛 / 홍영철


누가 당기고 있나
해가 기울고 있다
누가 떠밀고 있나
해가 떨어지고 있다
당기지 마라
떠밀지 마라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우리가 언제
기울지 않았던 적이 있더냐

 

시계소리 / 홍영철

밤이 깊어갈수록/ 벽에 걸린 시계 소리는 크게 들린다./ 그것은/ 뚜벅뚜벅 어둠 속을 걸어오는/ 발소리 같기도 하고/ 뚝뚝 지층을 향해 떨어지는/ 물소리 같기도 하다./ 그것은/ 어둠을 한줌씩 물리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둠을 한줌씩 더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눈을 뜨면/ 아무것도 걸어오지 않고 /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는다./ 시계의 바늘은 그저 일정한 간격으로/ 벽 위에서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아마 저것은 시계 속의 건전지가 닳아버릴 때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끝없이 돌아가리라./ 의미도 없이/ 반성도 없이.//

너에게로 가는 층계 / 홍영철

1

그해 겨울에는 참 많은 눈이 내렸다. 빼곡이 들어박힌 낡은 집들 사이로 뻗어난 골목길 가장자리에는 높다랗게 눈이 쌓여 간신히 앞으로 걸어나갈 수가 있었다. 미끄러지지 말아야지, 그렇게 잔득 긴장하며 조심조심 어둡고 고요한 그 골목길을 헤쳐갔다. 문득 등뒤의 기다란 전신주 목덜미에 매달린 고장난 방범등이 켜지기라도 하면 누가 몰래 그림자를 밟아오는 것 같아 움찔 놀라야 했다.//

2

너에게로 가는 층계는 가파르고 좁았다. 많은 사람들이 잠에 빠져 있을 늦은 시각, 너를 찾아 끝없는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발소리를 죽이며 또 죽이며 살그머니 걸음을 옮겨놓아야 했다. 왜 그랬을까. 알 수가 없었으나 밤이면 너를 찾아 좁고 가파른 층계를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네가 없는 풍경을 더 많이 바라봐야 했다. 그 쓸쓸한 가슴을 듣고서 하얀 입김을 날리며 돌아서야 했다. 왜 그랬을까, 엄청나게 많은 겨울 밤을. 돌아서 걸어나오는 옆구리에 간혹 심심한 개가 짖기도 했다.//

3

날이 풀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날의 밤에는 골목길이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발목까지 빠져드는 길고 습한 골목길을 걸어나갔다. 점점 무거워져오는 발을 천천히 내디디면서 넘어지지 말아야지, 그렇게 마음 졸이며 걸어나갔다. 아직도 등뒤에는 고장난 방범등이 때때로 껌벅거리고 있었다. 훈훈한 바람이 쌓인 눈과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모두 녹이는 날에도 너는 자주 없었다. 너에게로 가는 길은 참으로 고단하고 아픈 것이었다.//

외딴섬 / 홍영철

네 잘못이 아니다/ 홀로 떠 있다고 울지 마라/ 곁에는 끝없는 파도가 찰랑이고/ 위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단다/ 떼 지어 몰려다니는 것들을 보아라/ 홀로 떠 있지도 못하는 것들/ 저토록 하염없이 헤매고 있지 않느냐/ 바람 부는 대로 파도치는 대로/ 그 자리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것들은/ 저토록 소리치며 낡아가고 있지 않느냐/ 네 잘못이 아니다/ 홀로 떠 있다고 울지 마라/ 너는 이미 은하의 한 조각이 아니더냐//

그 많던 내일은 다 어디 갔을까 / 홍영철

그때도 그랬다/ 그때도 내일을 기다렸다/ 내일이 오면 오늘보다 조금은 다른/ 무엇이 다가오지 않을까/ 그렇게 그때도 기다렸다/ 그러나 내일은 언제나 만나지지 않았다/ 내일은 언제나 오늘이 되었고/ 오늘은 언제나/ 인내처럼 쓰고 상처처럼 아렸다/ 내일은 언제나 내일 그 자리에 있었고/ 언제나 오늘은 스스로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내일은 끝없이 내일이고/ 오늘은 텅빈 꿈처럼 끔찍히도 허전하다/ 다 어디 갔을까/ 그많던 내일은?//

거기에 가면 / 홍영철

그 집이 거기에 있을까/ 다정했던 녹슨 대문과 낡은 지붕/ 마당 가운데 오래된 연못 하나/ 때가 되면 꽃밭 가득 흐드러지던/ 채송화, 맨드라미, 코스모스, 거기에/ 그 빛깔 그 향기 아직 거기에 있을까/ 날벌레, 개미, 잠자리, 생쥐들 거기에/ 그 움직임 아직 거기에 있을까/ 그때 그 넓은 하늘 거기에 있을까/ 가지 않은 길 그대로 있을까/ 듣고 싶은 말, 하고 싶은 말/ 거기 가면 들을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 그 집이 아직 거기에 있을까//

너 누구니? / 홍영철

가슴속을 누가 쓸쓸하게 걸어가고 있다./ 창문 밖 거리엔 산성의 비가 내리고/ 비에 젖은 바람이 어디론가 불어가고 있다./ 형광등 불빛은 하얗게/ 하얗게 너무 창백하게 저 혼자 빛나고/ 오늘도 우리는 오늘만큼 낡아버렸구나./ 가슴속을 누가 자꾸 걸어가고 있다./ 보이지 않을 듯 보이지 않을 듯 보이며 소리없이./ 가슴속 벌판을 또는/ 멀리 뻗은 길을/ 쓸쓸하게/ 하염없이/ 걸어가는/ 너 누구니?/ 너 누구니?/ 누구니, 너?/ 우리 뭐니?/ 뭐니, 우리?/ 도대체.//

마음의 집 / 홍영철

집으로 가는 길은 많습니다./ 사당동 쪽으로 가도 영등포 쪽으로 가도/ 서초동 쪽으로 가도 집이 나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많기도 합니다./ 길이 많아서인지 가끔 길을 잊어버립니다./ 마음이 때때로 현기증을 일으킵니다./ 마음도 길이 많나 봅니다./ 어디로 가야 제 집이 나올지/ 잘 모르는가 봅니다./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책상 위의 수선화가 아픕니다./ 아니, 내가 나에게 미안합니다.//

모두가 추억이다 / 홍영철

버리지 마라, 모두가 추억이다/ 세월이 가면 모래도 진흙도 보석이 된다/ 너의 꿈은 얼마나 찬란했더냐/ 너의 사랑은 또 얼마나 따뜻했더냐/ 부는 바람도 내리는 비도 그치고야 말 듯이/ 아픔도 슬픔도 언젠가는 지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면 아프잖아요 / 홍영철

아버지, 때리지 마세요/ 그러면 아프잖아요/ 미워하지 마세요/ 그러면 아프잖아요/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그러면 아프잖아요/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마세요/ 그러면 아프잖아요/ 왜 그러느냐고 나무라지 마세요/ 그러면 아프잖아요/ 아버지, 그런 눈으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외롭잖아요, 괴롭잖아요, 슬프잖아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오늘을 지내고 또 오늘을 지내면/ 그게 평화 아닌가요/ 그러니 아버지, /야단치지 마세요, 겁주지 마세요/ 그러면 상처받잖아요/ 작아지잖아요/ 자꾸 작아지면 없어질지도 모르잖아요//


 

홍영철(1955~) 시인은

대구에서 태어났다.

계명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7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문학사상』 신인 발굴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게 연줄이 되어 서울로 올라와 이어령이 주간으로 있던,

내자동 한옥을 사무실로 쓰던 <문학사상> 편집부에서 일했다.

시집으로 『작아지는 너에게』 『너는 왜 열리지 않느냐』 『가슴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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