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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오규원 시인

부흐고비 2021. 3. 8. 14:15

만물은 흔들리면서 / 오규원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잎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들판의 고독 들판의 고통
그리고 들판의 말똥도
다른 곳에서
각각 자기와 만나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비로서 깨닫는 그것
우리는 늘 흔들리고 있음을.

 


부처 / 오규원

남산의 한 중턱에 돌부처가 서 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 있고/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붙어 있다/ 코는 누가 떼어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다/ 곁에는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깃을 다듬으며 쉬다가 돌아앉아/ 부처의 한쪽 눈에 똥을 눠놓고 간다/ 새는 사라지고 부처는/ 웃는 눈에 붙은 똥을 말리고 있다//

새와 나무 / 오규원

어제 내린 눈이 어제에 있지 않고/ 오늘 위에 쌓여 있습니다/ 눈은 그래도 여전히 희고 부드럽고/ 개나리 울타리 근처에서 찍히는/ 새의 발자국에는 깊이가 생기고 있습니다/ 어제의 새들은 그러나 발자국만/ 오늘 위에 있고 몸은/ 어제 위의 눈에서 거닐고 있습니다/ 작은 돌들은 아직도 여기에/ 있었다거나 있다거나 하지 않고/ 나무들은 모두 눈을 뚫고 서서/ 잎 하나 없는 가지를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 사이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아이와 망초 / 오규원

길을 가다 아이가 허리를 굽혀/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돌이 사라진 자리는 젖고/ 돌 없이 어두워졌다/ 아이는 한 손으로 돌을 허공으로/ 던졌다 받았다를 몇 번/ 반복했다 그 때마다 날개를/ 몸 속에 넣은 돌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허공은 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스스로 지웠다/ 아이의 손에 멈춘 돌은/ 잠시 혼자 빛났다/ 아이가 몇 걸음 가다/ 돌을 길가에 버렸다/ 돌은 길가의 망초 옆에/ 발을 몸속에 넣고/ 멈추어 섰다//

나무와 허공 / 오규원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개봉동과 장미 / 오규원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프란츠 카프카 / 오규원

-MENU-/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슐라드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고요 / 오규원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겨울 숲을 바라보며 / 오규원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유리창과 빗방울 / 오규원

빗방울 하나가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순간 유리창에 잔뜩 붙어 있던 적막이 한꺼번에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빗방울이 이번에는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여섯 이렇게 왁자하게 달라붙었습니다/ 한동안 빗방울은 그리고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유리창에는 빗방울 위에까지 다시 적막이 잔뜩 달라붙었습니다/ 유리창은 그러나 여전히 하얗게 반짝였습니다/ 빗방울 하나가 다시 적막을 한 군데 뜯어내고/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나무속의 자동차 ㅡ 봄에서 겨울까지2 / 오규원

뿌리에서 나뭇잎까지/ 밤낮없이 물을/ 공급하는/ 나무/ 나무속의/ 작고 작은/식수 공급차들// 뿌리 끝에서 지하수를 퍼 올려/ 물탱크 가득 채우고/ 뿌리로 줄기로/ 마지막 잎까지/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는/ 나무속의/ 그 작고 작은/ 식수 공급차들// 그 작은 차 한 대의/ 물탱크 속에는/ 몇 방울의 물/ 몇 방울의 물이/ 실려 있을까/ 실려서 출렁거리며/ 가고 있을까// 그 작은 식수 공급차를/ 기다리며/ 가지와 잎들이 들고 있는/ 물통은 또 얼마만 할까//

한잎의 여자(女子) 1 / 오규원

나는 한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女子),/ 그 한 잎의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 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여자(女子)만을 가진 여자(女子),/ 여자(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女子), 여자(女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女子), 눈물 같은 여자(女子), 슬픔 같은 여자(女子), 병신(病/ 身) 같은 여자(女子), 시집(詩集) 같은 여자(女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 는 여자(女子), 그래서 불행한 여자(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女子).//

발자국과 깊이 / 오규원

어제는 펑펑 흰 눈이 내려 눈부셨고/ 오늘은 여전히 하얗게 쌓여 있어 눈부시다/ 뜰에서는 박새 한 마리가/ 자기가 찍은 발자국의 깊이를 보고 있다/ 깊이를 보고 있는 박새가/ 깊이보다 먼저 눈부시다/ 기다렸다는 듯이 저만치 앞서 가던/ 박새 한 마리 눈 위에 붙어 있는/ 자기의 그림자를 뜯어내어 몸에 붙이고/ 불쑥 날아오른다 그리고/ 허공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지워버린다/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허공이 눈부시다//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 오규원

서울은 어디를 가도 간판이/ 많다. 4월의 개나리나 전경(全景)보다/ 더 많다. 더러는 건물이 마빡이나 심장/ 한가운데 못으로 꽝꽝 박아 놓고/ 더러는 문이란 문 모두가 간판이다./ 밥 한 그릇 먹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소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또는 간판의 두 다리 사이로/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서는 사전에 배치해 놓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 마빡에 달린 간판을/ 보기 위해서는 두 눈을 들어/ 우러러보아야 한다. 간판이 있는 곳에는/ 무슨 일이 있다 좌와 우 앞과 뒤/ 무수한 간판이 그대를 기다리며 버젓이/ 가로로 누워서 세로로 서서 지켜보고 있다./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자세히/ 보라 간판이 많은 집은 수상하다.//

버스정거장에서 / 오규원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들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이 시대의 순수시 / 오규원

자유에 관해서라면 나는 칸트主義者입니다. 아시겠지만, 서로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나의 자유를 확장하는, 남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남몰래(이 점이 중요합니다) 나의 자유를 확장하는 방법은 나는 사랑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게 하는 사랑, 그 사랑의 이름으로.//

내가 이렇게 자유를 사랑하므로, 世上의 모든 자유도 나의 품속에서 나를 사랑 합니다. 사랑으로 얻은 나의 자유. 나는 사랑을 많이 했으므로 참 많은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주 주택복권을 사는 自由, 주택복권에 미래를 거는 自由, 금주의 운세를 믿는 自由, 운세가 나쁘면 안 믿는 自由, 사기를 치고는 술 먹는 自由, 술 먹고 웃어 버리는 自由, 오입하고 빨리 잊어버리는 自由.//

나의 사랑스런 自由는 종류도 많습니다. 걸어다니는 自由, 앉아다니는 自由(택시 타고 말입니다), 월급 도둑질 하는 自由, 월급 도둑질 상사들 모르게 하는 自由, 들키면 뒤에서 욕질하는 自由, 술로 적당히 하는 自由, 지각 안하고 출세 좀 해볼까 하고 봉급 봉투 털어 기세 좋게 택시 타고 출근하는 自由, 찰칵찰칵 택시 요금이 오를 때마다 택시 탄 것을 후회하는 自由, 그리고 점심 시간에는 남은 몇 개의 동전으로 늠름하게 라면을 먹을 수밖에 없는 自由.//

이 世上은 나의 自由투성이입니다. 사랑이란 말을 팔아서 공순이의 옷을 벗기는 自由, 시대라는 말을 팔아서 여대생의 옷을 벗기는 自由, 꿈을 팔아서 편안을 사는 自由, 편한 것이 좋아 편한 것을 좋아하는 自由, 쓴 것보다 달콤한 게 역시 달콤한 自由, 쓴 것도 커피 정도면 알맞게 맛있는 맛의 自由.//

世上에는 사랑스런 自由가 참 많습니다. 당신도 혹 자유를 사랑하신다면 좀 드 릴 수는 있습니다만.//

밖에는 비가 옵니다./ 시대의 純粹詩가 음흉하게 不純해지듯/ 우리의 장난, 우리의 언어가 음흉하게 不純해지듯/ 저 음흉함이 드러나는 의미의 迷妄, 무의미한 純潔의 몸뚱이, 비의 몸뚱이/ ……/ 조심하시기를/ 무식하지도 못한 저 수많은 純潔의 몸뚱이들.//

빈자리가 필요하다 / 오규원

빈자리도 빈자리가 드나들/ 빈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 오규원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空想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우리는 지금 꽃이나 시내나 초가집과 함께 살기보다는
아파트, 버스 정류장, 분식집, 광고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산업화된 도시의 삶을 지탱하는 도구화된 언어, 수단화된 언어들 속에서 말입니다.
역설, 반어나 우화적 접근 등 모든 시적 방법을 동원,
그 타락한 언어들을 뚫고 대상과 삶의 본질을 향한 것이 내 시입니다.



오규원(본명 오규옥吳圭沃, 1941~2007) 시인은

경남 삼랑진에서 출생하여 부산사범과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8년 《현대문학》에「雨季의 시」,「몇 개의 현상」등이 추천되어 등단한 그는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사랑의 감목』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등과 유고시집으로 『두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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