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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임경묵 시인

부흐고비 2021. 3. 15. 10:51

비 맞고 다니지 말아라 / 임경묵


돌이켜 보니,
배후에 우산 수리 전문가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우울한 세계에서
비 한 방울 맞지 않을 수 있었다

저녁상을 물린 우산 수리 전문가가 툇마루에 앉아
구름의 방향과 색깔을 살피고
바람의 냄새를 맡는다
새로 수리할 우산을 펼쳐 빙글빙글 돌린다
작년보다 잔고장이 더 많아진 그가 우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일기예보에 내일 비가 올 확률은
팔구십 퍼센트.

배춧잎 줍는 여자/ 임경묵

새벽 청과물 도매시장 한편에 서서/ 경매 끝나기를 기다리는/ 한 여자가 있었네// 경매가 끝나자마자/ 손수레로 옮겨지는 푸른 배추 더미 뒤를/ 졸졸 따라가/ 상인들이 떼어 내버린 배추 거죽을 한 잎 두 잎 줍는/ 한 여자가 있었네// 푸르죽죽한 배추 거죽/ 거무죽죽한 배추 거죽/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배추 거죽/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짓이겨진 배추 거죽/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짓이겨져 푸른 물이 배어나오는 배추 거죽에서/ 가장 깨끗한 것만 골라/ 한 보따리 짊어지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는/ 한 여자가 있었네// 보따리 안에서 늙은 빨래 같은 배추 거죽들을 꺼내/ 찬물에 헹궈/ 비틀고 꼬옥 짜서/ 처마 밑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어놓고/ 우려낸 멸치 국물이 없어 솥에 반쯤 맹물을 붓고/ 어슷하게 썬 파 쪼가리와/ 다진 마늘 약간/ 묵은 된장 한 숟갈 휘휘 풀어/ 연탄불에 은근하게 한솥 배춧국을 끓여 놓는/ 한 여자가 있었네// 푸르죽죽한 배추 거죽 같은거무죽죽한 배추 거죽 같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배추 거죽 같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짓이겨져 푸른 물이 배어나오는 배추 거죽 같은 한 여자가,//

질경이의 꿈 / 임경묵

질경이도 꽃을 피우냐고요/ 바람이 구름을 딛고 하루에도 수천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백산 정상에서/ 꽃 안 피우고 살아남는 게 어디 있나요/ 노루오줌도 찰랑찰랑 지린 꽃을 피우고/ 심지어 개불알꽃까지 질세라 덜렁덜렁/ 망태를 흔드는데요 사실 말이지/ 그렇게 아웅대며 서둘 필요는 없거든요/ 밟힐 때마다 새파랗게 살아남아/ 가끔 뿌리까지 헹궈주는 바람을 끼고/ 소백산 허리에 닥지닥지 달라붙은/ 저를 보신 적이 있잖아요/ 실직한 당신의 낡은 등산화 밑에서도/ 이렇게 구겨진 날을 밀어 올리잖아요/ 혹시/ 뒤돌아보지 않고 지나온 길이 후회되세요/ 흔적도 없이 지워드릴 수도 있거든요/ 가파른 오르막길이 팍팍하고 힘들면/ 부담없이 제 발목쟁이를 또옥 따서/ 풀싸움이나 하면서 잠시 쉬었다 가세요/ 길 잃어 막막한 당신이 뿌리 채 뽑아서/ 하늘 높이 제기차기를 해도 그만이구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가진 그늘은/ 씨방처럼 부푼 땀방울들을 말리기엔/ 너무 키가 작으니까요/ 그러니까 제 발목쟁이를 드린다는 거예요/ 대신에 당신의 캄캄한 어깨를 껴안고/ 하산하던 씨앗 한 톨이/ 고개 묻고 돌아가는 당신의 뒤안길 혹은/ 보도블록 틈에 질긴 뿌리를 부리고 서서/ 언젠가 당신의 지친 발목쟁이에/ 입 맞출 수 있다면/ 저는 밟혀도 정말이지 괜찮거든요/ 이젠 당신도 다시 한 번/ 울먹이는 희망을 돌볼 시간이잖아요//

우산 수리 전문가 / 임경묵

등굣길에 비가 온다는/ 우산 수리 전문가의 예언이 적중했다/ 그가 우산을 건네자/ 끝말잇기를 하듯 빗방울이 떨어진다/ 엊그제 비를 맞으며 나와 함께 등굣길을 나섰던 우산 한 개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는 날마다 고장 난 우산을 수거하고/ 그는 날마다 고장 난 우산을 수리한다/ 그가 수리한 우산의 팔구십 퍼센트가 나를 위해 쓰였다// 한번은 다 저녁에 예고도 없이 소나기가 퍼부었는데/당황한 우산 수리 전문가가/ 빗속을 뚫고/ 학교까지 나를 찾아와 불쑥 우산을 건넸다//

제노비스 신드롬 / 임경묵

비닐봉지가 툭 터지자/ 붉은 방울토마토가 한꺼번에 쏟아져/ 지하 계단으로 굴러갑니다// 엄마,/ 나도 추락하고 싶은데/ 우린 왜 맨날 반지하에서 살아요// 너도 낯가림이 심하구나// 누군가 발로 뻥 찬/ 최저생계비처럼 찌그러진 콜라 캔 하나가/ 사납게 짖으며/ 지하 계단으로 달려옵니다//
*제노비스 신드롬 : 방관자 효과

봄입니다 / 임경묵

부추 밭이 서늘합니다/ 개나리 꺾어/ 부추 밭 가장자리에/ 심었습니다./ 개나리 꺾인 자리도/ 서늘합니다/ 밭귀에 돌아앉아/ 검불을 태우는데/ 눈이 매워/ 봄이 자꾸 접힙니다//

국수의 가족사 / 임경묵

옛 포목점 터에 장날이면 차일을 치고 국수를 판다고, 잔뜩 똬리를 틀고 모락모락 김을 내는 것이 여간 의뭉스럽지 않다고, 전화기 너머로 연실 입맛을 다시는 아버지. 저 수원으로 출장 가는 중이에요… 이번 주말엔 내려갈게요//

석 달 만에 사막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문지방을 넘기 전 양말부터 벗었다. 발의 지문이 우수수 쏟아졌다. 모래 지옥에 떨어지려고 몰두했으나, 나침반이 없어 갈림길에서 돌아왔다고 했다. 엄마는 얼룩진 양말을 헹궈 울타리에 널었고, 우린 모처럼 양푼 외곽에 둘러앉아 칼국수를 먹었다. 중심이 다 드러나도록 젓가락 다투는 소리 쟁쟁했다.//

오후 내내 창문에 부종처럼 달라붙어 흐느끼는 봄비를 달래주러 비척한 직립의 국수 한 줌 꺼내 삶는다. 도무지 슬픔을 모를 것 같은 뽀얀 결의 그를 채반에 건져 찬물에 헹구고 또 헹군다. 댕강 잘린 국수 한 가닥이 개수대에 떨어져 물방울이 튈 때마다 파닥거린다. 꼬리가 다 닳도록,//

니들 할아버지 환갑 땐 채마밭까지 차일을 치구, 멸치국물에 올 풀린 잔치국수를 다들 배불리 먹지 않었냐. 오래 아프다 돌아가신 할머닐 선산에 모시고 돌아온 저녁엔, 온 가족이 깨진 밥상에 둘러앉아 눈물 섞인 밀국수를 먹었고……//

중국 서쪽 끝 신장위구르 불모의 사막, 화염산 아래에서 남루한 가죽 외투를 입은 40대 사내의 미라가 발굴되었다. 그 곁, 빛바랜 토기 속에 퉁퉁 불은 채 화석이 된 국수 몇 가닥. 눈 찔리고, 꼬리가 다 닳은, 함께 발굴된 13구의 미라는 그가 거느린 식솔들이었을까?//

우두커니 / 임경묵

누이가 문밖에 우두커니 서 있다/ 뭐가 아쉬운지/ 어둠이 누이 몸을 칭칭 감고 있다/ 하늘나라에서도/ 누이는/ 새처럼 가벼워지지 못한 걸까/ 날개가 없다// 낡은 소파 위에/ 태아처럼 웅크린 채 죽은 누이의 마지막을 생각하다가/ 울컥,/ 슬픔이 나를 통과했네// 문밖에 서서/ 문안의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는 누이야// 악착같이 달려들던 우울, 자꾸 미끄러지기만 했던 외길, 깊은 수렁 같았던 외로움 따위는 이젠 잊어야 해// 누이가 눈사람처럼 녹고 있다/ 머리부터 천천히……// 내일은/ 어린 조카 손을 잡고/ 외딴 숲 누이의 무덤에 꽃을 주러 가야겠네/ 누이는/ 누구보다 젊고 예뻐서.//

체 게바라 치킨집 / 임경묵

신장개업 치킨집 화장실 문짝에/ 체 게바라 사진 한 장/ 오줌보를 움켜잡고 화장실 앞에서 발 동동이던 사내가/ 더는 못 참겠다며/ 시식용 닭 날개를 체 게바라에게 던진다/ 빨리 안 나와!// 이때 모가지 잘린 닭들은 파삭 튀겨지고 전기 오븐은 빙글빙글 돌아간다// 이봐요 체 게바라, 뼈 없는 닭 날개는 없어?// 쿠바 쿠바 쿠바쿠바// 위대한 혁명은 오줌을 참는 데서 시작된다/ 오줌은 참는 것이야말로/ 혁명가의 가장 아름다운 자질/ 참을 만치 참았는데도 오줌이 마렵다면/ 체 게바라를 생각하자/ 그래도 참기 힘들다면/ 베레모를 살짝 눌러 쓴 체 게바라를 노크하자/ 선 채로 다리를 꼬고/ 한쪽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쿠바 쿠바 쿠바쿠바// 광대역으로 진입한 진눈깨비가/ 치킨집 창문을 두드리자/ 동면 중이던 물뱀들이 밀린 주문처럼 쏟아져 나온다/ 빨간 스쿠터에 배달통을 싣고/ 삼엄한 경계의 택지개발지구를 가로질러/ 해안가 신도시로 잠입 중인/ 체 게바라// 쿠바를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지만/ 배달은 24시간 지속할 것/ 한밤중 해안까지 달려가/ 긴 목을 축이고 돌아오는 아스팔트에 안개가 자욱하다// 이봐요, 체 게바라/ 당신은 더 우울할 필요가 있어요// 쿠바 쿠바 쿠바쿠바//

 



 

임경묵 시인은

경기 안양에서 태어나 충남 천안에서 성장했다.

공주대학교 한문교육학과와 한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8년 하반기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시집 <체 게바라 치킨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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