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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장미와 낙지 / 이옥순

부흐고비 2021. 3. 16. 14:18

그녀는 행복하다. 이만하면 됐다. 점잖은 그녀의 남편은 묻는 말 열 중 여덟아홉은 그녀가 원하는 쪽 대답을 한다. 어쩌다 살짝 마음에 걸리는 한두 가지도 그녀의 위트 넘치는 말솜씨로 얼마든지 돌려놓을 수 있다. 결혼 초반 부부싸움의 원인 제공자였던 아들도 얼마 전 결혼해 서울로 살림을 났다. 명랑 쾌활한 막내딸도 직장에서 일어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카카오톡으로 보내온다. 가족들의 그 재미난 일상을 앉아서 보고 듣는다. 시대에 맞게 실시간으로 산다.

아들과 딸은 터울이 좀 지게 낳았다. 부러 그런 건 아니다. 시댁의 어려운 조건들을 감당하느라 힘들어서 그랬다고 보는 게 맞다. 아들이 유치원 들어갈 나이가 되어서야 딸을 낳았다. 그 무렵 참 무기력했다. 아들이 유치원 갈 때 소파에 드러누우면 그 자세로 돌아온 아들을 맞았다. 아들이, 엄마는 소파와 일체형이냐고 물었다. 일체형 로봇이 한창 유행할 때였다. 그게 산후우울증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게 하는 아들의 강력한 한방이었다.

그 아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말을 잘 듣는 게 더 이상한 나이일 때였다. 그날도 밥 먹는 자리에서 어떤 일로 아들을 혼냈다. 문제는 그녀의 숟가락질이었다. 아들을 향해 숟가락을 흔들면서 나무라는 말을 해대는데 남편 앉은 쪽이 싸했다. 그리고 “지금 뭐하는 짓이야.”는 숟가락질보다 강한 한마디가 날아왔다. ‘짓’이라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가 한 짓에 대한 반성은 스스로 할 것이었다. 숟가락을 식탁에 ‘탁’ 놓고 일어섰다. 그리고 안방을 향해 두 걸음쯤 발을 떼었을 때였다. 뒤통수가 번쩍했다. 남편의 손이 그녀의 뒤통수로 날아든 것이었다.

물에 손 넣을 일 없이 일주일이 흘렀다. 그녀의 남편이 퇴근길에 장미 한 다발을 사 왔다. 장미는 곧바로 쓰레기통에 거꾸로 처박혔다. 언제 친정으로 갈까 날을 보는 중이었다. 쓰레기통에 거꾸로 처박힌 장미가 몇 다발이었는지 잊어버린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남편의 손에 장미가 들려있었다. 장미를 쓰레기통에 던질 새도 없이 외식을 나갔다. 앞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냉랭한 기운이 앞집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더 길어지면 안 될 것 같다고 하면서 앞집 부부가 저녁 먹는 내내 분위기 쇄신을 위해 애를 썼다. 쓰레기통에 던질 타이밍을 놓친 장미는 다음날까지 그대로 식탁에 있었다.

장미도 앞집도 그녀의 생각을 돌려놓지는 못했다. 그녀는 남편 퇴근할 시간이 되어서야 장미를 거들떠보았다. 쓰레기통으로 가다가 방문 가운데 붙은 걸고리가 눈에 띄었다. 시들해진 장미 다발을 아주 소극적으로 거꾸로 걸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날도 밖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 남편이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거실에서 어슬렁거렸다. 남편의 와이셔츠에 고추장이 묻어있었다. 집 올라오는 길목에 낙지볶음 집이 있다. 낙지를 나라고 생각하고 아주 잘근잘근 씹었느냐고 그녀가 먼저 한마디 날렸다. 본인도 모르게 그 말이 툭 튀어나갔다. 장미가 나라고 생각하고 거꾸로 매달아버렸냐고 그녀의 남편이 받았다. 메기고 받고 장단이 잘 맞았다.

단서 포착을 잘하는 여자의 눈에 와이셔츠의 고추장이 보였던 건 그렇다 치고, 단서 포착을 못 하는 남자의 눈에 거꾸로 걸린 장미가 보였던 건 운명이었지 싶다. 그 큰 한 건은 참으로 긴 시간 서로에게 효과를 미쳤다. 이후 서로를 잘근잘근 씹거나 거꾸로 매달아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미와 낙지는 거리가 좀 있어 보이나 여전히 한집에서 살고 있다.

낙지는 씹는 맛이 일품이다. 쓰러진 소도 일으킬 만큼 영양이 풍부하다. 그녀의 남편은 그때는 낙지 맛도 모르고 먹었다. 차차 그 맛을 알아갔다. 그녀의 위트 넘치는 유머가 터지지 않는 날이 길어지면 낙지가 먹고 싶어진다. 낙지를 먹으면서 쫀득쫀득 씹던 때를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녀와 마주 앉아 설겅설겅 씹어 삼키는 지금이 낫다고 생각한다.

장미라면 보통 꽃병에 꽂아두고 즐긴다. 하지만 그녀는 일찌감치 말린꽃의 매력을 알았다. 꽃병에서보다 더 오래 즐길 수 있다. 일상이 지루하다 싶으면 그녀는 장미를 말린다. 그녀의 남편은 자기를 거꾸로 매달아버리고 싶은 게 아니라 집안 분위기를 바꾸고 싶을 뿐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녀의 집안 여러 곳에 장미꽃이 걸려 있다.

올봄에도 그녀는 자나 장미를 말린다.


이옥순 님은 경남 사천 출생이다. 2005년 '호서문학' 신인상, 2007년 '수필과비평' 신인상을 수상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호서문학회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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