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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기택 시인

부흐고비 2021. 3. 18. 15:41

소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소 2 / 김기택

몸무게가 되기 위하여 물이 살 속으로 들어온다/ 살과 뼈와 핏줄 사이 가볍고 푹신한 빈큼들을/ 힘센 무게들이 빽빽하게 채워 버린다/ 차에 매달아 한 시간이나 끌고 다니며 만든/ 갈증 속으로 물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다/ 음매에 슬픈 울음 속 떨림의 사이사이/ 깊고 가는 빈틈으로 물이 채워진다/ 이윽고 울음에서 떨림이 없어지고/ 헉헉거리며 울음에서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고/ 목구멍을 틀어막은 완강한 힘이 울음을 채운다/ 울음은 이제 형식적으로 입만 크게 벌리고 있다/ 부룩 부루룩 물 사이로 빠져나온 공기로 숨을 쉬며/ 뱃가죽에서 규칙적으로 불어났다 꺼졌다 하고 있다/ 크고 단단한 무거움 속에 조용히 정지하여 있으니/ 보인다 가죽 속에/ 우연히 들어와 무게가 된 한 줄기 바람/ 이제 고기가 되어 버린 한 방울 물 한 모금 공기/ 무거움의 밖에서는 또 다른 한 떼의 공기들이/ 파리들처럼 날렵하게 날아다니며 혀를 간지르고 있다/ 마시려 하면 앵앵거리며 순식간에 흩어지고/ 힘들여 마신 한 호흡의 공기마저/ 목구멍에서 찰랑거리던 물이 기어코 밀어낸다/ 눈알 가득 앉은 간지러운 파리 떼를/ 이젠 눈을 끔벅거려 날려보낼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눈물로 씻어내도 날려보낼 수 없다/

오늘의 할 일/ 김기택

가만히 앉아 숨쉬기 모든 구멍에서 나오는 구리고 비린 나를 들이마시기/ 제 못난 곳을 악착같이 감추어오다 감춘 사실마저 낱낱이 들키기/ 생긴 대로만 앉아 있어도 저절로 웃기는 놈, 비열한 놈, 한심한 놈이 되기/ 머리통에 피가 몰리는 기억을 꺼내 터진 뇌혈관 다시 터뜨리기/ 단단한 벽으로 된 입과 귀에다 깨지기 쉬운 간절한 말을 쑤셔 넣기/ 욕이 되려는 분노를 억지로 우그러뜨려 누르고 밝게 웃으며 대답하기/ 터져 나오는 비명을 녹여 나에게만 들리는 진한 한숨으로 바꾸기/ 숨구멍 막는 끈끈한 가래 같은 숨을 조심조심 뚫어가며 숨쉬기/ 긁으면 더 가려워지는 가려움, 긁느니 잘라내고 싶은 가려움을 긁어 키우기/ 고삐를 잡아 쥐고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겨도 안 오는 잠을 강제로 자기// 그냥 있기만 하기//

계란 프라이 / 김기택

자궁처럼 둥글고/ 정액처럼 걸쭉하고 투명한 액체인/ 병아리는/ 이윽고 납작해진다 후라이팬 위에서/ 점점 하얗게 굳어지면서/ 꿈틀거린다 뜨거운 식용유를 튀기며/ 꿈틀거린다 불투명한 방울을 들썩거리며/ 꿈틀거린다 고소한 비린내를 풍기며/ 꿈틀거린다 굳어버린 눈 굳어버린 날개로/ 꿈틀거린다 보이지 않는 등뼈와 핏줄을 오그라뜨리며// 한 번도 떠보지 못한 눈과/ 한 번도 뛰어보지 못한 심장과/ 아무 것도 먹어본 적이 없는 노란 부리와/ 아무 것도 싸본 적이 없는 똥구멍이/ 평등하게 뒤섞여 굳어버린/ 계란 프라이/ 흰 접시 위에 담겨진다//

사진속의 한 아프리카 아이 1 / 김기택

앞에서 바람이 불면/ 살갗은 갈비뼈 사이 앙상한 틈을 더 깊이 후벼판다/ 뒤에서 바람이 불면/ 푹 꺼진 배는 갑자기 둥글게 부풀어오른다/ 가는 뼈의 깃대를 붙잡고 나부끼는/ 검은 살갗// 아이는 모래 위에 뒹구는 그릇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는 막대기팔과 다리로 위태롭게 떠받친 머리통처럼/ 크고 둥근/ 굶주릴수록 악착같이 질겨지는 위장처럼/ 텅 빈/ 그릇 하나//

새 / 김기택

새는 새장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매번 머리를 부딪히고 날개를 상하고 나야 보이는/ 창살 사이의 간격보다 큰, 몸뚱어리./ 하늘과 산이 보이고 울음 실은 공기가 자유로이 드나드는/ 그러나 살랑거리며 날개를 굳게 다리에 배달아놓는/ 그 적당한 간격은 슬프다./ 그 창살의 간격보다 넓은 몸은 슬프다./ 넓게, 힘차게 뻗을 날개가 있고/ 날개를 힘껏 떠받쳐줄 공기가 있지만/ 새는 다만 네 발 달린 짐승처럼 걷는다./ 부지런히 걸어 다리가 굵어지고 튼튼해져서 닭처럼 날개가 귀찮아질 때까지 걷는다./ 새장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날지 않고/ 닭처럼 모이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걸으면서, 가끔, 창살 사이를 채우고 있는 바람을/ 부리로 쪼아본다, 아직도 벽이 아니고/ 공기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유리보다도 더 환하고 선명하게 전망이 보이고/ 울음 소리 숨내음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고안된 공기,/ 그 최첨단 신소재의 부드러운 질감을 음미하려는 듯.//

유리창의 송충이 / 김기택

유리창에 송충이 한 마리 붙어 있다/ 아파트 10층 창문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송충이가 기어 온 긴 높이를 생각해 본다/ 오를수록 더 높아지는 높이/ 아무리 힘차게 꾸물거리며 기어도/ 벽 창문 벽 창문 벽 창문 벽 창문 벽 창문......./ 온몸이 허리로 된 송충이는 그래도/ 부지런히 뒤 허리로 앞 허리를 밀어 올린다/ 허리 밑 다닥다닥 점 같은 다리들이/ 유리창에 아슬하게 붙어 있다/ 흰 갈대잎 같은 털들이 바람에 휘날린다/ 몸도 털이 휘어지는 방향으로 기우뚱거린다/ 습관의 힘이 아니었다면/ 송충이는 벌써 10층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떨어져도 부러질 것은 없지만/ 그래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이다/ 그러다 갑자기 허리걸음을 멈추고/ 송충이는 허리로 된 머리를 높이 들어/ 여기 저기 허공을 한참 더듬는다/ 이 나무는 가도가도 거대한 평면 사각뿐이다/ 이파리 하나도 없이 어떻게 광합성 하나/ 아무래도 길이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허리를 늘였다가/ 깊은 주름이 생기도록 줄이면서/ 송충이는 11층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멸치 /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돋보기 안경 / 김기택

벗어서 책 위에 올려놓은 후에도/ 안경은 여전히 무엇엔가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뭇거뭇한 것이 렌즈 안에서 꾸물꾸물 형체를 갖추더니/ 곧 선명한 글자들이 된다.// 책 위로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앉는다./ 렌즈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 머뭇거리고 있다./ 렌즈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파리는 검은 덩어리에서 나와/ 잔털이 촘촘하게 돋은 몸통과 다리가 된다./ 헬멧처럼 커다란 눈으로 덮인 얼굴이 된다./ 기하학적인 무늬로 짠 날개가 된다.// 너무 오래 껴온 탓에/ 안경에 붙박인 눈알이 빠지지 않는다./ 눈이 자는 동안에도 안경은 눈을 감지 않는다./ 잠시도 깜박거리거나 한눈파는 일이 없다./ 어둠 속에서도 계속 눈을 뜨고 있다./ 잔글씨들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힘찬 부동자세로 서 있다.// 잠자는 동안에도 내 얼굴은 여전히 안경을 쓰고 있다./ 꿈이 안경테 안으로 모인다./ 꿈 틀이 열심히 꿈틀거리더니 곧 또렷해진다./ 안경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꿈들은 안절부절못한다.// 결코 감을 수 없는 크고 두꺼운 눈에/ 파리는 여전히 붙잡혀 있다./ 안경이 눈을 부릅뜨고 있어서 도망가지 못한다./ 파리가 렌즈에 박힌다. 양각된다./ 알몸이 다 드러난 채 종이에 붙박여 움직이지 못한다.//

쥐 / 김기택

구멍의 어둠 속에 정적의 숨죽임 뒤에/ 불안은 두근거리고 있다/ 사람이나 고양이의 잠을 깨울/ 가볍고 요란한 소리들은 깡통 속에/ 양동이 속에 대야 속에 항상 숨어 있다/ 어둠은 편안하고 안전하지만 굶주림이 있는 곳/ 몽둥이와 덫이 있는 대낮을 지나/ 번득이는 눈과 의심 많은 귀를 지나/ 주린 위장을 끌어당기는 냄새를 향하여/ 걸음은 공기를 밟듯 나아간다/ 꾸역꾸역 굶주림 속으로 들어오는 비누 조각/ 비닐봉지 향기로운 쥐약이 붙어 있는 밥알들/ 거품을 물고 떨며 죽을 때까지 그칠 줄 모르는/ 아아 황홀하고 불안한 식욕//

겨울을 기다림 / 김기택

두꺼운 털같은 추위/ 둥글게 말아 웅크리면 따뜻해지는 추위/ 너무 껴입어서 무거워 지는 추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공격하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추위/ 이빨도 발톱도 없는 꼬리를 흔드는 추위/ 배고프면 더 신나게 흔드는 추위/ 숨쉴 때마다 텅 빈 위장에 밥 대신 들어앉아/ 배고픈 배 흔들며 뛰어노는 추위/ 뱃가죽과 등뼈가 서로 얼어붙으면/ 저절로 허리가 공손하게 굽어지는 추위/ 정신통일하여 밥생각을 하면/ 가만히 졸다가 따뜻해지는 추위//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 / 김기택

창문이 모두 아파트로 되어 있는 전철을 타고/ 오늘도 상계동을 지나간다./ 이것은 32평, 저것은 24평, 저것은 48평,/ 일하지 않는 시간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또 창문에 있는 아파트 크기를 재본다.// 전철을 타고 가는 사이/ 내 어릴 적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엇을 하며 놀았을까?/ 나를 어른으로 만든 건 시간이 아니라 망각이다./ 아직 이 세상에 한 번도 오지 않은 미래처럼/ 나는 내 어린 시절을 상상해야 한다./ 지금의 내 얼굴과 행동과 습관을 보고/ 내 어린 모습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러나 저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어릴 적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하듯이/ 기억은 끝내 내 어린 시절을 보여주지 못한다./ 지독한 망각은 내게 이렇게 귀띔해준다,/ 너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 얼굴이었을 거라고.// 전철이 지하로 들어가자/ 아파트로 된 창문들이 일제히 깜깜해지더니/ 또 다른 아파트 창문 같은 얼굴들이 대신 나타난다./ 내 얼굴도 어김없이 그 사이에 끼어 있다./ 어릴 적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바늘구멍 속의 폭풍 / 김기택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그의 육체는 낡고 닳아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가 난다. 찰진 분비물과 오물이 통로를 막아 바늘구멍처럼 좁아진 숨구멍으로 그는 결사적으로 숨을 쉰다. 너무 열심히 숨을 쉬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숨이 차면 자주 입이 벌어진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질질 흘러 나오지만 너무 심각하게 숨을 쉬느라 그것을 닦을 겨를이 없다.//
밤이 되면 숨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낮은 소리는 때로 갑자기 강해져서 거목을 뽑고 지붕을 날려버릴 것처럼 용틀임을 한다. 휘몰아치는 바람의 힘에 흔들려 그의 몸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이윽고 가래와 침을 뚫고 기침이 뿜어져 나온다. 기침이 나올 때마다 그는 목을 붙잡고 컹컹 짖으며 방바닥에서 뒹군다. 몸 속에서 한바탕 기운을 쓴 바람은 차츰 조용해져서 다시 허파에 얌전히 들어앉아 가르릉거린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 속에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게 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뜨겁고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 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고요한 마음, 꿈 없고 생각 없는 잠이 되려고 그는 더 웅크린다.//

다리 저는 사람​ / 김기택

꼿꼿하게 걷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춤추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그는 앉았다 일어서듯 다리를 구부렸고/ 그때마다 윗 몸은 반쯤 쓰러졌다 일어났다./ 그 요란하고 기이한 걸음을/ 지하철 역사가 적막해지도록 조용하게 걸었다./ 어깨에 매달린 가방도/ 함께 소리 죽여 힘차게 흔들렸다./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 온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 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기둥이 되어 우람하게 서 있는데/ 그 빽빽한 기둥 사이를/ 그만 홀로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

오래된 땅 / 김기택

살갗 밑으로 푸른 뿌리들 지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팔뚝에서 손등으로, 목에서 이마로/ 가지 치며 뻗어가고 있습니다./ 거죽 밖으로 나오려고 굵은 뿌리를/ 살가죽이 간신히 누르며 덮은 곳도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눈알도 붉은 잔뿌리들이 움켜쥐고 있습니다./ 살도 오래된 땅이라는 듯/ 비바람에 패이고 그 주름고랑으로 땀 흘러내리고/ 그 위로 들풀 같은 털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습니다./ 따뜻하고 물컹물컹한 살은 안에 감추고/ 거죽은 황야처럼 한껏 질겨지고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발바닥을 부르럽게 받았다가 밀어내는 흙길처럼/ 손바닥 닿는 자리에 두툼한 주름살이 만져집니다./ 쭈글쭈글하다는 건/ 살가죽과 속살 사이에 팽팽하던 공기가 빠지고/ 그 자리에 허공이 가득 들었다는 것이겠지요.//

교정보는 여자 / 김기택

그녀의 눈으로 끊임없이 글자들이 지나간다. 글자들은 책상 위에 휴지통에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그녀는 종일 빠지고 넘어져 잘못된 글자들을 골라내어 제자리에 앉혀준다. 글자들은 모래알처럼 많고 모래알처럼 딱딱하다. 그녀의 눈 속에 촘촘하게 박힌다. 뜨겁고 눈부신 태양의 조명 아래 모래알 가득한 눈을 끔벅거리며 그녀는 낙타처럼 글자의 사막을 지나간다. 가끔 눈이 너무 아프면 잠시 감아보기도 한다. 글자들은 눈알에 깊이 음각되어, 감은 눈에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면 그녀는 곧 음각된 글자들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고 다시 눈을 열어 글자 속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교정지 위로 어둠이 내린다. 그녀는 넓고 두툼한 어둠으로 글자들을 덮는다. 오래 상처가 난 눈을 감는다. 눈물이 가만히 상처를 만져본다. 상처가 조금씩 소스라치며 씻긴다. 이윽고 글자들은 어둠의 두툼함 속에 묻히고 그녀의 눈은 편안해 진다. 그녀는 손바닥에 닿는 어둠을 더듬더듬 만져본다. 오래 오래 그 감촉들을 음미해 본다. 손가락 끝은 단맛을 모르지요. 향긋한 냄새와 혀끝의 짜릿함도 모르지요. 하지만 남은 표면의 우툴두툴한 편안함은 더 잘 안답니다. 허름한 잔등의 온기와 기침 속에서 떨리는 등뼈의 정다운 울림은 더 잘 안답니다.//
말속에 말들이 있다. 손가락 끝에서 만져졌던 말은 가슴에 와서 작은 누룩 속에 들어 있는 빵처럼 크고 둥글어진다. 눈에서 녹아 가슴에 내린 글자의 상처들을 동그랗게 싸고 부풀어 오르는 말의 향기들. 숨쉴 때마다 그녀의 부푼 가슴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난다.//

무단횡단 / 김기택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했다. 박을 뻔했다./ 뒷좌석에서 자던 아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 앞차 바로 앞에서 한 할머니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횡단보도가 아닌 도로 복판이었다./ 멈춰선 차도 행인도 놀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하고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걷다보니 갑자기 도로와 차들이 생긴 걸음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죽음이 여러 번 과속으로 비껴간 걸음이었다.// 그보다 더한 죽음도 숱하게 비껴간 걸음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본 걸음이었다./ 이제는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느린 걸음이었다.// 걸음이 미처 인도에 닿기도 전에 앞차가 튀어나갔다./ 동시에 뒤에 늘어선 차들이 사납게 빵빵거렸다//

나무 / 김기택

대패로 깎아낸 자리마다 무늬가 보인다/ 희고 밝은 목질 사이를 지나가는/ 어둡고 딱딱한 나이테들/ 이 단단한 흔적들은 필시/ 겨울이 지나갔던 자리이리라/ 꽃과 잎으로 자유로이 드나들며 숨쉬던/ 모든 틈과 통로가/ 일제히 딱딱하게 오므리고/ 한겨울 추위를 막아내던 자리이리라/ 두꺼운 껍질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거칠게 갈라졌던 자리이리라/ 뿌리가 빨아들인 맑은 자양들은/ 물관 속에서 호흡과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 밖의 거대한 힘에 귀기울였으리라/ 추위의 난폭한 힘은 기어코 껍질을 뚫고 들어가/ 수액 깊이 맵게 스며들었으리라/ 수액을 찾아 들어왔던 햇빛과 공기들은/ 그 자리에서 겨우내 얼었다가/ 독한 향기와 푸르고 진한 빛으로 익어갔으리라/ 해마다 얼마나 많은 잎과 꽃들이/ 이 무늬를 거쳐 봄에 이르렀을까/ 문틈인지도 직각의 모서리인지도 모르고/ 지느러미처럼 빠르고 날렵한 무늬들은/ 가구들 위를 흘러다니고 있다//


 

김기택 시인은

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

중앙대 영문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꼽추〉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등이 있음.

김수영문학상과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황순원시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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