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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규리 시인

부흐고비 2021. 3. 20. 17:27

그 외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 이규리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 새끼들 부리에 넣어줄 때
한 번에 한 마리씩 차례대로,

새끼는 새끼대로
노란 주둥이를 찢어질 듯 벌리고 기다릴 때

그 외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절명이 그렇게 온다면
입을 벌리고 한 생각만 집중한 채

그렇다면 한생을
정확하게 전달했는가 나는,

 

벚꽃이 달아난다 / 이규리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이편 그늘까지 화사하구나/ 죽방렴 사이를 빠져나가는 한 마리 멸치처럼/ 빠른 내 그늘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둥치라 여긴 내 중심은 자주 거무스름하다/ 임산부가 행복하다면 가뜩 낀 기미는 말할 수 없었던 속내일까// 덜컹거리며 꽃길 백 리,/ 어쩌자고 화염길 천 리,// 나는 역방향에 앉아서/ 그가 다 보고 난 풍경을/ 뒤늦게 훑는다// 그 자리 그대로인데/ 풍경은 왜 놀란 듯 달아나고 있는지// 벚꽃은 제가 절정인 줄 모르고/ 절정은 또한 제 시절을 모르고//

특별한 일 / 이규리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 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알고 보면 / 이규리

사랑하는 사람이 침묵할 때/ 그때의 침묵은 소음이다/ 그 침묵이 무관심이라 여겨지면/ 더 괴로운 소음이 된다/ 집을 통째 흔드는 굴삭기가 내 몸에도 있다// 침묵이자 소음인 당신,/ 소음 속에 오래 있으면/ 소음도 침묵이란 걸 알게 된다// 소음은 투덜대며 지나가고/ 침묵은 불안하게 스며든다/ 사랑에게 침묵하지 마라/ 귀찮은 사랑에게는 더욱 침묵하지 마라/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건너편에서 보면 모든 나무들이 풍경인 걸/ 나무의 이름 때문에 다투지 마라//

얼음 / 이규리

우리 사랑 차거나/ 단단했지만/ 어느 쪽도 남지 않았다// 투명한 거짓말/ 남지 않은 것만이 다시 뭉쳐/ 입을 닫았다// 냉철한 매혹이었다// 혼자 버렸어요/ 혼자 지웠어요// 당신은 있었습니까//

흰 모습 / 이규리

눈송이 뭉쳐 가만히 들여다보면/ 설핏 무슨 기미가 어른거린다/ 너무 흰 것엔 그늘이 있지/ 보호막 같은 그늘// 흰 밥, 흰 고무신, 흰 상복, 흰 목련/ 모든 빛을 다 반사하므로 얻는다는/ 흰색은 사실 비어있는 색/ 누군가 떠난 그늘의 색// 눈 뭉쳐 등허리에 쑥 집어넣을 때/ 소스라치던 냉기는/ 눈의 그늘이었을까/ 눈물 그렁한 사람이 볼 수 있는/ 어쩌면 짜안한 모습// 서둘러 떠나는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하듯/ 눈은 오래 머물지 않아서 그립고/ 그리움은 만질 수 없어서 멀다/ 만지면 없어지는 사람을/ 누가 미워할 수 있겠나//

3면과 4면 사이 / 이규리

전철에서 옆사람이 읽고 있는 신문을/ 곁눈을 따라 읽는다/ 반경의 눈이 자연스레 그곳으로 쏠린다/ 지진과 해일이 덮친 기사,/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조금씩 어긋나는 지층을/ 저마다 재빨리 찾아 잇기도 하고/ 탈진 모서리는 안간힘으로 따라가기도 한다/ 한참을 쏠쏠하게 보고 있는데 갑자기/ 옆사람, 신문을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척 접더니/ 선반에 던진다/ 한창 꽂혀 있던 눈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순식간에 신문 속에 끼어버렸다/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 끼인 발처럼/ 3면과 4면 사이 납작하게 접혀 들어간 눈,/ 우연은 발목 접듯이 그렇게 오지만/ 우연이란 게 꼭 우연이기만 하겠나/ 누구의 뜻도 아니게/ 가랑이가 찢어진 시선도 있고/ 천신만고 되돌아온 시선도 있고/ 실종된 시선도 있지만/ 한 량 한 량 이어져 덜컹거리며 하루를 가다 보면/ 신문을 읽던 주위의 눈들 어느 날/ 신문 기사 속의 명단이 되고/ 출근길 또 다른 전철 내의 시선들이/ 무덤덤하게 짐짓 놀라며/ 또 다른 우연들을 읽고 있지 않을까//

많은 물 / 이규리

비가 차창을 뚫어버릴 듯 퍼붓는다/ 윈도브러시가 바삐 빗물을 밀어낸다/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 저녁때쯤 길이 퉁퉁 불어 있겠다/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다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삶에 물기를 원했지만 이토록/ 많은 물은 아니었다/ 윈도브러시는 물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고 있으므로/ 그 물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저렇게 밀려났던 아우성/ 그리고/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사람/ 이따금 이렇게 퍼붓듯 비 오실 때/ 남아서 남아서/ 막무가내가 된다//

재촉하다 / 이규리

브래지어에서 출발하는 사춘기도 있다.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서랍 속에 접어 둔 언니의 봉긋한 브래지어는 내가 꿈꾼 조숙하고 달콤한 흥분이었다. 겨우 밤톨만한 젖멍울이 생겼을 뿐인 내 가슴을 단숨에 수식했던 브래지어의 황홀을, 밤마다 나는 재촉했다. 내 가슴이 부풀어 저 브래지어의 우듬지에 닿기를, 분홍빛 유두가 살며시 끝을 향해 긴장해 있기를, 그러나 재촉했던 지식, 재촉했던 사랑처럼 내 가슴은 그리 빨리 부풀지 않았고 언니의 에로틱한 브래지어는 겉돌았다. 자라지 않은 가슴과 팽팽하게 솟은 브래지어는 겉돌았다. 자라지 않은 가슴과 팽팽하게 솟은 브래지어 사이의 공간만큼 나는 일찍부터 공허 같은 걸 품고 다닌 게 아닐까.// 어디를 휘돌아 나왔는지 언덕과 낭떠러지를 가졌던 내 안의 길에서 밀어올렸던 꽃대, 재촉했던 꽃은 오다가 자지러져 꽃턱에 걸렸다. 아직도 재촉할 희망이 있는가. 끝없이 채우려 했던 내 안의 곳간들 더욱 비어 있고 이제 우듬지에 닿았던 유두가 조금씩 빈틈을 가지지만 빈틈으로 보이는 안과 밖, 어쩌면 나는 오래 전에 분홍빛 꽃이었는지 모른다.//

와리바시라는 이름 / 이규리

젓가락과 사타구니 사이/ 여자라는 상징이 있다/ 벌린다는 것, 좋든 싫든 벌려야 하는/ 그런 구조가 있다/ 여학교 때 체육선생은/ 개각(開脚)하는 아이들 등을 꾹꾹 눌러/ 나무젓가락 가르듯 기절시키곤 했다/ 꼭 그래야 했을까/ 간혹 젓가락이 반듯하게 나뉘질 않고/ 삐뚤어지거나 엇나가는 건/ 젓가락의 저항이다/ 말 못하는 다리의 저항이/ 삐긋 다른 길로 들게 했을까/ 와리바시란 이름 딱지 영 못 떼고/ 생을 마감하는 불운처럼/ 사타구니 불안을 영 마감할 수 없는/ 여자이야기,/ 참 길고 질긴 이야기//

불안도 꽃 / 이규리

누가 알고 있었을까/ 불안이 꽃을 피운다는 걸// 처음으로 붉은 피 가랑이에 흐를 때/ 조마조마 자리마다/ 꽃이 피었던 걸//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몸이 마르고/ 밤마다 어둠을 고쳐 보는 동안/ 불안은 피고 있었네//

그 비린내 / 이규리

먹다 만 고등어 다시 데울 때/ 지독하게 비린내가 난다/ 두 번의 화형을 불만하는 고등어의 언어다// 이렇듯 한 번 다녀갈 땐 몰랐던 속내를/ 반복하면서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물간 생선 먹는 일 같이/ 마음 떠난 사람과의 입맞춤이 그렇다/ 요행을 바라는 마음 없지 않지만/ 커피잔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립스틱 자국처럼/ 낯선 틈이 하나 끼어든다// 아깝다고 먹었던 건 결국 비린내였나/ 등 푸른 환상이었나/ 재워 줄 뜻이 없으면/ 어디서 자느냐고 묻지 말라 했다/ 갑남을녀들/ 서로 속는 척, 속아주는 척// 먹다 만 고등어/ 먹다 만 너,/ 사향 냄새는 생리주기도 당긴다는데/ 벼리면서 단단해진다는데/ 그런데, 두 번씩 달구어 비리디 비린/ 마음아 넌?//

가려움증 / 이규리

상처는 아물어 갈 때 자꾸 가렵다고 한다/ 며칠 전부터 근질거리던 안쪽 팔/ 흉터를 열어 보면 격렬하게 자신과 다투는/ 한 사람 있다/ 신경섬유 올 사이를 지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있다/ 통증을 웃도는 가려움증이라니/ 나는 저 상처의 무게를 안다/ 다른 사람의 삶에 간섭했던 허세를 안다/ 어디가 가려운 것은 부끄러움을 보는 다른 증세이다/ 진피층이 표피층을 향해 밀어 올리는/ 전언,/ 긁어 덧나지 않게 시간을 견디어내는 일/ 상처 속 한 사람이 무기를 내려놓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머리카락이 스치는 세포들마다/ 간질간질, 으으으/ 아문 상처를 뚫고 나오는 연둣빛 잎사귀들/ 망설이던 등을 낯선 시간이 밀어 주었다//

커튼 / 이규리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그래서 사실 비밀도 아니지만/ 가리면서 다 보여주는 것도/ 전략이다/ 봐라,/ 모텔 입구 세차장 천막같은 커튼들은/ 해답 달린 문제지 같다/ 조급한 승용차/ 비닐커튼 아래로 파고들면/ 미끈덩 들어온 물체의 낯짝을/ 더러워진 자락이 쓰윽 쓸어준다/ 덕지덕지 묻은 묵인의 무게/ 두 눈의 무게,/ 언제가 김 서린 고속버스 차창을/ 때 묻은 커튼자락으로 슬쩍, 얼른 닦은 적 있다/ 훔쳐본 것처럼 끈끈한 풍경들/ 눈감은 채/ 커튼을 통과해 들어간 곳, 천국인가/ 말인즉슨/ 얼른 닦아내야 할 천국/ 떠들어 댈 일 아니나/ 들어간 뒤 나오는 걸 못 봤다/ 나오는 길을 잃을 정도면/ 얼른, 슬쩍이라도/ 저 우렁이 속 지금 성업 중이겠다//

잘 가라, 환(幻) / 이규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굶어도 배고프지 않은 그런 때가 있다/ 뭔가 휙, 지나가버린 때/ 주방 구석에 앉아 상추쌈 먹으며 울었다/ 쑥갓 두어 잎 얹어 먹으며 울었다/ 푸성귀처럼 퍼렇게 살아 있으리라 믿지는 않았지만 지나갔다,/ 막막해서 입 미어지도록 상추쌈 쑤셔 넣었다/ 혀를 깨물었다 혀가 씹혔다/ 치명적인 오류가 생겼을 때/ 아무 키나 누르면 회복되기도 하지만/ 그나마 남은 것 지워질까 봐/ 노심초사 상추쌈만 꾸역꾸역 넣는다/ 쌈장에 찰지게 버무려진/ 환(幻)이라는 것,/ 마늘 환(幻), 양파 환(幻), 참깨 환(幻)/ 꼭꼭 씹어 먹는다/ 내가 먹은 게 너였나/ 너가 먹은 건 나였나// 가부좌 틀고 앉아 들었다 놨다 한 너,/ 잘 가라, 환(幻)/ 속치마 레이스 같은 환(幻)을 걷어내면 문득/ 실핏줄 아른아른 비치는 늙음이 다가와 있을 거다/ 여기서부터 가파르다/ 단물 빠진 거친 밥상 위/ 이제부터 제대로 맛을 아는 때라고/ 깊은 맛은 씹은 뒤에 안다고/ 넌지시 또렷하게 말하는,//

결혼식 / 이규리

하얀 드레스 자락이 조마조마 먼지를 끌고 간다/ 구두 안에 옹크린 발등도 꼼지락거리겠다/ 신부, 먼데서 온 신부/ 먼지보다 더 작게 웃을락 말락/ 소름 돋은 팔이 가늘고 착잡하다/ 하얗게 펼쳐놓은 길,꿈길/ 슬쩍 당기면 헝클어질 광목 깔개가/ 문득, 실크로드 같다/ 천년 전 사막을 횡단하던 대상들, 오늘 정장으로 모여 삼삼오오 술렁이는데/ 저 행진 끝이 나면/ 인연은 무엇을 흥정할 것인가/ 일생이 서로 건네고 받아야 할 교역이라는 듯/ 지금, 꽉 끼는 구두 참으며 간다/ 불빛 아래 보송보송한 먼지,축가 날리는 속으로/ 인조 속눈썹 깜빡이며 어린 낙타는 간다//

사막 편지2 / 이규리

사막은 남성성을 지녔다 잊을 만하면 돌아와 앞섶을 여는 회오리,/ 사막이 우는 날은 내가 한없이 유순해진다 비로소 그를 안을 수 있/ 는 때이기도 하다 평원의 한 곳, 모래를 파고 만든 내 방에 한번 와/ 보시라 나는 점점 단순해지고 방안엔 명호청보다 부드런 깔개만 하/ 나 있다 어떤 울음, 혹 콜로라도 강줄기를 따라갔던 여행자들 중 만/ 의 하나 다시 이곳을 들르는 사람은 보겠지 내가 사막의 페니스를/ 물고 기꺼이 혼절하는 것을,/ 사막에서 재는 온도는 일생 중 가장 붉다 그건 울음의 온도이다//

뒷모습 / 이규리

어떤 스님이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목살 두어 근 사들고/ 비닐봉지 흔들며 간다/ 스님의 뒷목이 발그럼하다/ 바지 바깥으로 생리혈 비친 때처럼/ 무안한 건 나였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분홍색 몸을 가진 것/ 어쩌면 우리가 서로 만났을까/ 속세라는 석쇠 위에서 몇 차례 돌아누울/ 붉은 살들/ 누구에겐가/ 한 끼 허벅진 식사라도 된다면/ 기름냄새 피울 저 물컹한 부위는/ 나에게도 있다/ 뒷모습은 남의 것이라지만/ 너무 참혹할까 봐 뒤에 두었겠지만/ 누군가 내 뒷모습 본다면/ 역시 분홍색으로 읽을 것이다/ 해답은 뒤에 있다//


 

이규리 시인은

1955년 경북 문경 출생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2004년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 출간
2005년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6년 시집 ‘뒷모습’ 출간
2006년 제16회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2007∼2013년 계명대학교, 구미대학 평생교육원, 구미도서관 시 창작 강의
2014년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출간
2015년 제6회 질마재문학상 수상
2019년 아포리즘 에세이 ‘시의 인기척’  ‘돌려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출간

 

 

이규리 시인 “종이는 종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다” | YES24 채널예스

시인이 말하는 진보가, 그 작정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시인은 모를 일이다.

ch.ye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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