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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구두 / 조일희

부흐고비 2021. 3. 19. 12:46

제17회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토지문학상) 대상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거리 중국집주차장에 웬 사내가 군드러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두 손으로 받친 채 자고 있는 사내 옆으로 반쯤 남은 소주병이 파수꾼처럼 서있다. 아니꼬운 사내를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며 지나간다. 무심히 지나치려는 나를 사내의 알근한 구두 한 짝이 빤히 쳐다보며 아는 체를 했다

. 어린 시절, 추운 겨울에도 양말을 신을 수 없을 만큼 가난했었다. 애옥한 형편에 새 신발이라야 고작 일 년에 한두 번, 명절빔으로 받은 검정 고무신이나 운동화가 전부였다. 강산이 두 번씩 바뀌어도 우리 집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흐르는 시간은 촌스러운 나를 싸구려 구두를 신어도 아름다운 나이로 만들어 주었다.

그가 내민 화려한 구두가 솔직히 탐이 났다. 나와 어울리는지, 잘 맞는지 생각지도 않은 채 덥석 구두를 신고 첫길을 따라나섰다. 새 구두가 편해지기까지는 조율의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맞춘 듯 편안한 신발도 있겠지만, 구두 뒤축과 발꿈치가 부대껴 상처가 나는 구두도 있다. 서둘러 떠난 첫길 초입부터 구두는 까탈을 부렸다. 뒤꿈치가 까지고 선홍색 피가 맺히는 날이 자주 생겼다. 시간이 지나도 새 구두는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사랑이 결핍된 우리는 서로를 보듬어 주지 못했다. 그의 상처의 시원始原은 알고 있었지만, 상처를 보듬기엔 내 마음의 소沼가 깊지 않았다. 그 사람 또한 내 아픔의 원천인 빈곤한 친정에 대해 마음을 나누기보다 비웃음으로 일관했다. 서로의 이기利己로 택한 삶 속에서 사랑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었다. 그는 돌개바람처럼 밖으로 나돌며 채워지지 않는 사랑을 술로 채웠고, 외로움으로 하루를 채운 나는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허허로운 거리를 걸었다.

아침이 오면 세상의 찌꺼기가 묻은 그의 구두를 솔로 털어내고 부드러운 헝겊으로 정성스레 닦았다. 그러다 보면 서걱거리는 우리 사이도 윤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언제부턴가 그의 구두 끝이 바깥을 향했다. 밖으로 새는 건 그의 마음만이 아니었다. 물려받은 재산도 하나, 둘씩 빠져나갔다. 내 얼굴에서 어두운 기미라도 보이는 날이면 그는 상처를 들킨 짐승처럼 불같이 화를 냈다. 술로 보내는 날이 달포 해포 이어지며 그는 휘뚝거리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정신이 아득해져도 틀어진 구두를 바로잡으러 열심히 구두를 닦았다. 걸을 줄 모르는 앉은뱅이처럼 같은 자리에 앉아 그의 구두를 만지고 또 만졌다. 언젠가 제 모양으로 돌아올 날이 있으리라,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서. 어쩌면 구두가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마지막 끈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인연의 끈이 끊어질까 두려워 흔들리는 마음을 닦듯 매일 구두를 닦았는지도 모른다.

그날도 남편의 구두는 밖을 헤매고 있었다. 소파에 기댄 채 설핏 잠이든 모양이다.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전화기 속 낯선 남자가 일러준 유희의 골목을 서너 바퀴 돌고 나서야 지하주차장 입구에 퍼져있는 그를 찾을 수 있었다. 푸푸거리며 자고 있는 그를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뒤돌아서서 나오고 싶었다. 시시포스 형벌처럼 반복되는 지금의 현실이 두렵고,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또 무서웠다.

어둠이 익숙해지자 보이지 않던 그의 구두가 희미하게 보였다. 찌그러진 구두를 옆에 벗어두고 잠들어 있는 그는 신발만 벗어 놓은 게 아니었다. 자존감과 체면까지 어두운 바닥에 내던져버린 거였다. 그 순간, 벗어던진 건 구두가 아니라 나와 아이구나, 저 구두처럼 우리는 차가운 바닥에 내던져 있구나. 나를 눌렀던 어둠의 실체가 섬광처럼 보였다.

허방다리를 짚고 살았다는 회한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두려움을 먹고사는 어둑서니처럼 나는 긴 세월을 두려움과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살았다. 육신의 안락함을 위해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살았다. 후회의 눈물이 마른 가슴으로 흘러내렸지만 누굴 탓하랴, 화려한 구두를 신은 건 나의 선택이었거늘. 구두끈을 묶은 것도 나였으니 푸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이십여 년을 끌고 다니느라 구겨지고 금이 간 구두를 벗어던졌다. 지난 세월이 어제 일인 양 스쳐 지나간다. 어울리지도 않은 구두를 신고 언틀먼틀 길을 부단히 걸어왔다. 억지로 구겨 넣은 발은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어 여기저기 흉터투성이였다. 뒤돌아보니 디뎠던 자리마다 퍼런 발자국이 선명하다. 우묵하게 패인 자국에 거무스레한 어둠만이 담겨 있었다.

어느덧 상처는 단단한 옹이가 되고 여문 옹이에서 용기라는 싹도 움텄다. 살아온 세월을 톺아보면 가끔 상처가 꽃으로도 보인다. 이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보냈던 날을 평온하게 보낸다. 쌓였던 아픔을 조금씩 밖으로 드러내자 뾰족한 상처의 편린들이 쏟아진다. 가시처럼 콕콕 지르던 아픔은 희망을 쓰는 촉이 되어 어설프게나마 글 마당을 거닐게도 한다.

하루해가 저문다. 노을빛 저녁 풍경 속으로 사붓사붓 걸어가 나도 하나의 풍경이 된다. 낡지만 편안한 구두 한 켤레로 남아도 좋을 인생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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