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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성복 시인

부흐고비 2021. 3. 23. 08:53

 

정선 / 이성복


내 혼은 사북에서 졸고
몸은 황지에서 놀고 있으니
동면 서면 흩어진 들까마귀들아
숨겨둔 외발 가마에 내 혼 태워 오너라

내 혼은 사북에서 잠자고
몸은 황지에서 물장구 치고 있으니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아
깻묵같이 흩어진 내 몸 건져 오너라

 

정든 유곽(遊廓)에서 / 이성복

1// 누이가 듣는 음악(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잡초(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연애(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목단(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地下)의 잠, 한반도(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벌목(伐木)/ 당한 女子의 반복되는 임종(臨終), 병(病)을 돌보던/ 청춘(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조국(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者는 누구인가/ 일본(日本)인가, 일식(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와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나신(裸身)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승천(昇天)하면/ 나는 죽음으로 월경(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다마다 더욱/ 붉어지는 신음(呻吟),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날으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 부를 때,/ 전쟁(戰爭)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혁명(革命)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행진(行進)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조국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후세(後世)/ 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구미(口味)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한족(韓族)의 별//

아주 흐린 날의 기억 / 이성복

새들은 무리지어 지나가면서 이곳을 무덤으로 덮는다/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모래내 / 이성복

1// 하늘 한 곳에서 어머니는 늘 아팠다/ 밤 이슥하도록 전화하고 깨자마자/ 누이는 또 전화했다 혼인(婚姻)날이 멀지 않은 거다/ 눈 감으면 노란 꽃들이 머리 끝까지 흔들리고/ 시간(時間)은 모래 언덕처럼 흘러내렸다/ 아, 잤다 잠 속에서 다시 잤다/ 보았다, 달려드는, 눈 속으로, 트럭, 거대한// 무서워요 어머니/ ―얘야, 나는 아프단다// 2// 이제는 먼지 앉은 기왓장에/ 하늘색을 칠하고/ 오늘 저녁 누이의 결혼 얘기를 듣는다/ 꿈 속인 듯 멀리 화곡동 불빛이/ 흔들린다 꿈 속인 듯 아득히 기적(汽笛)이 울고/ 웃음 소리에 놀란 그림자 벽에 춤춘다// 노새야, 노새야 빨리 오렴/ 어린 날의 내가 스물 여덟 살의 나를 끌고 간다/ 산 넘고 물 건너 간다 노새야, 멀리 가야 해// 3// 거기서 너는 살았다 선량한 아버지와/ 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 거기서 너는 살았다 기차 소리 목에 걸고/ 흔들리는 무우꽃 꺾어 깡통에 꽂고 오래 너는 살았다/ 더 살 수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우연히 스치는 질문―새는 어떻게 집을 짓는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풀잎도 잠을 자는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너는 거기서 살았다 붉게 물들어/ 담벽을 타고 오르며 동네 아이들 노래 속에 가라앉으며/ 그리고 어느날 너는 집을 비워 줘야 했다 트럭이/ 오고 세간을 싣고 여러번 너는 뒤돌아 보아야 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 이성복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렇게 속삭이다가 / 이성복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앞날 / 이성복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 앞날이 어두워지는 까닭입니다 내 곁에서 당신이 멀어져 가면 /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나는 당신을 잡을 수도 놓을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떠나갈까 안절부절입니다 한껏 내가/ 힘들어하면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팔도 다리도 없으니 내가 당신을/ 붙잡지요 나는 당신이 떠나야 할 줄 알면서도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 입이 없는 것들 / 이성복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

강 / 이성복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希望이라면/ 우리는 언제 絶望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강가에서 3 / 이성복

저렇게 밀려가면서도/ 당신은 제자리에 계십니다/ 저렇게 파랑치고 파랑치면서도/ 당신은 머물러 계십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밀려가고 밀려오면서도/ 나와 함께 계시는 당신// 당신에게 이끌려 기어코/ 나는 흐르고야 맙니다/ 오, 한없이 떨리는 당신//

거리 / 이성복

내 사랑하는 것이 때로는 역겨워/ 짜증이 나기도 하였지요/ 흐드러진 꽃나무가 머리맡에/ 늘어져 있었어요// 내 사랑하는 것이 때로는 역겨워/ 얼어붙은 거리로 나서면/ 엿판 앞에 서 있는 엄마의 등에/ 버짐꽃 핀 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어요// 때로 내 사랑하는 것이 역겨워/ 떠날 궁리를 해보기도 하지만/ 엿판 앞에 서성거리는 엄마의 등에/ 나는 곤히 잠들어 있었어요//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 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남해 금산 /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그대 가까이 2 / 이성복

자꾸만 발꿈치를 들어보아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 기다림이 길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들어요/ 까마득한 하늘에 새털구름이/ 떠가고 무슨 노래를 불러/ 당신의 귓가에 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만나지 않았으니/ 헤어질 리 없고 헤어지지/ 않았어도 손 잡을 수 없으니/ 이렇게 기다림이 깊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늘어납니다.//

꽃피는 시절 /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비단길 1 / 이성복

깊은 내륙에 먼 바다에 밀려오듯이/ 그렇게 당신은 내게 오셨습니다/ 깊은 밤 찾아온 낯선 꿈이 가듯이/ 그렇게 당신은 떠나가셨습니다/ 어느날 몹시 파랑치던 물결도 멎고/ 그 아래 돋아난/ 고요한 나무 그림자처럼/ 당신을 닮은 그리움이 생겼습니다/ 다시 바람 불고 바람 몹시 파랑쳐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슬픔 / 이성복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내가 그대에게 바랄까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그대가 나에게 바랄까요/ 그래도 내 가는 길이 그대를 향한 길이 아니라/면/ 그대는 내 속에서 나와 함께 걷고 계신가요/ 나를 미워하고 그대를 사랑하거나 그대를 미워하고/ 나를 사랑하거나 갈래갈래 끊어진 길들은 그대의/ 슬픔입니다 나로 하여 그대는 시들어 갑니다//

새 / 이성복

잠든 잎새들을 가만히 흔들어봅니다/ 처음 당신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던/ 날처럼 깨어난 잎새들은 다시 잠들고/ 싶어합니다 나도 잎새들을 따라 잠들고/ 싶습니다 잎새들의 잠 속에서 지친/ 당신의 날개를 가려주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눈을 뜨면 깃을 치며 날아가는/ 당신의 모습이 보이겠지요 처음 당신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던 날처럼 잎새들은/ 몹시 떨리겠지요//

그 날 / 이성복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숨길 수 없는 노래 2 / 이성복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람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 이다//

숨길 수 없는 노래 3 / 이성복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돌아/ 보면 우리는 길이 끝난 자리에 서 있는 두 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그리고 그/ 사이엔 아무도 발디딜 수 없는 고요한 사막이 있습니다 나의 일생은 두 개의/ 다른 죽음 사이에 말이음표처럼 놓여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오랜 저녁/ 빛에 눈먼 두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내게로 오는 그/ 대의 먼 길을 찾아서입니다.//

노래의 기억 / 이성복

기억의 님쪽 바다 십자성과 야자수는 노래 속에 있다 진한 박하와 따뜻한/ 망고향 흐르는 노래 하얀 조개 껍질 같은 섬들 돈벌레처럼 미끄러지는 통나/ 무배들 수시로 끓는 납덩이 같은 노래의 추억은 내 속에서 해저 화산처럼/ 폭발한다 진흙을 싸 발라 구운 원숭이 두개골처럼 이승의 붉은 털이 다 빠/ 지고도 남을 노래, 그러나 노래가 알지 못하는 이승의 기억은 시퍼런 강물/ 이 물어뜯는 북녘 다리처럼 발이 시리다//

슬픔 / 이성복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내가 그대에게 바랄까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그대가 나에게 바랄까요/ 그래도 내 가는 길이 그대를 향한 길이 아니라면/ 그대는 내 속에서 나와 함께 걷고 계신가요/ 나를 미워하고 그대를 사랑하거나 그대를 미워하고/ 나를 사랑하거나 갈래갈래 끊어진 길들은 그대의/ 슬픔입니다 나로 하여 그대는 시들어 갑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1 / 이성복

어두워가는 산을 가리키며 당신이 아니, 저기 진달래가..... 저기도, 저 너/ 머에도..... 당신이 놀라 가리킬 때마다 어둠과 피로 버무린 꽃이 당신 손끝/ 에서 피어났습니다// 그때 당신이 부르기만 하면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에서 나는 처음 꽃피어날/ 것 같았습니다//

이별 1 / 이성복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새가 울고 꽃/ 이 피었겠습니까 당신의 슬픔은 이별의 거울입니다 내가 당신을 들여다보/ 면 당신은 나를 들여다 봅니다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알지 못하겠습/ 니다 이별의 거울 속에 우리는 서로를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 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습니다 당신이/ 슬퍼하기시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가 하나 되었겠/ 습니까//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 이성복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편지 1 / 이성복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 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 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 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 습 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편지 3 / 이성복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다고 나/ 는 말했지요 전설 속에서처럼 꽃이 피고 바람 불고 십리 안팎에서 바다는/ 늘 투정을 하고 우리는 오래 떠돌아 다녔지요 우리를 닮은 것들이 싫어/ 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 가까워졌지요 영락없이 우리에게 버려진 것/ 들은 우리가 몹시 허할 때 찾아와 몸을 풀었지요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염려 마세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답니다//

밀려오면서 고운 모래를 / 이성복

물이 밀려온다/ 밀려오면서,/ 고운 모래를 뒤집어놓는다// 물새들은 어째서/ 같은 방향만 바라볼까/ 죽은 물새를 추억하는/ 자세가 저런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서럽지도 않은 것들이/ 일제히 한곳을 바라보고 있다//

만남 / 이성복

내 마음은 골짜기 깊어 그늘져 어두운 골짜기마다/ 새들과 짐승들이 몸을 숨겼습니다 그 동안 나는 밝은/ 곳만 찾아왔지요 더 이상 밝은 곳을 찾지 않았을 때/ 내 마음은 갑자기 밝아졌습니다 온갖 새소리, 짐승/ 우짖는 소리 들려 나는 잠을 깼습니다 당신은 언제/ 이곳에 들어오셨습니까//

서시 / 이성복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류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이성복의 시론 <불화하는 말들>  <무한화서> 중에서

 

0// 시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네 가지 요소를 살펴야 해요. 작자, 언어, 대상, 독자.// 모든 허물은 나에게 있다 하지요.// 언어, 대상, 독자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러닝 소매에 머리를 집어넣으려는 아이나 매연을 뿜으며 내달리는 트럭과 뭐 다르겠어요.//어디 시 쓰는 일에서만 그러할까요. ‘안 좋은 시인의 사랑을 받는 남(여)자는 얼마나 안 행복할까.’


1// 시 쓰는 공부는 가파른 길이에요. 자기 자신을 내거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삶은 사라지고 시만 남겠지요.//예술과 삶은 거의 같이 나가는 것 같아요. 예술 가지고 장난치거나 멋 부리면 안 돼요. 무엇보다 정성이 있어야 해요// 공자의 스승 주공은 머리를 감다가도 손님이 오면 그대로 나가 맞이했다 하지요. ‘구이경지久而敬之’라는 말처럼, 시는 끝까지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거예요.

10// 골프 처음 배울 때, 양족 다리에 벽을 쌓으라 하지요. 벽이 없으면 힘을 모을 수가 없어요.// 시 쓰기에서 양족 다리라 하면, 진정성과 언어감각일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말재주가 뛰어나도 반성하는 정신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65// 시의 화자는 말의 유혹에 희생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말은 소리와 의미의 길을 따라 고구마 줄기처럼 퍼져 나가요.// 가령 ‘청도’하면 ‘도청’이 생각나고 5,18이 떠오르지요.// ‘아래아 한글’을 쓰다보면 마우스가 메뉴의 도구상자 위를 지날 때가 있어요.// 거기다 가만히 커서를 올려 놓으면 ‘미리보기’ ‘인쇄’ 같은 안내글자가 떠오르지요. 말이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요.

125// 손등이 까졌을 때 공기 중에서는 아픈지 모르지만, 물에 집어넣으면 따갑지요. 특히 소금물에 넣으면 더 쓰리지요.// 진실한 것,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은 모두 그렇게 쓰린 거예요.// 시로 들어가는 입구가 호기심이라면 시에서 나오는 출구는 쓰라림이에요.

85// 시는 반전의 힘이에요.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 전환이 있어야 해요. 가련 ‘꽃이 피었다 - 새가 울었다’는 연결보다 ‘꽃이 피었다 - 새가 죽었다’는 연결이 힘이 있어요.

239//

시는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을 숨기는 거예요. 혹은 숨김으로써 말하는 거예요. 슬픔을 감추는 것이 슬픔이에요. 슬픔에게 복수하려면, 슬픔이 왔을 때 태연히 시치미를 떼야 해요. 그것이 시예요.

331// 막막한 바다에서 어부는 어디에다 그물을 쳐야 할지 알아요. 간절함과 안쓰러움, 부질없음과 속정없음이 시의 포인트이고 기술이에요.

 

 

‘시인들의 시인’ 이성복이 들려주는 시쓰기 방법론

강의록, 강연 등 엮은 책 세권 “시는 불가능과 실패의 기록” 현란한 비유와 직관 돋보여

www.hani.co.kr

 

이성복(李晟馥) 시인은 195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 때 만난 김현 교수의 격려로 1977년 계간 <문학과지성>에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80년에 나온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문단과 독자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으며 그에게 김수영문학상을 안겨주었다. 시집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아, 입이 없는 것들>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래여애반다라> <어둠 속의 시>, 시선 <정든 유곽에서>, 시론 <극지의 시> <불화하는 말들> <무한화서> 등과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고백의 형식들: 사람은 시 없이 살 수 있는가> <고백의 형식들: 사람은 시 없이 살 수 있는가?> 외에도 사진에세이와 아포리즘, 대담, 연구서, 문학앨범 등을 내었다. 1982년부터 대구 계명대에서 불문과 교수로 18년, 그리고 문창과 교수로 12년 재직하고 2012년 명예퇴직했다. 

 

 

 

 

[혼돈의 시대, 시인에게 사랑을 묻다] 이성복 : ‘불가능’을 마주하는 나약한 인간의 존엄

“끔찍한 진실을 직시하자”

jmagazine.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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