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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외투 / 김소운

부흐고비 2021. 3. 22. 12:54

계절 중에서 내 생리에 가장 알맞은 시절이 겨울이다.

체질적으로 소양小陽인 데다, 심열心熱이 승하고 다혈질이다. 매양 만나는 이들이 술을 했느냐고 묻도록 얼굴에 핏기가 많고 침착 냉정하지 못해 일쑤 흥분을 잘한다. 아무리 추운 날씨라도 김 나는 뜨거운 것보다는 찬 음식을 좋아한다. 남국에서보다는 눈 내리는 북극에 살고 싶다.

그러면서도 유달리 추위는 탄다. 추위에 대한 저항력이나 자신으로 겨울을 좋아하느니보다, 추위 속에서 그 추위를 방비하고 사는, 추위는 문밖에 세워 두고 나 혼자는 뜨끈하게 군불 땐 방 속에 앉아 있고 싶은, 이를테면 그런 ‘에고’의 심정이다.

눈보라 뿌리는 겨울 거리에 외투로 몸단속을 단단히 하고 나선, 그 기분이란 말할 수 없이 좋다. 어느 때는 외투라는 것을 위해서 겨울이 있는 것 같은 착각조차 느낀다.

그런데도 나는 그 외투 없이 네 번째 겨울을 맞이한다. 무슨 심원心願이 있어서, 무슨 주의 주장이 새로 생겨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외투 두 벌은 도적맞았고, 서울 갈 때 남에게 빌려 입고 간 외투 한 벌조차 잃어버리고, 그러고 나니 외투하고 승강이하기가 고달프고 귀찮아졌다. 그냥 지낸다는 것이 한 해, 두 해-벌써 네 해째이다.

겨울의 즐거움을 모르고 겨울을 난다는 것은 슬픈 노릇이다. 하기야 외투뿐이랴. 가상 다반家常茶飯의 일체의 낙이 일시 중단이다. 나 하나만이 아니길래 도리어 마음 편한 때도 있다.

벌써 10여 년-채 십오 년까지는 못 되었을까? 하얼빈서 4, 5백 리를 더 들어간다는 무슨 현懸이라는 데서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이 농장 경영을 하다가 자금 문제인가 무슨 볼일이 생겨 서울을 왔던 길에 나를 만났다. 2~3일 후에 결과가 시원치 못한 채 청마는 도로 북만北滿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역두에는 유치환 내외분-그리고 몇몇 친구가 전송을 나왔다.

영하 40 몇 도의 북만으로 돌아간다는 청마가, 외투 한 벌 없는 세비로* 바람이다. 당자야 태연자약일지 모르나 곁에서 보는 내 심정이 편하지 못하다. 더구나 전송 나온 이 중에는 기름이 흐르는 낙타 오버를 입은 이가 있었다.

내 외투를 벗어 주면 그만이다. 내 잠재의식은 몇 번이고 내 외투를 내가 벗기는 기분이다. 그런데 정작 미안한 일은 나도 외투란 것을 입고 있지 않았다.

기차 떠날 시간이 가까웠다.

내 전신을 둘러보아야 청마에게 줄 암 것도 내게 없고, 포켓에 꽂힌 만년필 한 자루가 손에 만져질 뿐이다. 내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불란서제 ‘콩쿠링’-, 요즈음 ‘파카’니 ‘오터맨’ 따위는 명함도 못 들여 놓을 초고급 만년필이다. 당시 육 원圓하는 이 만년필은 일본 안에도 열 자루가 없다고 했다.

“만년필 가졌나?”

불쑥 묻은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청마는 제 주머니에서 흰 촉이 달린 싸구려 만년필을 끄집어내어 나를 준다. 그것을 받아서 내 주머니에 꽂고 ‘콩쿠링’을 청마 손에 쥐어 주었다.

만년필은 외투도 방한구防寒具도 아니련만, 그때 내 심정으로는 내가 입은 외투 한 벌을 청마에게 입혀 보낸다는 기분이었다.

5~6년 후에 하얼빈에서 청마를 만났을 때, 그 만년필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튜브가 상해서 잉크를 찍어 쓴단 말을 듣고, 서울서 고쳐서 우편으로 보내마고 약조하고 ‘콩쿠링’을 다시 내가 맡아오게 되었다. 튜브를 갈아 넣은 지 얼마 못되어 그 ‘콩쿠링’은 쓰리**가 채갔다.

아마 한국에 한 자루밖에 없을 그 청자색靑磁色 ‘콩쿠링’ 만년필이 혹시 눈에 뜨이지나 않나 하고 만년필 가게 앞을 지나칠 때마다 쑥스럽게 들여다보곤 한다.

* 세비로=평상의 신사복, 당시의 일본어
** 쓰리=소매치기. 당시의 일본어

 

 

[브레이크뉴스] 일생을 한국 문화 일본 소개에 바친 나의 아버지 김소운(金素雲)

김소운 수필가. 이 사진은 고 임응식 사진작가가 촬영한 사진으로, 임응식아카이브에 저작권이 있는 작품사진임을 밝힙니다.시인이며 수필가 였던 김소운(金素雲).1920년 부산항. 당시 13세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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