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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새 봄의 마술 / 조윤수

부흐고비 2021. 3. 22. 08:41

옛 사람들은 동지부터 99 소한도를 그리면서 겨울을 보냈다던가. 추웠던 시절 매화도를 그려놓고 매일 한 송이씩 붉은 물감으로 색칠하며 홍매를 피워냈다지. 마지막 99송이 홍매화가 피어나면 창밖의 매화나무에 진정 매화가 맺힌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풍류를 누릴 수나 있었겠나. 특권을 누렸던 조선의 문인 화가들에게나 해당된 복이 아니었을까. 매화 그리기에 벽(癖)이 있던 조선 후기의 화가 조희룡쯤이면 당연했으리라.

'매화도 대련'이나 '매화서옥도'는 겨울에 보면 어찌나 화사한지 추운 겨울이 무색할 지경이니 말이다. 그의 매화는 전 시대의 문인들처럼 매화를 짓누르고 있던 힘겨운 상징성과 지조성을 전부 털어버렸다.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고고한 청덕의 매화가 아닌 꽃 자체로 아름다울 뿐이다. 매화병풍을 둘러치고 잠잔 뒤 매화차를 마시고 매화 시를 읊조린 그였으니 말이다.

매화도를 그리듯이 선인장 꽃잎을 담고 아침저녁으로 차를 벗하여 겨울을 보냈다. 떨어진 꽃잎을 모아서 세다 보니 어느새 베란다의 천리향이 퍼지고 있다. 마침 이웃집에서 매화분 꽃이 피었다는 소식이다. 매화분의 백매가 피는 창가에서 점심을 먹고, 매화에 취한 듯 포도주도 한 잔 걸치고 알싸한 기분으로 만덕정 솔숲을 거닐었다. 겨울의 창 안에서 익은 새봄을 보았으나 야생 매화나무의 꽃순은 꽃샘추위 속에 아직 숨죽이고 있다.

그래도 춘삼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유년의 아이들이 어린이 집이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아이와의 전쟁'을 호소하는 젊은 부모가 늘고 있단다. 현대인의 약 95%가 실내에서 생활한다. 요즈음 아이들의 부모 역시 대부분 온실의 화초처럼 살면서 온실에서 아이들을 보호해왔기 때문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도시생활 자체가 모든 일들이 자연과는 분리된 생활이어서 적극적으로 단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내 손녀도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언젠가 며느리가 아이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아빠 엄마가 어디어디 다닌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의였다. 위험한 사회 환경에 대비해야 하는 부모 입장이 민망스러웠다. 요즈음 대두되고 있는 학교 내의 폭력이나 왕따 문제를 생각하면 즐겁게 출발해야 할 새학기가 걱정스럽기도 하다. 공교육의 위기라든가 교육 환경 개선차원을 놓고 다양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이미 교육계의 구조적 개선의 제시는 진부한 대안으로 전락한 지 오래라는 소식이다. 삶의 다양성과 다양한 가치 추구를 본연으로 하는 문화예술의 역할과 기능이 모든 그늘진 곳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리라.

사람을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게 하여서는 진정한 사람으로 자라기 어려울 것이다. 덕(德)·체(體)·지혜(智慧)를 갖춘 사람의 향기는 만리(萬里)를 간다고 한다. 위대한 선각자들의 향기는 세대를 초월한다. 온실의 매화나 천리향처럼 자란 사람들이 어찌 사람의 진정한 향기를 지닐 수 있을까.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과 여행의 준비가 되어 있는 자만이 마비시키는 습관을 헤어날 수 있다." 모든 시작에는 마술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한 단계 한 단계 씩씩하게 훈련해 가면 좋겠다. 명랑하게 한 공간 한 공간을 통해 잘 나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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