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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말기의 정치 상황은 험악하고 살벌했다.

그 무렵, 나는 경북의 오지, 영양군으로 일자리가 옮겨졌다. 워낙 산중 고을이라 유배지로 쫓겨가는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허나 이내 그곳 산수와 인심에 따뜻이 보듬겨져서 세상 바뀌는 줄도 잘 모르고 삼 년 세월을 훌쩍 흘려보냈다.

영양은 산이 깊고 물이 맑았다. 수림이 울창해서 공기가 신선하고 하늘은 더없이 높고 깨끗했다.

해가 지면 밤하늘의 야경이 더욱 아름다웠다. 그 많은 별들은 저마다 보석처럼 반짝이며 천상의 향연을 베풀곤 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그 향연에 초대되어 자신의 실체를 비로소 깨닫고 부질없는 집착에서 벗어나 본다.

봄, 여름, 가을 밤마다 애타게 우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사람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내린다. 마침내 맺히고 서린 한과 서러움을 깨끗이 풀어내어 가슴을 텅 비게 만든다.

커다란 보름달이 영위에 걸리면 지상의 모든 존재들은 황금빛 비단옷을 갈아입고 고요의 바닷속으로 빨려들어 선정의 열락을 즐기게 된다.

영양은 삼불차(三不借)의 고을이다. 사람을 빌리지 않고 글을 빌리지 않으며 재물도 빌리지 않는다고 한다.

한 마을에서 박사가 십여 명이나 배출될 정도로 인재가 많은 고장이다. 글이 흔해서 관내의 비명(碑銘), 제문(祭文), 정기(亭記) 등 문장은 이곳 문사들이 쉽게 해결해 버린다. 재물을 빌리지 아니함은 지족을 알기 때문이리라.

주민들의 삶은 크게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궁색하지도 않다. 고추, 담배, 고랭지 채소, 일월산 산나물... 등 농가 소득은 제법 짭짤했다. 엽연초 수납 때가 되면 영양읍은 흥청망청이다. 도시의 유녀들이 이곳 주점으로 잠시 몰려든다.

인심은 온후하고 순박했다. 하지만 비루하고 그릇된 짓거리는 그냥 봐 넘기지 않는다. 사슴같이 온순하다가도 갑자기 호랑이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악의 없는 실수는 넉넉한 아량으로 덮어주고 감싸주기도 한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나무 잎새가 무성한 초여름 밤, 그날따라 보름달은 순금으로 된 징처럼 커다랗게 중천에 달려 있었다. 소쩍새는 연신 쏟아지는 금빛 가루를 사방으로 흩으며 애타는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일까. 그날 밤은 소쩍새 우는 소리가 가슴을 쓸어내리기는커녕 도리어 슬픔, 고독, 좌절, 소외, 분노... 이런 것들로 창자를 뜯어내듯 마음을 아프게 했다. 잠이 올 리가 없다. 이 밤을 어떻게 지새울까, 뜨락에 나와 서성거리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본다.

이때, 따르릉 전화벨이 울려왔다. 영양여고 최 교장 목소리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으니 술 한 잔 같이 하자는 제의가 아닌가. 무척 반가웠다. 그도 나와 같이 가족을 대구에 두고 혼자 와 있는 처지였다.

밤은 이미 으슥한데 둘이는 장터 귀퉁이 한 주막에서 마주 앉았다. 때때로 들른 적이 있어 주모는 얼른 알아차리고 술상을 내왔다. 우리는 별말 없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위 속에 술을 들어부었다.

안동 소주 십여 잔을 들이켜고 나니 몸이 쫘악 풀리는 해구(解軀) 현상이 왔다. 이제 주모까지 끼여들어 주거니 받거니 한다. 점차로 말이 헤퍼져서 해구(解口)가 되고, 문학, 철학, 종교가 어떻고 멋대로 떠들어댔다. 연신 술을 마신다. 이젠 맥주다. 웬일일까. 늙은 주모가 금세 미인으로 둔갑해서 교태를 부리고 있지 않는가. 술이 지나치면 해색(解色)이 되어 미추가 분별이 안 된다더니 그런 것이었을까. 맥주 여닐곱 병을 비우고 보니 마음이 바다보다 더 넓고 편안할 수가 없었다. 이것을 해증(解憎)이라 했던가.

이제 둘이는 혀가 꼬부라져서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 데다 맥주 두어 병을 또 몸속에 쏟아 넣었다. 둘이는 그야말로 해격(解格)이 와서 서로의 신분도 체면도 인격도 다 벗어던지고 오십 대 중반의 무지막지한 남자로 전락해 버렸다.

마침내 두 사람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아직도 소쩍새는 소쩍소쩍 피를 토하고 온 동네는 죽음의 적막 속에 묻혀 있었다.

부마사태(釜馬事態)가 터지고 시국은 칼날처럼 긴장해 있을 때가 아니었던가. 허나 대취한 취객이 그런 것 알 리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옥고로 신음하던 죄수가 어느 날 돌연히 세상이 바뀌어 풀려난 듯 천하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읍내 중앙통을 둘이서 손잡고 휩쓸며 전진했다. 큰소리로 노래도 부르면서.

뒤에 안 일이지만 우리가 주막에서 독주를 퍼마시고 있을 때 벌써 관내 유지들 사이에 소식이 돌고 있었다. 그들은 전화통을 들고 서로 걱정을 했다.

"통금 고동이 분 지가 두 시각이 지났는데.....,"

"경계가 심한 거리로 나오면 즉각 파출소로 연행될 텐데....,"

"소위 교육자란 사람들이 비상시국을 망각하고 만취해서 통금도 위반하고...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대면 좋을 리가 없는데...," 하고.

마침내 그들의 의논이 하나로 모아졌다. 오늘 밤 교육장과 교장은 책임이 없다. 죄가 있다면 유별나게 밝은 보름달이 유죄다. 밤새껏 슬피 우는 소쩍새도 공범이다.

지역 원로 두 분이 치안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잠을 깨웠다. 그간의 사정을 알리고 무사 귀가하도록 보살펴 달라고 간청했다.

경찰서장의 응답은 경쾌했다.

"보름달이 유죄고 소쩍새는 공동 정범이라... 맞습니다. 순찰 경관에게 잘 모시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심심해서 장온고(張蘊古)의 <대보잠大寶箴>과 정정숙程正叔의 <사잠四箴>을 읽다 말고 문득, 영양 시절 나의 추태를 떠올렸다. 큰 실수도 선의로 보면 삼월 달의 잔설이 되고, 작은 실수도 악의로 파헤치면 삶을 어긋나게 만드는 사단이 된다고 했던가.

세상에는 독버섯도 있지만 아름다운 인정의 꽃은 더욱 많았다고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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