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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퇴색치 않는 사랑 / 김소운

부흐고비 2021. 3. 23. 04:06

* <가난한 날의 행복>과 내용이 비슷하지만 꼭 같지는 않음(부흐고비)


왕후의 밥, 걸인의 찬

그 내외는 가난했다.

보통이면 사내가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을 지키기 마련이건마는 그 내외는 세상의 상식과는 반대로 아내가 직장으로, 교사이던 남편은 학교 일을 그만두고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실직자였다. 어린것은 아직 없었다.

젊은 아내의 직장은 그들이 깃들어 사는 단칸방에서 과히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어느 개인 회사에서 회계 사무를 맡아 보는 것, 그것이 그 젊은 아내의 직업이다.

어느 날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밥을 굶은 채 직장으로 나갔다가 점심 시간을 틈타서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나갈 때 남편의 한 말이 있다.

"어떻게라도 변통해서 점심을 지어 둘께 시장해도 그 때까지만 참으라우."

방 안에는 밥상이 나와 있고, 남편은 어디로인지 외출하고 없었다.

신문지로 덮은 밥상에는 남편이 지은 밥 한 그릇--반찬이라고는 간장 하나--그 밥상 위에 써 두고 간 쪽지가 얹혀 있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걸로 시장기만 속여 두시오.'

쌀은 간신히 샀는데도, 남편이 마련한 돈으로는 반찬에까지 손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밥을 간장 하나로 먹으면서 젊은 아내는 미상불 왕후가 부럽지 않도록 가슴이 뿌듯했다. 촌철이 사람의 폐부를 찌른다지마는, 표어도 격언도 아닌, 남편이 적어 두고 간 그 한 마디 말에 아내는 눈물이 나도록 행복했다.

'가난'이란 결코 환영할 것이 못 된다. 안빈낙도니 청빈이니 하는 빛 좋은 문자들이 있기는 하나, 인간을 시궁창에 뒹굴게 하는 것도 가난이요, 가까운 일가친척이며 친한 벗들 사이에 길을 막고 담을 쌓게 하는 것도 역시 가난이다.

그런데도, 때로는 이 가난이 만금으로 못 살 보석을 경품으로 갖다 주기도 한다니 신기한 조화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내가 잘 아는 어느 부부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 역시 남편은 실직--실직이라는 말은 가졌던 직업을 잃었다는 뜻이니 이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 남편에게는 본래 직업이 없었다. 남들은 그를 시인이라고 부르지만, 이 나라에서 싯줄이나 쓴다고 해서 그걸로 호구책을 삼는다거나, 가족을 먹여 살릴 의젓한 직업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사내는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아침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누라가 쟁반에는 삶은 고구마 몇 개를 얹어 들고 들어왔다.

"햇고구마가 하도 맛이 좋다고 아랫집에서 그러길래 우리도 몇 개 사 왔답니다. 하나 맛이나 보세요."

사내는 본래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식전에 그런 것을 먹는 게 꺼림해서 잠시 주저하다가 마누라 대접으로 그 중 제일 작은 한 개를 집어서 입에다 넣었다. 그리고는 쟁반 위에 같이 놓인 홍차를 마셨다.

"하나면 정이 안 간대요, 한 개만 더 집으세요."

별로 달갑지는 않으나 이번에도 마누라의 강권에 못 이겨 마지못해 두 개 째를 손에 집었다.

밖에서 만날 사람이 있어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졌다.

"인제 나가 봐야겠소. 밥상을 들여요."

사내가 재촉하자 아내는 태연자약,

"지금 잡숫잖았어요, 그게 오늘 우리 아침밥이랍니다."

그러면서 시치미를 떼었다.

"뭐요? 그게 아침이라?"

사내는 그제야 쌀이 없어진 것을 알고, 무안과 미안을 뒤섞어서 마누라에게 한 마디 쏘았다.

"쌀이 없어졌으면 없어졌다고 왜 좀 미리 말을 못하는 거요, 사내 봉변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그 말에 대답이,

"제가 XX장관 조카랍니다. 어디를 가면 쌀 한 가마가 없을라구요. 하지만 허구한 인생에 이런 때도 있어야 늙어서 얘깃거리가 되지요."

웃음을 지으면서 하는 아내의 그 한 마디 말에 내 친구는 대꾸를 잃고 묵연했다. 때마침 그의 처삼촌이 장관이었고, 그 장관에게 다리를 놓아 달라는 청도 몇 차례 없이 들어와서 성화를 겪던 터이다.

그 날로 쌀 한 가마를 주변해서 짐꾼에게 지위 들여가기는 했으나 내 친구는 그런 마누라를 가진 것이 무척 흐뭇했던지, 팔불출이는 자인한다면서 걸핏하면 이 이야기를 남의 앞에서 되씹곤 했다.

놓지 않았던 그 손

'가난'이 갖다 주는 프리미엄--그렇다고는 하나 가난만 하면 그 프리미엄이 절로 따라온다는 것은 아니다 서로 위하고 아끼는 애정의 불씨--그 불씨가 없고서야 어느 아내가 간장 하나로 밥을 먹으면서 '눈물이 나도록 행복'할 것이며, 어떤 사내가 아침 끼니를 삶은 고구마에 홍차 한 잔으로 때우려는 아내를 남의 앞에 치사하고 다닐 것인가--. 귀하고 소중한 것은 가난 그것이 아니요, 제아무리 염라대왕 같은 가난의 위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시들이 않는 '진실의 애정' 그것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가난한 내외간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사내는 등산을 좋아했고, 책읽기를 좋아했다. 쉬는 날은 젊은 아내를 데리고, 자그마한 륙색을 어깨에 메고는 일쑤 산을 잘 찾아다녔다.

몇 가지 일에 실패를 겪고 나서 사내는 사과 장사를 시작했다. 과일 시장에서 사과를 사들여 트럭으로 춘천까지 실어 가서 거기 장사꾼에게 넘기면 수송 운임을 제하고도 얼마만큼은 이윤이 생겼다. 제날로는 못 와도 춘천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은 아내가 기다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남의 곁방 하나를 사글세로 빌려서 장모와 같이 사는 세 식구 살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사과를 싣고 춘천으로 떠난 뒤 사흘이 가고 나흘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닷새째 되는 날 아내는 집을 나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젊은 년이 사내를 못 잊어한다고 혹시나 그런 소리를 들을 것 같아, 친정어머니에게는 가까운 시골에 사는 동무의 병문안을 빙자했다.

"춘천에만 닿으면 자연 만나지려니 했지요. 춘천을 손바닥만 하게 알았던가 봐요. 정거장에 내렸더니 읍내까지가 왜 그렇게 멉니까.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릅니다마는, 그 날 밤으로 춘천에 있는 여관이란 여관은 모조리 찾아다녔지요.

그런데도 그이는 아무 여관에도 없어요.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 이튿날 아침, 그이의 친한 분이 도청에 있다는 생각이 나서 거기를 찾아가느라고 나선 길에, 행여나 해서 정거장에를 가 보았지요."

그랬더니 차표를 사려고 줄을 지은 행렬의 맨 앞에 그 남편이 서 있었더란 것이다. 아내는 반가움, 그리움에 가슴이 뛰면서도, 입으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남편 곁으로 가서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두 내외의 눈이 서로 마주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2초나 3초밖에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이, 아내에게는 몹시도 길고 지루했을 것만 같다.

춘천서 서울까지 서너 시간이나 달리는 그 거리를 남편은 아내 손을 꼭 쥔 채 찻간에서 한 번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닷새째가 되도록 남편이 돌아가니 못한 사연--춘천으로 올 때 중도에서 태워 달라는 사람들을 트럭에 올렸더니, 인원이 좀 많았던지 가마니에 넣었던 사과들이 사람 무게에 눌려서 서의 모두 껍질이 상해 버려 옳은 값으로 흥정이 되지 않았다. 밑지고 돌아갈 수는 없는 사정이라 장터에 임시로 자리 하나를 빌려 낱개로 소매를 하느라고 꼬박 나흘이 걸렸다.

아내가 기다릴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 당시는 전보도 옳게 제 구실을 못하던 시절이다.

남편이 유숙한 곳은 친구네 집이었다. 여관을 주름잡아서 필경 찾지 못했던 이유가 밝혀졌다. 그러나 그런 주석이나 해명은 지금 쓰는 이 이야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춘천서 서울까지 서로 말이 없이 찻간에 실려 오면서 아내의 손을 쥔 채 그 손을 놓지 않았다는 지아비. 남편에게 손 하나를 맡긴 채, 행복에 젖어 그저 황홀했던 그 날의 그 아내. 이런 행복은 어느 장관 댁이나 고루 거각의 부잣집에서는 좀처럼 못 찾아보는 행복이다. 그러나 그런 행복론보다도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따로 있다.

 

간직한 행복의 실태

사과 장사에서 몇 해나 지났는지--그 새 어린것이 강보에 싸인 갓난애까지 셋이나 생겼다.

서울서 백여 리 떨어진 시골 농촌에서 돼지를 기르고 닭을 치고 하면서 영영 자립하던 그들의 단란한 가정이 하루아침에 산산이 부서졌다.

6.25사변에 한 마을 청년 네다섯과 같이 끌려 나간 채 1주일이 지나도록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수소문으로 30리 밖 재 너머 언덕으로 찾아간 아내는 거기 총알에 꿰뚫려 쓰러진 송장 속에서 남편의 시체를 찾아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추기로 들면 한이 없다. 6.25의 피비린 희생이 어찌 이 한 가정뿐이랴. 여기서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 두 번 다시 그들 가족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그 사실만을 적어 두기로 한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 막다른 외길, 그것이 '죽음'이다.

사람들은 이별을 슬퍼하고 죽음을 슬퍼한다. 과연 죽음이란, 이별이란 그렇게 슬퍼만 해야 하는 것일까?

슬픔, 눈물, 그런 불행의 저쪽에 행복이란 것이 있다. 도대체 행복이란 어떤 것이며 무엇을 가리킨 것일까? 거기에 대한 대답을 뚜렷이 내세운 사람은 아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행복이란 객관의 눈으로는 헤아릴 수도, 잴 수도 없다는 것--제각기 제 주관 속에만 간직할 수 있는 것 그것이다.

천하가 다 내 것이면 행복할까? 전 세계의 미남 미녀를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면 행복할까?

호화찬란한 성찬보다도 주릴 때 먹는 보리밥 한 술--행복이란 어디까지나 내용의 문제요, 분량으로 판단할 것은 아닌 것 같다.

R씨의 초대로 저녁 대접을 받은 자리에서 R씨가 자기와는 친한 어느 부인네 한 분에게 물었다.

"부인은 지금까지 겪어 온 중에서 어떤 때가 제일 행복했나요? 가장 행복이라고 생각되던 일이 뭔가요?"

동석했던 그 부인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어 한 말이 '서울 닿기까지 한 번도 놓지 않았던 남편의 손--' 그 이야기였다.

세 아이가 다 자라서 그 중 둘은 벌써 대학생이라고 한다. 거기까지 길러내면서 걸어 온 고생길.

어느 때는 길거리에 앉아서 떡 장사도 했고, 시골을 찾아다니면서 옷가지와 양곡을 바꾸는 행상꾼 노릇이며 나중에 좀 자리가 잡힌 뒤에는 동대문 시장에 가게를 갖고 헌옷 장사를 하다가 믿었던 여자 친구에게 푼푼이 모은 돈을 떼어도 보았고--. 자식 셋에다 사는 보람을 걸고 격류를 거슬러 살아 온 그 고초 속에서도, 때로는 즐거운 일, 행복으로 느껴질 일도 전혀 없지는 않았으리라. 그런데도 한 여인의 가슴 속에 그 날 그 찻간에서 느꼈던 행복만이 오직 하나 간직한 행복의 실체였다는 사실--무슨 외국 영화의 한 토막 같은 그 날의 그 장면을 마음속으로 새기면서 나는 또 하나 딴 생각에 잠겼다.

--만일에 그 남편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더라면 그 날의 그 '행복'이 과연 지금까지 자리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을까? 젊어서는 그런 일도 있었더니라는 한낱 낡은 앨범의 한 장으로 그쳐 버리고 말지 않았을까?

만인이 슬퍼하는 죽음--그 죽음으로 해서 경화되는 사모가 있고, 퇴색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면 '죽음'을 어찌 슬프다고만 할 것인가--. 죽음이 가져오는 손실보다는 죽지 않고 삶으로 해서 결과하는 상실이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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