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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선의의 불씨 / 김소운

부흐고비 2021. 3. 23. 04:09

또 하나의 눈

--어제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대문 시장에 들렀지요. 이것저것 사다 보니 자질구레한 종이 뭉치가 대여섯 개나 됐나 봐요. 그걸 양쪽 손에 다 들고 오느라니까, 시장 안에서 신문을 파는 앉은뱅이 청년이 있잖아요. 스무남은 살이나 됐을까요. 팔에다 무슨 보급원인가--그런 완장을 둘렀어요. 그런데도 불구자 같은 궁기가 없고 퍽이나 명랑해요, 얼굴 표정이--. 밖에서 별로 신문 같은 것 산 일은 없었지만 그냥 지나가기가 무엇해서 10원을 꺼내서 신문을 샀지요. 두 장인지 석 장인지 주는 대로 받아서 그걸 또 짐 가진 손에다 구겨 쥐고--그리고 몇 걸음 가자, 뒤에서 '아주머니!' 하고 누가 불러요. 딴 사람을 불렀거니 하면서도 짐짓 돌아다보았지요. 그랬더니 가게 앞에 웬 중년 남자가 서서--그 가게 주인인가 봐요, 아주 심상한 얼굴로 '그거 이리 내세요.'하고 손을 내밀잖아요. 돈을 다 치렀는데 어째서 달래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내라니까 무심결에 내주었지요, 그 가게에서 산 건 아니지만... 그걸 받더니 남자는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봉지에다 그 작은 종이 뭉치들을 하나하나 넣어 주지 않겠어요. 그런 호의를 모르고 하도 무뚝뚝하게 내놓으라기에 물건 산 걸 보자는 줄로만 알았지요...

"미안해서 어떡하나..."

제가 그러니까 남자는 딴 말은 없고,

"아주머니, 저 애한테서 신문 사셨지요?"

신문 사는 걸 아마 보고 있었던가 봐요--그게 무슨 고맙다는 인사같이 들리더구먼요...

별 대단한 일도 아닌데 돌아오는 발걸음이 왜 그렇게 가벼운지...무슨 좋은 수나 난 것 같아 괜히 가슴이 부듯하더구먼요...

아는 이를 만나 거리에서 차 한 잔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일행 중 부인네 한 분이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도 곁에서 듣는 나까지 무언지 마음이 흐뭇했다.

거추장스런 종이 뭉치들을 한데다 넣어 주었다는 그런 단순한 얘기는 아니다. 그만한 친절도 요즘 우리네 생활에서는 보기 힘 드는 일이지마는 이 얘기에는 또 하나 울려오는 다른 여운이 있다.

육체의 불행을 짊어지고도 제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를 쓰는 불구의 청년--그 청년에게서 신문을 샀다는 그야말로 겨자씨 한 알만한 작은 선의를 고마운 일로 알고 치사하는 또 하나 다른 '선의'의 눈--, 가게 주인의 그 무뚝뚝한 친절은 그 치사의 소박한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동상이 세워질 커다란 공로도 아니요, 무슨 상이나 표창을 받도록 의젓한 미담도 아니다. 그러나 생각하고 보면, 이 작은 '불씨'--평범하고도 소박한 '인간의 선의',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생활에서 제일 아쉬운 주림일지도 모른다.

연잎에 괸 이슬

 

아쉬움이라니 바로 며칠 전에 본 영화의 장면 하나가 생각난다. 극영화는 아니고, 어느 먼 나라의 생활의 실경을 찍은 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 지방이라 물이 몹시 귀하다. 흘러가는 시내도 없고, 우물을 판다고 해서 물이 솟아나지도 않는다. 여인들은 첫새벽에 먼 길을 떠나서 연 잎사귀에 괸 이슬을 찾아다닌다. 하얀 구슬처럼 연잎 위를 구르는 이슬 방울--그것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그릇이 옮긴다.

생명에 바로 직결되는 의미로는 어떤 보석, 어떤 구슬보다도 더 귀하고 소중한 이슬방울을--그것이 하나하나 모여서, 나중에는 제법 물소리를 내면서 쏴 하고 커다란 물독에 부어진다.

아쉬움을 두고 또 하나 연상되는 것은, 30여 년 전 일본서 본 "아랑"이란 스웨덴 영화이다.

흙이라고는 한 줌이 없는--바윗돌뿐이 절해고도--거기 젊은 어부 내외가 산다(십수 년 전에 두 번 가 본 독도가 꼭 이런 섬이었다.).

거기서도 씨를 뿌리고, 곡식이 자란다. 흙 없이 어떻게 씨가 뿌려지나?

사람의 팔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바위 틈--그 밑바닥에 풍화 작용으로 깎여진 바윗돌의 부스러기가 깔려 있다. 한쪽 손을 뻗을 대로 뻗어서 바위틈에서 수백 년, 수천 년 쌓였던 그 돌 부스러기를 손으로 긁어 올린다--연 잎사귀에 괸 이슬방울을 모으는--바로 그 정성, 그 노력이다.

해초를 평범한 바위 위에 깔고, 그 위에다 긁어 올린 돌 부스러기를 덮는다. 이것이 그들의 '밭'이다. 이 '밭'에 해가 쬐고 비가 내려서, 뿌린 씨에 싹이 트고 나중에는 곡식이 맺는다. 시간의 경과를 압축한 화면만으로는, 마치 무슨 마술의 무리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러나 마술도 기적도 아닌, 이것은 인간 생활의 냉엄한 현실의 단면이다.

조상이 마련해 준 이 땅, 여기는 물도 흙도 풍성하다. '풍성'이란 말이 우스울 정도로 우리는 그런 구애를 모르고 살아 왔다. 풍화암 부스러기를 긁어 올릴 필요도 없고 연잎에 괸 아침 이슬을 모을 필요도 없다. 하물며 편편옥토, 하물며 옥수 같은 물맛, 문화, 예술의 메카라는 프랑스에도 이런 물은 없다.

그러나 '물'이니 '흙'이니를 예찬하려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주림, 메마르고 거친 생활 감정으로 따진다면, 오늘날의 우리처럼 가난한 백성도 아마 드물리라. 연 잎사귀의 이슬을 모으는--바위틈에서 돌 부스러기를 긁어 올리는 그런 생활을 내려다보고 동정할 주제가 과연 우리에게 있다고 할 것인가?

다만 그들과 다른 것은, 우리의 아쉬움이, '흙'이 아니요, '물'이 아니라는 그것뿐이다.

마음의 주림

 

시골서 서울로 와서 벌써 1년 넘어 여관살이를 하는 P군의 이야기다. 무슨 사연인지 이집 저집 여관으로 굴러다니는 P군의 신세도 처량하거니와 P군이 들려 준 이 얘기도 그지없이 처량하다.

찾아드는 손님의 반수 이상이 값을 깎거나 시계, 만년필 등속을 잡히고 간다(P군이 묵는 이 여관은, 도심 지대의 소위 일류 축에는 못 가도 서울서는 그래도 표준 클래스는 된다는 얘기다.).

방마다 하나씩 걸어 두는 거울--백 원도 못 가는 그 거울이 없어지는 것은 보통 일이다. 물주전자에 하나 가득 오줌을 채워 두고 사는 손님도 있다.

저 혼자가 여관 하나를 독차지나 한 것처럼 밤중 한 시 두 시까지 떠들어대는 손님, 통금 시간에도 절제를 받지 않는 특권 계급(?)들이 밤중에 와서 여자를 데려오라고 호통을 칠 때는 으레 전치사가 있다. '우린 직무상 그래도 좋게 돼 있단 말야!' 그것을 증명이나 하려는 건지 이런 '손님'들은 걸핏하면 순경을 불러오라고 호령이다(이런 것들을 손님이라 '님'자를 붙여서 부르기는 좀 곤란하지마는--하는 것이 P군의 어투다.).

사흘들이 임검이란 명목으로 단골 순경들이 찾아온다. 이럴 때 주인 마나님이 살며시 쥐어 주는 지폐도 정찰제마냥 액수가 마련되어 있다.

관내의 어느 순경이 장가는 간다, 어느 형사의 장인 회갑이다, 그런 길사 때면 으레 '청첩장'이 온다. 서원의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시골 사돈댁에 상사가 생겨도 등사판으로 찍은 부고가 돌려진다. 이런 종잇장을 쉽사리 알고 괄시했다가는 결과적으로 몇 갑절 더 부가세가 딸려 오기 마련이다.

소방서원도 소화기 비치를 빙자로 번번이 얼굴을 내민다. 물론 그런 '손님'들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법은 없다.

P군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정신이 황홀할 지경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화든 사실--십수 년 만에 제 나라로 돌아온 나 같은 숙맥이나 아니고는 이런 정도의 얘기에 놀라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인정이 서울보다야 순박하려니 했던 시골살이도, 듣고 보면 서울 뺨칠 정도로 대단하다는 얘기다. 버스 칸에서 조사를 한다는 젊은 군인들의 그 등등한 기세--쥐꼬리 같은 권력이자 직무를 앞장세워서 설치고 덤비는 우물 안 개구리들의 그 안하무인의 행패를 두고는, 낚시터를 찾아서 자주 원행을 하는 P씨며 H교수들이 입담 섞어서 진담, 기담들을 수두룩이 들려주었다.

20원 염세론

일본 서적을 전문으로 하는 책 가게들--수천만 원의 자본을 들인 대서점에서 명동 뒷골목 노점 책장수까지, 서울 거리만 새도 이런 책가게가 자그마치 4, 50집은 더 될 것 같다.

그런 노점 가게에서 일본 잡지 값을 물어 본다. 5, 6개원 지난 헌 부인 잡지다.

'2백 원입니다.' 혹은 '2백 50원입니다.' 거침없이 부르는 그 '값'은 그 책에 찍혀 있는 정가 그대로이다. 일화와 우리돈의 환산율로 따지고 보면 30~40프로, 정가보다 더 비싼 계산이다.

일본서는 5, 6개월 지난 잡지는 쓰레기다. 10원 균일로 고책상 가게 앞에 무더기로 쌓여 있어도 사 갈 사람이 없다.

그 '쓰레기'가 이 나라에서 보배 취급이요, 한두 달 전에 나온 새것이면 정가의 3, 4배--. 우리들의 주림과 가난함이 이러하다.

하필이면 이런 얘기가 아니라도 오늘날의 우리들의 빈곤을, 마음의 굶주림을 진단할 카르테는 얼마든지 있다. 10분만 거리를 거닐어도--버스나 합승을 한 번만 타도--.

어느 날, 밤늦게 돌아오던 D여사는 종점 하나 앞에서 내려야 할 것을, 연일의 과로로 버스 안에서 졸다가 종점까지 와 버렸다. 같은 버스로 한 정류장 되돌아가면 될 것이나 2, 3분만이라도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침 종점에서 떠나 나오려던 다른 버스에 바꿔 탔다. D여사가 이제 막 닿은 버스에서 내린 것을 새로 떠나는 버스 차장도 보고 있었다.

D여사가 한 정류장을 되돌아와서 "미안해--" 하고 내리려 하자, 차장이 "요금은요? 한다. 되돌아온 것을 아는 차장이 한 정류소 사이에 요금을 달랄 줄은 D여사도 미처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금시 거기서 내렸던 걸 차장도 보았잖니?"

D여사가 그러자,

"봤지만, 이 차가 아니잖아요! 남의 차로 지나갔거나 말았거나 내가 알게 뭐예요!"

눈을 흘기면서 쏘아붙이는 차장 아가씨의 서슬에 D여사는 두말없이 20원을 내주고 버스를 내렸다.

며칠 후에 나를 만났을 때 D여사는 그 날 얘기를 하면서 이런 나라에 살아 있는 것이 진정 싫어졌다고 한숨 반, 웃음 반으로 하소연을 했다. 나와는 오랜 친구인 D여사 부처는, 나와 마찬가지로 외지 생활에서 여러 해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분들이다. 고국이 그리워서 굶어도 내 나라에서 굶겠다고 남편을 설득해서 돌아온 D여사이고 보니 '20원'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는 그분의 심정은 알고도 남음이 있다.

패전직후의 일본에서는 메틸알코올을 탄 값싼 술로 해서 실명을 하고, 때로는 한잔 술에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었다. 한잔 술에 섞인 메틸의 분량이 인명을 앗아가도록 대단한 독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조금씩 쌓이고 차차로 축적된 독성이 최후의 한 잔으로 그 한계를 넘어 버릴 때 '사고'가 일어난다.

'20원 염세론'의 D여사의 경우가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대수롭지 않은 작은 이화감, 작은 감정의 축적이 마침내는 조약돌 하나의 차질에도 이겨 내지 못하게 된다.

D여사 같은 이는 이 사회의 부적격자이다. 쇠가죽처럼 질기고 툭툭한 정신이 아니고는 이 나라에서는 살아가지 못한다.

버스 차장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상냥하고 착한 차장 소녀들을 나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퉁명스럽고 미련한 '메틸알코올'식 차장이 절대 다수란 것도 사실이다.

어둡고 침침한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의 '마음의 주림'을 설명하기로는 이런 이야기들은 백분의 1, 천분의 1의 샘플 축에도 못 간다.

5, 6만 대의 자동차가 달리는, 20여 층의 호텔이 세워진다는 서울의, 가난하고 초라함이 이러하다. '물'이 있다고 해서, '흙'이 있다고 해서 우리의 '주림'이 메워지지는 않는다. 연잎의 이슬로 목을 축이는--해초 위에 돌 부스러기를 덮어서 곡식을 가꾸는 그 아쉬운 생활자들이 어느 의미로는 우리보다 백 배는 더 부자일지도 모른다.

어질고 너그러운 겨레의 피

앉은뱅이 청년에게서 신문을 산 부인네의 '가슴이 뿌듯했다'는 그 행복감--,

20원으로 살맛을 잃었다는 D여사의 비애--.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먼데도, 하나 공통된 것은 둘 다 지극히 작은 불씨에서 기쁨이, 슬픔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남의 가슴에 기쁨을 심어 주는 것이 '선의의 불씨'라면, 절망과 비애에 연하는 또 하나의 '불씨'도 그 위력은 결코 그만 못지않다. 성냥개비 한 개로도 도시 하나를 불태울 수 있는, 그것이 '불씨'의 작용이다.

6.25직후 한강 가에 물밀듯 피난민들이 밀려들었을 때, 서로 먼저 건너려고 자전 뭉치를 손에 쥐고 뱃가에서 사람들이 붐벼대는 그 수라장에서, 웬 노인 사공 하나가 '선가 없는 사람은 이리로 오시오.'하고 배 한 척으로 진종일 사람을 실이 나르면서 일체 돈을 받지 않더란 이야기를, 바로 그 당시, 그 배로 한강을 건넌 이에게서 들었다. 어떤 사람이 돈 뭉치를 그 사공 앞에 내밀면서,

"이걸로 먼저 우리 식구를 실어 주시오."

하자, 노사공은 '돈?' 하고,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여전히 선가 없는 사람들만 골라서 태우더란 얘기다.

불씨 하나에 겨누기로는 너무나 황송하고 우러러보이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겨레의 혈관 속에 흐르는 어질고 너그러운 피가 어찌 이 날의 이 노사공 하나의 것이라고 단정하랴.

'--구름장이 제아무리 두꺼워도 해를 잃어버렸다고는 행여 생각지 맙시다. 두꺼운 구름장을 헤치고 해는 또다시 나타납니다.'

오랜 친구인 D여사 내외분에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이다. 설령 그 햇빛을 눈으로는 못 본다 하더라도 그 날을 믿어야 한다고--. 그리고 또 하나, 반딧불 같은 작은 '불씨'--겨레의 혈관 속에서 다시 깨어날 '선의의 불씨'를 우리는 믿고 살자고--.

행복이란, 목마를 때 마시는 물 한 그릇--아랍과 이스라엘이 겪은 이번 전쟁에서 생채기 하나 없는 수많은 병사들의 시체가 이스라엘 사막 지대에서 발견됐다는 얘기를 신문에서 읽었다. 물이 없어서 말라 죽은 희생자들이라고 한다.

이것은 지나친 극단의 예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마음의 '굶주림' '목마름'에도 아쉽고 긴한 것은 마실 수 있는 물 한 그릇--선의의 불씨 하나--그것이다.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보람 있게 살 수 있고, 그것이 없을 때 절망의 구름장이 우리들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행복의 '파랑새'는 바로 제 눈앞에 있었다는 메테를링크의 찌루찌루 미찌루 이야기--우리가 찾는 '행복의 불씨'도 그다지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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