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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막잠 / 류영택

부흐고비 2024. 5. 5. 03:06

잠실(蠶室)안은 적막하기만 했다. 누에가 잠에 빠져 있었다. 마지막 탈피(脫皮)였다. 무상에 빠진 듯 상체를 치켜세운 채 잠든 누에의 모습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의 서러움 같았다.

지금은 일부러 구경을 하려 해도 누에치는 것을 보기 힘들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누에를 치는 집이 많았다. 누에는 봄과 가을, 춘잠(春蠶)과 추잠(秋蠶) 두 번을 칠 수가 있다. 밭농사보다 고생은 될지 몰라도 잘만하면 제법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농사 대신 누에치기를 전업으로 하는 농가도 있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야산에 뽕나무를 심고, 잠실을 지어 누에를 쳤다. 하지만 대개의 가정에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밭둑에 심어놓은 뽕나무로는 반장 정도의 누에를 치는 게 고작이었다. (누에알 한 장을 치면 고치가 대개 10-13말이 나옴)

아버지는 콩을 심어왔던 밭에 뽕나무를 심었다. 몇 년이 지나자 꼬챙이를 꽂아놓은 것처럼 앙상했던 뽕나무에 잎이 나고 가지도 뻗어 나왔다. 얼마나 잘 자라는지 내 허리 정도밖에 오지 않았던 나무가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정도였다. 후년부터는 누에를 쳐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들고 온 누에 통을 보고는 ‘한 장 반도 버거울 텐데.’ 우리 집 뽕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버지의 손에는 통이 두 개나 들려있었다. 나는 누에를 치는 게 얼마나 힘이 더는 일인 줄도 모르고 마냥 좋아했다.

나는 마루에 올려놓은 누에알이 들어 있는 통을 흔들어보았다. 싸락싸락, 마치 걸음을 걸을 때 주머니에 넣어둔 하얀 은단(銀丹)이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소리 같았다. 이 작은 것이 어떻게 뽕잎을 먹으며,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저러실까? 슬그머니 제자리에 통을 놓아둔 채 두 분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는 낭패한 표정으로 축담에 서 계셨고, 어머니는 방문 쪽을 향해 돌아앉아 있었다.

누에의 알은 너무나 작았다. 들깨 씨만 한 크기에 보랏빛이 감도는 검은색이었다. 따듯한 방에 며칠을 놓아두자 색이 파랗게 변하는가 싶더니 꼬물꼬물 알이 움직였다. 어머니는 도마에 뽕잎을 얹어놓고 고명을 쓸 때처럼 촘촘히 칼질을 했다. 나는 방바닥에 배를 붙인 채 뽕잎을 먹는 누에를 유심히 바라봤다. 오물오물 뽕잎을 갉아먹는 것 같기는 한데,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숭숭 털이 돋아난 어린누에들이 몸짓을 할 때마다 채에 뿌려놓은 뽕잎이 마치 발간 불꽃을 머금은 채 타들어가는 창호지처럼 그저 사그라질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애벌레는 꼼짝도 않았다. 야금야금 갉아먹던 뽕잎도 그대로였다. 죽은 건가? 나는 영문을 몰라 애벌레와 어머니를 번갈아 바라봤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누에는 잠을 자야 큰다고 하셨다.

갓 깨어난 애기누에 때는 쟁반만한 작은 체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잠에서 깨어난 누에는 몰라보게 몸집을 커져있었다. 이젠 대나무를 엮어 만든 잠박이로 옮겨야 했다. 한잠, 두잠 시간이 지날수록 층층마다 잠박이가 늘어났다. 덩달아 누에에게 먹일 뽕잎도 더 많이 필요했다. 처음은 종다래끼, 다래끼, 그 다음엔 커다란 소쿠리에 담아다 날랐다.

누에는 애민한 벌레다. 싱싱한 뽕잎만 따다 먹인다고 무럭무럭 자라는 게 아니다. 누에를 치면 이것저것 가릴 게 많다. 흔히들 임도 보고 뽕도 딴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거진 뽕밭을 보며 에로영화 '뽕'을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누에를 치는 사람, 뽕잎을 따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산삼을 캐는 심마니나, 백사나 흑사를 잡으러 다니는 땅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부간에 잠자리를 피할 정도는 아니지만, 부정(不貞) 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예부터 사람들은 누에를 영물이라 생각했다. 행여 부정(不淨)을 타지나 않을까 늘 노심초사한다. 웬만해서는 궂은일에는 가지 않는다. 어쩌다 초상집을 갔다 오거나 밭에 농약이라도 치는 날엔 깨끗이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잠실에 들어간다. 어험, 그 안에서는 큰 소리로 말을 해서도 안 되며, 담배를 피워서도 안 된다. 마음가짐만 중요한 게 아니다. 잠실에는 파리 한 마리도 얼씬거려서는 안 된다. 잠박이에 종이를 깔아 누에의 배설물과 먹다 남긴 뽕잎을 수거해서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 특히 몸집이 커다란 쇠파리가 잠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쇠파리에 공격을 당한 누에는 몸집이 꺼멓게 변하면서 죽고 만다.

마지막 잠을 자고 난 눈에가 몸을 흔들었다. 먹을 것을 달라는 몸짓이었다. 여태까지 잘 해왔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잘 먹여야 덩치가 커진다. 덩치가 큰 만큼 누에고치도 크고 빛깔도 선명하다. 이때는 먹는 게 한정이 없다. 주면 주는 대로 다 먹어 치운다. 얼마나 잘 먹는지 뽕잎을 갉아 먹는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쏴' 폭포물이 흐르는 계곡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다.

엄청난 양을 먹어 치우다 보니 누에에게 먹일 뽕이 충분치가 않았다.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도 밭에 심어놓은 뽕나무보다 누에를 많이 쳤다. 운 좋게 뽕나무는 있으나 누에를 치지 않는 집이 있으면 그것을 얻어다 먹일 수도 있겠지만, 일이 여의치가 않았다. 그럴수록 밭에 남은 뽕잎은 비상식량으로 끝까지 아껴둬야만 했다. 아! 그래서 등을 돌리고 앉아계셨구나. 나는 그제야 어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누에를 치는 일은 오롯이 어머니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어머니는 산뽕나무를 찾느라 온 산을 헤매야 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수레를 끌고 어머니 마중을 갔다. 누가 시켜서 가는 것은 아니지만 마중을 가다 보면, 왜 나만 이래야 되나!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커다란 보따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아롱거려 집에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날은 청소 당번이었다. 나는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지난번처럼 길옆 언덕 위에 뽕잎을 가득 담은 보따리를 올려놓고 머리에 이느라 끙끙대고 있지나 않을까. 그러다 목을 삐끗하기라도 하면……. 자꾸만 마음이 불안해져 왔다.

수레를 끌고 산 아래 도착하자. 대소쿠리를 감싼 광목 보따리만 덩그러니 놓여만 있고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가셨지? 정말 목을 다치신 건 아닌가. 방정맞은 생각이 들자. 나는 금세 사색이 됐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는 뽕잎이 담긴 앞치마를 움켜 진 채 소나무에 기대앉아 있었다. 긴 숨을 내쉬는 어머니의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아마도 잔자갈에 발이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찐 것 같았다. "제가 올 때까지 그냥 기다리지 않고선!" 나는 짜증을 냈다. "손을 놀리고 있으면 써나." 억지웃음을 지으시는 어머니의 입술 사이로 고통을 삭히는 신음소리가 묻어나왔다. 수레를 끌며 뒤를 돌아봤다.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수레를 끌었지만 어머니는 자꾸만 뒤처지기만 했다. 나는 수레를 세우고 어머니를 기다렸다. 많이 편찮으신가? 어머니는 엉덩이를 뒤로 쑥 뺀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보다 목도 뻣뻣해보였다. "엄마, 목을 삐었어요?" 어머니는 애써 목을 꼿꼿이 새우시며 괜찮다고만 하셨다. 아마도 혼자 봇짐을 메려고 용을 써다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나는 걱정이 되어 수레에 오르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셨다.

'막잠' 세월이 많이 흘렸건만, 그 말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아파온다. 상체를 꼿꼿이 새운 채 잠을 자던, 하나같이 같은 자세로 잠을 자는 누에의 모습이 나는 서글펐다. 그것은 뽕잎을 따기 위해 까치발로 목을 치켜들고 있던 여인네들의 모습 같기도 했고, 한번 내려놓으면 다시 머리에 이지 못할 커다란 보따리를 인 어머니의 모습처럼 보였다. 보따리는 수건을 틀어 꼰 똬리를 짓누르고, 이마를 가리고, 눈을 가렸다. 그럴 때마다 턱을 잔뜩 치켜든 채 바쁜 걸음을 내디디시던 어머니의 등은 자꾸만 자꾸만 뒤로 휘어져만 갔다. 뽕을 따던 어머니와 여인들의 모습은……. 막잠을 자고 있던 눈에의 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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