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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400원의 아쉬움 / 양일섶

부흐고비 2021. 3. 29. 09:01

이기대 갈맷길을 산책했다. 작정을 하고 1시간 이상 걸었다.

살랑거리는 마파람에 머리는 시원하지만 목덜미와 등줄기에서는 땀이 계속 흐른다. 내의가 척척하게 젖었다. 눈앞에 보이는 오륙도 등대섬으로 달려가 훌러덩 벗고 다이빙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얀 포말을 시원하게 뿜어내며 달리는 유람선이 부럽다. 얼른 집으로 가서 샤워를 해야겠다.

주차장 한쪽에서 커피향이 날아온다. 힘들거나 피곤할 때 커피를 마시면 활력이 생긴다. 내가 좋아하는 자판기의 밀크커피가 나를 유혹한다. 달곰쌉쌀한 감칠맛은 어떤 커피와도 비교할 수 없고 가격대비 만족도가 높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카푸치노는 아직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

승용차 동전함에서 400원을 끄집어내었다. ‘딸그락 딸그락’ 자판기에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어디선가 길냥이 한 마리가 달려와 자판기 옆에 자리를 잡는다. ‘자석이, 커피 맛을 아는 모양이지.’ 버튼을 힘차게 누르자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램프가 빤작거린다.

커피 맛을 미리 감지한 혓바닥이 입천장을 자극하며 목구멍으로 침을 넘긴다. 길냥이와 눈이 마주쳤다. ‘알았어. 좀 남겨줄게.’라고 말했다. 길냥이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꼬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램프의 불이 꺼졌다. 커피 투출구를 열고 손을 넣었다. ‘어어!’ 종이컵이 없다. 뜨거운 물만 몇 방울 떨어지고 있다. 허리를 숙여 투출구 구석구석을 쳐다본다.

종이컵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닌데. 고장 난 자동차의 보닛을 올려놓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심정이다. 나의 행동을 살피던 길냥이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뽑아?’라고 말하며 비아냥거리는 듯하다. 다리 하나를 들어 얼굴을 비비적거린 후, 하품을 하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갑자기 허전함과 불신감이 몰려왔다. ‘아이고, 이걸 그냥….’ 옛날 같으면 자판기를 발로 한번 차기라도 했겠는데. 지나가는 행락객들이 나를 쳐다보면서 가고 있다.

특별한 하자가 없는 기안문을 상사에게 퇴짜 맞은 기분으로 승용차에 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인다. ‘400원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애써 위안해보지만 기분만 더 나빠진다.

사기당한 기분까지 든다. 지금까지 사기를 많이 당했다. 외판원을 하는 고등학교 후배에게 10만 원을 송금하고 받지 못한 어린이 동화책, 신호에 걸린 승용차 기사에게 싸게 파는 파인애플을 구입해서 집으로 들고 갔다가 마누라에게 욕만 실컷 들었던 생각도 난다. 그것도 지금 400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어디 가서 큰소리 한번 못 치는 소심한 사람이다. 배운 대로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이다. 나는 지금 400원에 온갖 신경을 쓰고 있는 좀생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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