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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생명을 향한 경외감 / 이혜숙

부흐고비 2021. 3. 31. 08:34

나의 문학은 결핍에서 시작했고, 지금도 결핍을 먹고 자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에게 빌릴 동화책이 더 이상 없자 활자에 대한 갈증과 허기 때문에 내게 읽을거리를 주기 위해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 목차를 만들어 몇 편 모아놓은 공책을 보신 선생님이 발표를 시켰다. 매주 한 편씩 동화를 발표할 나만의 시간도 따로 마련해주셨다.

글쓰기는 어떤 것도 대신할 수없는 즐거움이었다. 백지뿐인 공책을 한 줄 한 줄 채우는 동안 조금 전에 없었던 새로운 세계가 그 위에 생겨난다는 것, 그 세계를 움직이고, 한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내가 결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한 편의 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도 매혹적이지 않은가. 공부도 못하고 소심해서 교실에 있는 줄도 몰랐던 아이가 반장보다 더 많이 칭찬을 받게 되자 글이 ‘힘’이 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러나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억지로 지어낸 글은 14편을 끝으로, 글쓰기의 두려움과 괴로움을 동시에 알게 했으며 힘은 매혹이 아니라 짐이라는 것을 알게 했다. 그 후로 나는 다시 보이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비록 문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어린아이의 글짓기에 불과하지만, 그 경험은 무의식의 바닥에 깔려 여전히 나를 가르친다.

글감을 찾는다는 행위는 결핍을 채우려는 것이고, 어떤 글도 상상의 바탕 없이 써지지 않는다는 것과 글감을 발견하고 주제를 정했을 때의 즐거움 끝에는 반드시 쓰는 동안의 두려움과 책임감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이 그때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 글이 아니라 억지로 만든 글은 작가보다 독자가 먼저 알아본다는 사실이다.

내겐 글을 어떻게 쓰느냐의 구성과 문장력의 문제보다, 무엇에 대해 쓰느냐가 우선의 화두다.

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잘 쓰지 않는다. 등단 전, 오래 전에 겪은 이모의 죽음을 소재로 쓴 기억 때문이다. 바닷가에 앉아 아이들 노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외딴집에서 폐를 앓다가 자살한 이모를 생각하며 쓴 글이었다. 바다를 본 적이 없는 이모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그 앞에서 응어리진 마음을 실컷 토해내고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는데 심사를 하신 분의 눈에는 ‘남의 불행을 통해 나의 행복을 확인하는’글로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변명한다 해도 읽는 사람에게 전달된 것이 그렇다면 그 속엔 불순한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백일장에서 입상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한 사람의 죽음을 쉽게 소재로 다루었던 것이 지금도 부끄럽게 남아 있다.

이모에 대한 그리움과 진실을 찾기 위해서 그 후로도 몇 번이고 다시 써보았다. 한 사람을 생각하며 쓴 글이 20년 가까이 걸렸다. 마지막에 내가 깨달은 것은, 죽은 이를 단지 죽음으로만 보았던 내 눈이다. 그도 글 속에서는 나처럼 살아 있는 감정을 지닌 사람으로 만나 서로 통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시신을 원고지 위에 올려놓고 연민을 느끼는 것처럼 연기한 글을 썼다는 자각과 함께, 함부로 사람에 관한 글은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행복하든 불행하든, 한 사람이 겪으며 책임져야 할 생의 그림을 그 사람의 마음이 되지 않고서 쓰는 글이 과연 진실할 수 있는지 두렵기 때문이다.

상처가 두려운 나는 자연이나 사물에 말 거는 것이 더 편안하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혼자 다니며 중얼거리는 것이 내 사는 모습이다.

메모를 잘 하지 않는 것도 그런 버릇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라면 메모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메모했다가 나중에 참고를 하려면 처음에 느꼈던 필요와 감정을 되살리지 못하는 흠이 있다. 메모한 것을 나중에 보면 빛나던 보석은 굴러다는 돌로 변해 있거나 유효 지난 복권처럼 소용 없어진 경험을 많이 했다. 영감은 오래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메모 대신 바로 쓰는 편이다.

번번이 떠오르는 대로 써서 완성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게 안 되니까 글감이 떠오르면 그때부터 모든 생각을 문장으로 한다. 첫 문장이든 끝 문장이든 떠오르는 대로 자꾸 주어와 서술어를 연결해서 중얼거린다. 그때는 일상사도 다 문장으로 풀어간다. 두서없이 하는 혼잣말 중에는 활자가 되는 것보다 버려지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꼭 남을 것은 체에 걸러진다는 것이 메모 대신 택한 나의 방식이다.

오래 마음에 두고 말을 걸었던 주제를 옮길 때는 구성이나 퇴고에 많은 시간을 쓰지 않는다. 쓰면서 구성하고, 쓰는 중간에 되풀이 읽으면서 정리한다. 다 쓴 글을 몇 번 거듭해 읽다가 다섯 번을 읽기가 지루하면 ‘죽은 글’쪽에 분류하고 열 번 이상 읽어지면, ‘숨이 붙은 글’로 분류한다. 가족과 주변 사람에게 보였을 때, 무슨 뜻이냐고 묻는 글도 역시 ‘죽은 글’로 치운다. 설명해야 하는 글은 아무리 열심히 썼어도 잘 쓴 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컴퓨터에는 무수한 무덤과 인큐베이터만 있을 뿐, 건강한 신생아실이 없으니 딱한 노릇이다.

글쓰기가 출산 같은 것이라면, 글쓰기의 즐거움은 임신 기간뿐이다. 글감과 주제가 떠올랐을 때,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로 아이용품을 장만하듯 준비하는 기간은 축복 같은 정점이지만, 백지를 앞에 두었을 때는 출산의 고통과 두려움에 숨이 막히지 않는가. 사산과 미숙아의 절망은 말해 무엇 하랴.

그런데도 번번이 출산의 고통을 잊고 또 임신을 하는 여자처럼 다시 글을 잉태하고 싶어한다.

부모가 자식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잊지 못하며 사는 세월처럼, 마음에 차지 않아 버린 글이 만족해서 끝낸 글보다 더 마음을 붙잡는다. 거두지 못한 후회는 쓰리고 자책과 미련으로 남는다. 한 사람에 대한 글을 몇 번씩, 20년 동안 썼던 것도 내 의지보다는 미완으로 버려진 글 쪽에서 보내는 신호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죽은 글의 무덤도 보듬어주어야 하고 인큐베이터 안의 생명도 돌보아야 하니 포기할 수도 없다. 어떤 경우든 생명을 향한 경외심은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방향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받기 위해 주파수를 맞추고 안테나를 길게 뽑는 것, 남에게는 무위로 보일 시간도 조바심과 간장 속에 보내는 것, 짧은 만족보다 더 큰 절망으로 자신을 확인하면서도 버릴 수 없는 것.

생명의 신비와 소멸의 덧없음을 향한 외로운 노래지만, 그 아름다운 유혹이 나를 살게 하고 글을 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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