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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인생의 캔버스 / 박연구

부흐고비 2021. 3. 30. 15:17

자습이라는 것도 학습 방법 중의 하나다. 그런데 나는 모 신문사 문화센터* '수필반'을 지도하고 있은 지가 5년이 넘었으면서도 자습 한번 시키지 않았다. 자습은 선생의 무성의한 수업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수강 기간은 3개월 단위로 바뀌었다. 하지만 대개의 수강자들은 계속해서 수강하는 형편인지라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수도 있어서 미안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그래서 수강 기간이 바뀔 때마다 이번엔 새 얼굴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가 관심거리이기도 하다.

겨울 강좌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수필반 강의실에 들어서자 못 보던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반가웠다. 오늘은 전에 했던 얘기를 해도 처음 듣게 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대로 강의를 괜찮게 해낼 수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역시 새로 등록한 '학생'들도 다 여자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은 미국에서 살다가 돌아온 지 며칠 안 되었다는 것이다. 7년 전에 이미 내 책을 읽은 적이 있다지 않은가. 또 한 사람의 애독자를 사제의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으니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은 것은 두 말이 필요치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분 동안만 자습을 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나는 강의실 밖으로 발길을 옮겼다. 휴게실에 설치된 텔레비전 수상기에서 '레너드―두란 세 번째 맞수 대결'을 중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세기 최고의 '천재 주먹' 슈거레이 레너드(33. 미국)와 '돌주먹' 로베르토 두란(38. 파나마)이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맞수 대결을 벌인다."

조간신문에 난 기사의 한 대문이다.

나는 텔레비전을 잘 안 보는 편이지만, 권투 중계만은 만사 제쳐놓고 시청을 한다. 그런 내가 어찌 금세기 최고 주먹의 대결이라는 권투 중계를 안 보고 넘어가겠는가. 오픈 게임부터 보기는 했지만 관심은 메인 게임에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문화센터 강의 시간 때문에 보던 것을 중단하고 집을 나섰던 것이다.

우리 집에서처럼 소리 지르면서 보지는 않았지만, 내 옆의 중년 남자는 레너드가 미스 블로한 것을 두고 매우 안타까워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도 레너드 편이어서 중년 남자에게 호감이 가기도 했다. 두 사람은 텔레비전 수상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관전을 했다.

10분이 금방 지나가 버렸다. 시간이 살같이 빠르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였다. 나는 발이 떨어지지를 않았지만 다시 강의실로 들어섰다. 수강생들은 일제히 웃었다. 권투라는 과격한 게임과 아무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뒤따라서 한 중년 남자가 강의실 문을 열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서고 있지를 않겠는가. 조금 전 텔레비전 권투 중계를 같이 보았던 사람이다. 오늘 수필반에 등록하고 수필 강의를 들으러 왔다는 것이다. 어쨌든 '여학생'들만 있는 강의실에 청일점 '남학생' 한 사람이 들어왔으니 분위기가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저래 나는 오늘 강의는 권투에 대한 얘기로 마쳐야 될 것 같다.

사각의 링 자체가 생존 경쟁으로 표현되는 인생의 한 축도(縮圖)임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핍진(逼眞)한 현실로 부각되는 것이다. 3분(1회에 소요되는 시간) 아니, 30분(15회전이면 45분)에 인생 전부가 결판이 나는 게임을 보고 있을 양이면 숙연한 느낌마저 든다.

만만치 않은 기량으로 접근해 오는 상대방을 미스 블로 없이 정확한 펀치를 날려 제압해 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일격을 가함으로써 상대방이 보기 좋게 나가떨어지는 광경은…. 해설자는 이때의 표현을 "캔버스에 때려 눕혔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옳거니!" 하고 속으로 외친 적이 있다.

'캔버스'란 말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돛배(帆布)·화포(畵布) 등을 뜻하고 있다. 아울러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생각난다. 용을 그린 뒤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려 넣었더니, 그 용이 홀연히 구름을 타고 하늘로 날아 올라가더라는―.

그러니까, 화가이든 권투 선수이든 그 누구든지, 자기 앞에 펼쳐진 캔버스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자신의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본다.

글을 쓰는 일도 똑같은 맥락에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30년 동안 나 자신과의 싸움을 힘겹게 하고 있었던 셈이다. 어느 수필가는 자신의 수필집 제명을 《고독(孤獨)의 반추(反芻)》라고 붙이기도 했지만 사실 작가는, 특히 수필가는 자기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을 해야 되고 그 싸움에서 스스로를 극복한 결과로 하나의 작품을 써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원고지가 곧 캔버스인 것이다. 책상 위에 원고지를 펴놓고 그 위에 무엇인가를 쓰기 위해 대좌했을 때, 이 세상에는 나 혼자만 있구나 하는 뼈저린 고독감에 사로잡힌다. 나는 이 고독감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해 보지만 누군가가 꽉 붙들어 앉혀 놓은 듯이 꼼짝을 할 수가 없다. 그 누군가가 명령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네 앞에 펼쳐진 캔버스에 무엇인가를 그려 넣지 않으면, 너는 끝내 고독으로부터 탈출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내가 쓰는 글은 다 그런 상황에서 쓰여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고독은 반복되는 고독이었다. 나는 원고를 쓸 때마다 이 한편만 쓰고 나면 고독에서 해방되려니 하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쓴다. 그렇게 해서 쓴 고독의 산물이 상당한 양에 이르렀건만, 아직도 나는 고독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어쩌면 고독이란 것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글을 읽고 공감을 했노라고 쓴 독자의 편지를 받았을 때는, 이 세상에는 고독한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자위를 하게 된다.

레너드와 두란도 뼈저리게 고독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도 레너드가 더 고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모르긴 해도 레너드는 피부색이 흑인에 가까운 것을 보면 어떤 열등 콤플렉스 때문에 뼈저린 고독을 맛보면서 살았을 것 같다. 그는 그 고독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권투를 했을 것이다. 천재 시인 괴테의 말을 빌리자면, 재능은 고독의 산물이라고 했다. 따라서 레너드를 일러 '천재 주먹'이라고 쓴 조간신문의 기사가 내 마음에 꼭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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