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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여행의 이유 / 김영하

부흐고비 2021. 3. 30. 15:23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과 무역을 해서 큰돈을 벌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났지만 이 세계가 자신이 생각해왔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과 짐승, 문화와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와 그것을 『동방견문록』으로 남겼다.

여행담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 형식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늘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난다. 로널드 B. 토비아스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에서 ‘추구의 플롯’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플롯이라고 소개한다. 주인공이 뭔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들로, 탐색의 대상은 대체로 주인공의 인생 전부를 걸 만한 것이어야 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는 죽지 않는 비결을 찾아 헤맨다. 그보다는 덜 오래된 이야기에서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을 끝내고 아내와 자식이 있는 고향으로 향한다. 주인공들은 험난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추구의 플롯의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결말이다. 주인공은 원래 찾으려던 것과 전혀 다른 것, 훨씬 중요한 어떤 것을 얻는다는 것이다. 대체로 그것은 깨달음이다. 길가메시는 ‘불사의 비법’대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통찰에 이른다.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귀환한다는 애초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 긴 여정을 통해 그가 진짜로 얻게 된 것은 신으로 표상되는 세계는 인간의 안위 따위에는 무심하다는 것, 제아무리 영웅이라 하더라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며, 인간의 삶은 매우 연약한 기반위에 위태롭게 존재한다는 것, 환각과 미망으로 얻은 쾌락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 등을 깨닫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오디세우스는 처음 길을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고향인 이타케에 도착한다.

영화<스탠바이 웬디>의 주인공 웬디는 자폐증으로 바깥세상과는 소통에 큰 어려움을 겪는 소녀다. 주인공은 <스타트랙> 시리즈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데, <스타트랙>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되면 그 상금으로 다시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일에 휘말리게 되는 바람에 원고를 우편으로 보내서는 정해진 날짜에 스튜디오에 배달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버스를 타고 난생처음으로 자기가 사는 동네를 떠나 로스앤젤레스까지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불친절한 버스 기사와 도둑을 만나고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시련이 잇따른다. 전형적인 ‘추구의 플롯’답게 주인공 웬디는 원래의 목적이었던 시나리오 공모 당선은 이루지 못한다. 대신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한계를 돌파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관객은 그녀가 꿈을 이루지 못했는데도 기뻐한다. 왜냐하면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그녀가 추구하는 표면적 목표(시나리오 공모 당선)의 밑바탕에 진짜 목표(가족에게 받아들여지고 사회로 나아가는 것)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주인공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그 목표가 달성되었을 대 마치 자기 일처럼 흐뭇해하게 된다.

이처럼 ‘추구의 플롯’으로 구축된 이야기들에는 대부분 두 가지 층위의 목표가 있다. 주인공이 드러내놓고 추구하는 것(외면적 목표)과 주인공 자신도 잘 모르는 채 추구하는 것(내면적 목표),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추구의 플롯’에 따라 잘 쓰인 이야기는 주인공이 외면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간절히 원하던 것을 달성하도록 하고, 그런 이야기가 관객에게도 깊은 만족감을 준다.

‘추구의 플롯’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대체로 주인공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거꾸로 여행기가 ‘추구의 플롯’으로 쓰일 수 있고, 쓰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명확한, 외면적인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난다. 이런 목표는 주변 사람 누구에게나 쉽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와이에 가서 서핑을 배우겠다. 치앙마이에서 트레킹을 하겠다. 이번 여름휴가에는 인도에 가서 요가 클래스에 참가하겠다. 유럽 전역을 떠돌며 미술관을 둘러보겠다 같은 것들,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준비한다. 여행지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고, 숙소를 예약하고, 이동 수단을 검토한다. ‘추구의 플롯’에서는 주인공이 결말에 이르러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지만, 여행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뜻밖의 사실’이나 예상치 못한 실패 좌절, 엉뚱한 결과를 의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정해진 일정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바라며, 안전하게 귀환하기를 원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그야말로 ‘뜻밖’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걸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각성은 대체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여행 에세이 펴낸 김영하 "여행과 소설은 여러모로 닮은 꼴"

『살인자의 기억법』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등 많은 베스트셀러를 쏟아낸 저자가 최근 여행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를 담은 에세이 『여행의 이유』(문학동네)를 펴냈다. 김영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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