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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이런 주례사 / 김수봉

부흐고비 2021. 4. 1. 22:21

코미디언 고 배삼룡 씨가 연예계의 원로 반열에 들었을 때, 후배의 결혼식 주례를 맡은 일이 있었다. 순서에 따라 상견례, 혼인서약, 성혼선언문 낭독이 끝나고 주례사를 할 차례였다.

“다음은 신랑 신부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지침이 될 고귀한 말씀을 해주실 주례사가 있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주례는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갑자기 ‘신랑 신부!’ 하고 큰소리로 불렀다. 그리고는 ‘신랑 신부는 지금부터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잘 알고 있지요?’ 하고 물었다. 신랑과 신부는 얼결에 ‘녜’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배삼룡 주례는 ‘그럼 됐어. 이상. 주례사 끝.’ 하고 단상을 내려가 버렸다.

나는 오래전 이 한 대목을 대중잡지에서 읽고, 과연 코미디언다운 아니, 배삼룡다운 발상이로구나 하고 쾌재를 부른 적이 있었다.

주례사란 성스러운 결혼식에서 가장 하이라이트의 순간이 아닐까. 그러나 대개의 경우 주례사는 진부한 상투어들의 나열로 가득 찬다.

신랑은 언제나 건실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며, 신부는 하나같이 명문의 가정에서 나고 자란 요조숙녀로 칭송한다. 좀 유식하다는 주례는 고리타분한 명구 명문을 나열하며 훈화하듯 늘어놓고, 사회적 명망이 있다고 자부하는 어떤 주례는 자기과시를 앞세운 선거유세 같은 말들로 길어진다.

이런 유의 주례사는 하객 누구도 경청하지 않고, 당사자인 신랑 신부의 귀에도 귀감으로 담기지 않는다.

경사스런 일에 좋은 말을 한껏 해주는 것이 주례사의 통념처럼 되었기에 ‘주례사 평’이라는 말도 생겼을 정도다. 미사여구와 찬사일색의 말과 글, 문학이나 예술작품에 대한 비평이나 논의를 할 때, 올바른 비판 없이 찬사만 펼치는 그런 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주례 배삼룡은 이런 마땅찮은 허언과 위선을 일찍이 간파하였기에 ‘내가 할 말 잘 알지요.’ 하고 끝내버린 것이다.

나도 꽤나 많이 주례를 서보았다.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해온 직업이다 보니 제자들의 부탁을 번번이 거절할 수만도 없어서였다.

나의 주례사는 짧고 쉽게 하자는 것이 원칙이었다.

인간대사라고 하는 결혼식은 당사자나 가족친지나 하객들까지도 설레는 마음이다. 그런 설레는 마음에 어떤 고상한 말인들 새겨지겠는가.

이제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두 사람에게 이것 한 가지만은 꼭 실천하며 살라고 나는 당부하곤 해왔다. 가령 부부싸움을 할 때라도 ‘언제나’란 말과 ‘만날’이란 말을 쓰지 않아야 한다고. 이 말을 잘못 써서 둘 사이에 금이 가고 파탄에 이르기까지 한다고.

한번의 실수, 사소한 잘못에 대해서도 ‘당신은 만날 그러더라’라든가, ‘언제나 그 모양이다.’라는 식으로 몰아붙인다면 상대를 상습자나 고칠 수 없는 인간으로 몰아가고 자존심을 크게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주례사를 한 때도 있었다.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을 버리라고 당부한다.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라거나 ‘그러니까 별수 없지’ 하는 선입관은 부부간의 소통을 막는 장애물이다. 그래서 상대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쪽으로 흘러간다. 어떠한 잘못도 ‘이번뿐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바꿀 때 화해의 문은 열린다고. 이런 요지의 주례사를 하기도 했다.

가정형편이 많이 어려운 제자의 주례를 할 적에는 눈을 올려 뜨고 볼 때와 내려뜨고 볼 때를 잘 가려서 하라고 일렀다.

부부가 서로를 볼 때는 올려 뜨고 보기. 곧,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되고, 살림이 궁핍할 때는 내려뜨고 보기. 곧, 우리보다 못한 사람도 세상에는 많다는 것을 생각하라고 했다.

결혼 풍속도 많이 변한 세상이다. 전통혼례는 진풍경이 되었고 신식 결혼도 날로 바뀐다. 성스럽고 엄숙하던 예식장이 무슨 이벤트장마냥 쿵작거리고 소란스러워졌다. 올봄에는 주례도 없고 주례사도 없는 결혼식을 두 번이나 본적이 있다.

결혼풍속은 나라마다 부족마다 다르다. 또 시대에 따라 변해가는 게 결혼식 풍경이다. 어느 것이 정도인지는 누구도 주장할 수가 없다. 오직 그 시대의 것이 최선일 뿐이다.

주례사도 없어지고 있는 시대이니 배삼룡이 일찍이 ‘주례사 끝’ 했듯이 내가 주례 설 일도 진작 ‘끝’ 해버리고 지낸다.


 

김수봉 수필가는

「월간문학」 등단. 조선대 국문과 졸업.

광주문인협회회장 역임, 수필문우회,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광주문학상, 현대수필문학상, 소월문학상, 한림문학상 등 수상.

수필집 : 『전라도 말씨로 『역말 가는 옛길 『그날의 기적소리』  『소새원 바람소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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