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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사위와 딸이 어렵게 시간을 만들어 파리로 나를 안내했다. 프랑스 국적의 크루즈 ‘씨에 프랑스’에 차를 가지고 승선해야 하는데 도버해협을 건너기 전 약간의 여유시간이 있어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기념품 가게에서 가장 값싸고 손쉬운 물건이 열쇠고리이다. 도버의 가게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꽃으로 장식된 예쁜 열쇠고리가 눈길을 끌었다. 선물할 사람에 따라 애인, 친구, 가족, 혹은 특별한 사람에게 주도록 상대에 알맞게 좋은 글귀들이 쓰여 있어 앙증맞은 노트같았다. 딸과 사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러브 열쇠고리를 샀다.

기다리는 동안 그 안에 쓰인 글귀들을 한장 한장 해석하며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히 내 가슴에 와 닿는 말은 아내에게 존경받고 싶은 남편이 지켜야 할 것들이었다. 존경받는 남편이 되려면 아내의 말에 늘 관심을 보이고, 일단은 긍정하라며 ‘예스 디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도록 습관을 들이라고 쓰여 있었다. 사위는 파리 여행을 하는 동안 딸애가 하는 말에 대해 ‘예스 디어’를 연발했는데 듣는 나도 흐뭇하고 본인들도 재밌어 했다.

가장 바람직한 부부상은 뭘까. 난 단연코 부부 사이는 서로 자유롭게 소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사에 관해서든, 혹은 시류에 관해서든, 또는 사회생활에 관해서든, 서로의 취미나 관심사에 대해서도 일단 말을 꺼냈을 때, “그래요?”, “그랬어?” 라고 관심이라도 보여준다면 일단 서로에게 존경받을 만한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한쪽이 말을 꺼냈을 때, 전혀 들은 척도 안하거나 퉁명스럽게,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하고 명령조로 받거나, “시간없어. 나중에 얘기해.” 라고 딱 자르거나, “그렇게 할일이 없어? 쓸데없는 소리 하게?” 하고 받는다면 그 부부는 스스로 서로에게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게 하는 것일 게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가부장적인 남자들 중에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며 남편의 권위를 앞세우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잘 아는 어느 친구의 남편이 바로 이런 사람이어서, 내 친구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안타까워하곤 한다.

내 친구 남편은 신혼 초에 시어른들 앞에서도 자기에게 극존칭을 쓰지 않으면 화를 내서, 친구가 어른들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친구보다 나이가 한 살 아래인 그 남편은 사소한 일에서도 혹시 자기를 하시할까봐 전전긍긍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남존여비사상이 강해, 늘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며 남존여비사상을 각인시키려 했단다. 그는 이 사상을 부부간에 지켜야 할 철칙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행여 내 친구가 그에 대해 불만이라도 표출할라치면 여자는 영혼이 없다고 윽박지른단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이 말의 본뜻은 상하관계를 말하는 게 아닐 것이다. 하늘에 대해 땅, 땅에 대해 하늘은 상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보완하여 완전함에 이르라는 완성의 의미가 정답일 것이다.

가부장적인 남편들은 대개가 아내에 대해 혹은 여자에 대해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나약한 컴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혹여 아내에게 무시당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힘으로라도 억지스럽게 우위에 서려는 안간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착각은 아내로부터 존경은커녕 스스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데 일조를 할 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가부장적인 남편들은 우리세대 이후엔 설 자리가 없어질 듯하다. 요즘 젊은 부부들의 모습을 보면 서로 돕고 보완해가며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부부 사이는 우선 대화가 통하는 관계가 아닐까 싶다. 대화가 통하려면 우선 상대방의 말을 들어줄 줄 알아야 한다. 하늘은 땅의 말을, 땅은 하늘의 말을 들어주며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면 서로 평등한 관계가 될 것 같다. 그러나 수직적 부부사이에 대화란 있을 수 없다. 명령과 복종만이 존재할 뿐이다. 대화가 통하려면 우선 수평적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하늘이라 생각하며 아내를 부리려고 하는 남편이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일 리가 없다.

남편이든 아내든 중년에 이르면 둘 다 갱년기를 맞게 된다. 이때부터 아내 위에 군림하는 남편은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다. 젊어서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니, 아내는 남편에게 입을 닫고 사는 게 습관화되어, 결국은 마음까지 닫아버리게 된다. 아내들은 남편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측은지심을 발휘해 집안의 가장으로 남편의 지나온 세월에 대해 안쓰러움을 갖고 모성본능으로 남편이란 자리를 지켜주긴 하지만 서로 소통의 대상에선 까마득하게 밀려나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소외감이 늘어 더 외로워진다. 이럴 때 부부간에도 정감 있는 대화가 필요하며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어야 노년기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 갱년기를 넘기면서 아내들은 호르몬의 변화로 남성화되어 가정에서 부족함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밖으로 나가게 되고, 결국 밖에서 소통의 대상을 찾게 된다. 그 상대가 친구일 수도 있고 취미일 수도 있다.

반면 여성호르몬이 많아진 남편들은 집안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남편들에겐 예전의 집이 아니다. 직업에서 밀려난 남편들은 아내에겐 젊은 날의 원망의 존재, 아이들에겐 귀찮은 존재가 되어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갱년기 이후에 변화를 보인다면 그나마 원만한 부부관계로 노년을 서로 보듬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기본적으로 모성본능이 있기 때문에 남편들의 늦게라도 진정으로 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위해준다면 여자들은 숙명으로 끌어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자신만 내세우거나 하늘을 주장한다면 가부장적인 남편들의 설자리는 점점 좁아지게 될 것이다.

노년의 부부들에게, 다시 태어나면 어떤 배우자를 만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남편들은 상당수가 현재의 아내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지만, 부인들은 대부분 현재의 남편을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한단다. 이는 부인들이 남편에게 자신을 희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희생이 응당 당연하고 보람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행이지만 거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현재의 남편을 만나고 싶어할까 스스로 자문해 본다. 선뜻 답변하기 쉽지 않다. 나를 한 인간으로 배려해주는 남자, 내가 관심을 갖는 분야에 대해 공감은 못하더라도 인정은 해 주는 남자, 더 나아가 격려하고 잘되기를 빌어주는 남자라면 더욱 좋겠다. 다음 세상에서 나의 남편이 이런 남자로 다시 태어난다면 더 없이 좋으련만. 그렇다면 나는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남편을 진정한 하늘로 섬기며 존경하고 싶다.


 

문영숙 수필가:

「월간문학」 등단, 「문학시대」 시부문 등단, 「문학동네」, 「푸른책들」 동화부문 등단.

신동아 논픽션 수상.

저서 : 동화·청소년 소설집 『무덤속의 그림『궁녀 학이『에네껜 아이들『검은 바다『아기가 된 할아버지『나야 나 보리 

간병에세이 『치매 마음 안의 외딴 방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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