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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백자 제기 / 정목일

부흐고비 2021. 4. 2. 08:47

내 책상 위에 백자白磁 제기祭器가 하나 있다. 백자 제기를 보면 필시 몇백 년 달빛이 머물고 있는 것 같다. 늘 비어 있는 제기를 보면서 무엇을 올려놓을까 생각해 보곤 했다.

백자 제기는 밑받침과 그 위에 둥근 바탕으로 이뤄진 단순한 구조지만, 두 손을 받들어 공손히 떠받치는 형상이다. 자기는 흙을 빚어 천삼백 도 정도의 온도로 구워낸다. 흙이 불 속에서 하나의 자기로 될 때까지 도공陶工들은 자신의 영혼과 재능을 불에 태운다. 달빛을 보듯, 한 그릇의 정화수를 대하듯 부드럽고 고요한 백자의 빛깔을 불 속에서 완성하는 일은 재주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 더구나 하늘과 영령을 위한 제기를 만드는 일이란 함부로 할 수 없다. 정성을 다하여 형태를 빚고, 희고 깨끗한 빛깔을 담아내려 혼신을 다하였을 것이다.

지리산에서 푸른 솔방울을 두 개 따온 적이 있었다. 어디에 둘까 망설이다 무심결에 백자 제기 위에 올려놓았다. 투명한 달빛 속에서 청산靑山이 놓여있는 모습 같다. 솔방울의 초록이 넘쳐 짙은 산 향기가 배어나는 듯하다.

솔방울 속에 깃든 형형색색의 초록이 펼쳐져서 숲이 된다. 솔바람 소리를 내기도 하고, 새 소리로 넘쳐나기도 한다. 솔방울 속엔 지리산 송림의 짙은 녹음과 뾰쪽뾰쪽 바늘잎이 빚어내는 솔 향기……. 바늘 하나로도 긴 밤에 모란도牧丹圖를 수繡놓기도 하는데, 송림의 소나무들은 수많은 바늘들로 무슨 수를 놓곤 하는 걸까. 소나무들은 느긋하고 무심한 표정이다.

가을날, 백자 제기 위에 모과 한 개를 얹어 놓아 보았다.

농장을 경영하는 친구가 술을 빚으라고 해마다 모과 몇 개씩 보내 주곤 한다. 뭉툭하게 굴곡이 진 모과에선 잘 닦은 놋그릇의 광택처럼 환한 가을빛이 넘쳐나고 있다. 흙으로 주물러 빚은 듯 움푹패이고 툭 튀어나온 부분의 굴곡에서 음영이 깃들어 살아 있는 빛깔과 향기가 꿈틀거린다.

모과가 제 빛깔과 향기를 내기까진 아무도 탐탁하게 눈여겨보려 들지 않았다. 인생도 굴곡과 음영이 있어야만 깊은 향기를 낼 수 있다. 백자 제기는 눈부시지 않은 바탕에 은은한 그리움을 품고, 모과는 빛깔 중에서 가장 좋은 빛깔의 광채를 띠고 있다. 백자와 모과의 만남은 가을의 깊은 환희를 보여준다.

백자 제기 위에 석류 한두 개쯤을 올려놓아도 좋다. 어릴 적 우리집 마당엔 석류나무가 한 그루가 있어서 꽃과 석류를 보며 자랐다. 입안이 시려오는 가을 보석을 선물해 준다. 막 터질 듯한 열매 주머니 속에서 붉은 빛을 머금은 진주알들이 데구르르 굴러떨어질 것만 같다. 그것은 석류나무가 삶의 진실과 깨달음으로 남겨놓은 사리舍利이다.

백자 제기 위에 풀꽃을 올려 놓아 보았다. 풀꽃은 치장하지않아서 좋다. 수수하고 담백하다. 맑아서 눈물이 비칠 듯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빛깔이다. 번쩍거리거나 자극적이지 않다.

평온과 고요를 지녔다. 바라볼수록 삼삼하기만 하다.

제기에 무엇을 올려야 좋을까. 마음이 담기면 되지 않을까. 내 책상 위의 백자 제기는 그냥 비워있을 때가 많다. 백자 제기는 나에게 제사 용구가 아니다. 말없이 주고받는 대화자對話者이며 말벗이다. 무엇인가를 담기보다는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어 편안하다. 백자 제기는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담백한 맛이 있다.

내 마음속에도 백자 제기 같이 정갈한 그릇 하나를 마련해두고 싶다. 아름다운 만남을 위해 마음의 그릇을 깨끗이 비워 두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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