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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임영조 시인

부흐고비 2021. 4. 5. 12:30

대책 없는 봄날 / 임영조 얼마 전 섬진강에서 가장 예쁜 매화년을/ 몰래 꼬드겨서 둘이 야반도주를 하였는데요/ 그 소문이 매화골 일대에/ 쫘악 퍼졌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도심의 공원에 산책을 나갔더니/ 아, 거기에 있던 꽃들이 나를 보더니만/ 와르르 웃어젖히는데 어찌나 민망하던지요/ 거기다 본처 같은 목년(목련)이/ 잔뜩 부은 얼굴로 달려와/ 기세등등하게 널따란 꽃잎을/ 귀싸대기 때리듯 날려대지요/ 옆에 있는 산수유년은/ 말리지도 않고 재잘대기만 하는 품이/ 꼭 시어머니 편드는 시누이년 같아서/ 얄밉기만 하고요./ 개나리도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꼼지락 거리며/ 호기심어린 싹눈을 내미는데요./ 아이고 수다스런 고년들의 입심이 이제/ 꽃가루로 사방 천지에 삐라처럼 날리는데요./ 이 대책 없는 봄을 어찌해야겠습니까요.//

아지랑이 / 임영조

가파른 보릿고개 넘어/ 부황 든 얼굴로 어질어질/ 동구 밖 한길까지 따라와/ 눈물 그렁그렁 배웅하시던/ 어머니! 어머니!// -어여 가, 내 걱정 말구/ -가서 몸 성히 공부 잘허구/ 아직도 가물가물 손 흔드신다.//

대책 없는 봄 / 임영조

무엇이나 오래 들면 무겁겠지요/ 앞뜰의 목련이 애써 켜든 연등을/ 간밤에 죄다 땅바닥에 던졌더군요/ 고작 사나흘 들고도 지루했던지/ 파업하듯 일제히 손을 털었더군요/ 막상 손 털고 나니 심심했던지/ 가늘고 긴 팔을 높이 뻗어서 저런!/ 하느님의 괴춤을 냅따 잡아챕니다/ 파랗게 질려 난처하신 하느님/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지만/ 마을 온통 웃음소리 낭자합니다/ 들불 같은 소문까지 세상에 번져/ 바야흐로 낯 뜨거운 시절입니다/ 누구 짓일까 거명해서 무엇하지만/ 맨 처음 발설한 것은 매화년이고/ 진달래 복숭아꽃 살구꽃이 덩달아/ 희희낙락 나불댄 게 아니겠어요/ 싹수 노란 민들레가 망보는 뒤꼍/ 자꾸만 수상쩍어 가보니 이런!/ 겂없이 멋대로 발랑까진 10대들/ 냉이 꽃다지 제비꽃 환하더군요/ 몰래 숨어 꼬나문 담뱃불처럼/ 참 발칙하고 앙증맞은 시절입니다/ 나로서는 대책 없는 봄날입니다//

염소를 찾아서 2 / 임영조

그만 탈출하고 싶다/ 검은 절망의 외투를 벗고/ 구닥다리 수염도 깎고/ 이 외진 마을을 떠나고 싶다// 한평생을 옭아맨/ 밧줄을 풀고, 인연도 끊고/ 출가하듯 일상을 박차고 나가/ 고산 준령(高山峻嶺) 햇볕 바른 산림대/ 그 푸른 산록으로 내닫고 싶다// 오늘도 어제처럼 끌려 나와/ 온 하루 들판에서 서성거리다/ 강물에 비춰 보는 슬픈 자화상(自畵像)/ 해지면 돌아와 건초나 씹는/ 따분하고 헛배부른 일과(日課)가 싫다// 더러는 죽고, 더러는/ 헤어져 소식 없는 이웃들/ 이 적막한 유형(流刑)의 땅에/ 말뚝박고 사는 것이 괴롭듯/ 일용할 양식을 뜯기 위해 날마다/ 목매고 사는 일은 거북하고 아프다// 난세(亂世)를 치받기엔 미력한 뿔로/ 허공만 쿵쿵 들이받다가/ 눈망울에 그렁그렁 슬픔이 고여/ 까슬한 혀를 빼물고 우는/ 염소는 이제 텅 빈 시골이 싫다//

염소를 찾아서 3 / 임영조 

삼십년 지난 오늘/ 이제야 비로소 깨닫느니/ 내가 염소를 내다판 게 아니라/ 염소가 나를/ 대처에 내다판 걸 알았다// 간재재 넘어 삼십여 리 길/ 팔려가는 낌새를 알아차린 듯/ 거품 물고 버티며 울부짖던 염소를/ 판교장에 끌고 가 헐값에 팔았다// 이 고달픈 / 어디에 안녕히 부려놓지 못하고/ 세월의 볼모처럼 덜미 잡힌 채/ 날마다 헐레벌떡 끌려온 내가/ 굴레 쓴 염소임을 알았다.// 

 

/ 임영조 

푸성귀는 간할수록 기죽고/ 생선은 간할수록 뻣뻣해진다/ 재앙을 만난 생의 몸부림/ 적멸의 행간은 왜 그리 먼가// 여말에 요승이 임금 업고 까불 때/ 간 잘 맞춘 임박은 승지가 되고/ 간하던 내 선조 임향은 괘씸죄 쓰고/ 남포 앞 죽도로 귀양 가 소금이 됐 다// 세상에 간 맞추며 사는 일/ 세상에 스스로 간이 되는 일/ 한 입이 내는 차이/ 한 몸 속 사이는 그렇게 먼가// 꼴뚜기는 곰삭으면 무너지지만/ 멸치는 무너져도 뼈는 남는다/ 꽁치 하나 굽는데도 필요한 소금/ 과하면 짜고 모자라면 싱거 운/ 간이란 그 이름을 세워주는 이다// 간이 맞아야 입맛이 도는/ 입맛이 돌아야 살 맛 나는 세상에/ 그 어려운 소금 맛을 늬들이 알어?// 

 

눈 그친 대숲 / 임영조

눈 그친 대숲 속/ 부리 작은 참새떼가 떠들썩/ 어둠 쪼는 소리로 먼동이 튼다/ 선잠 깬 대숲이 햇귀 받아 부신지/ 용쓰듯 눈짐 털고 푸르게 선다/ 가문을 함부로 넘보지 말라!/ 울울창창 일제히 궐기한 형국이다/ 숲 온채를 빗자루로 하늘을 쓸어/ 지체를 세우려는 환한 몸부림/ 서늘하고 올곧은 안간힘이 보인다/ 하늘로 머리 두고 사는 자는/ 거저 받는 서설도 짐이 된다고/ 서걱서걱 어깨 터는 청죽비소리/ 알겠다, 늘 푸르고 곧게 서려면/ 한살이의 마디는 매끄럽고 분명히/ 생의 보푸라기는 자주 터는 것임을/ 마음 비운 전신의 빨대를 세상에 박고/ 한 우물만 젖 먹듯 빠는 것임을/ 눈 그친 대숲은 보여주는 것이다/ 삭신 온통 얼얼하고 시리게.//

 

우리나라 풀잎은 / 임영조

원래 조용한 말씀/ 순리대로 흔들리는 몸살이다.// 늘 푸른 서슬을 지녔으되/ 오직 죽은듯이 숨어서/ 숨쉬는 비밀이다, 아우성이다.// 어쩌다가 비바람치면/ 말없이 눕는 듯 금세 일어나/ 새로운 바람이 되어/ 도처에 자빠진 혼을 깨운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모두들 깨어나 하늘을 보라,/ 저토록 너무 맑아서/ 오히려 눈물겨운 하늘을 보라.//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 뿌리 내린 풀잎은/ 저마다 물 오르고 피가 뛰어도/ 모른다 모른다고 손을 젓는다.// 비가 오면 젖은 만큼 기울고/ 바람이 불면 그 무게대로/ 흔들리는 天性이다, 몸짓이다/ 우리나라 풀잎은.//

도꼬마리씨 하나 / 임영조

멀고 긴 산행길/ 어느덧 해도 저물어/ 이제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어 왔을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김에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할부금 갚듯 정 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자목련 / 임영조

화창한 봄날/ 고궁 뜰을 혼자서 거닐다가/ 우연히 마주친 여인/ 빙긋이 웃으며 아는 체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얼핏 생각 안 나는/ 저 지체 높고 우아한 자태/ 어느 명문가 홀로된 마님 같다/ 진자줏빛 비로드 저고리에/ 이루 다 말로 못할 슬픔이 서려/ 앞섶에 살짝 꽂은 금빛 브로치/ 햇빛 받아 더욱 눈부셔/ 함부로 범접하기 황송한지고/ 세상에 아직 잔정이 많아/ 서둘러 치장하고 봄마중 나온 마님/ 안부를 묻듯 실바람만 건듯 스쳐도/ 금세 눈물이 앞을 가려/ 하르르 꽃잎부터 떨구는 작별/ 그 후로 세상은 또 한차례/ 화사한 소문이 나돌 듯/ 별의별 꽃말이 분분하였다.//

산나리 꽃 / 임영조

지난 사월 초파일/ 산사(山寺)에 갔다가 해탈교를 건너며/ 나는 문득 해탈하고 싶어서/ 함께 간 여자를 버리고 왔다/ 그런데 웬지 자꾸만/ 그 여자가 가엾은 생각이 들어/ 잠시 돌아다 보니 그 여자는 어느새/ 얼굴에 주근깨 핀 산나리가 되어/ 고개를 떨군 채 울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또/ 내가 사는 마을까지 따라와/ 가장 슬픈 한 마리 새가 되어/ 밤낮으로 소쩍소쩍/ 비워 둔 내 가슴에 점을 찍었다/ 아무리 지워도 지울 수 없는/ 검붉은 문신처럼 서러운 점을.//

고등어 / 임영조

등짝에 해조음 문신 알록달록한/ 간고등어 한 마리가 점잖게/ 가스레인지 그릴 속에 누워있다/ 불꽃이 온몸을 지글지글 구워도/ 오늘 같은 다비를 기다렸다는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있다/ 평생을 무슨 공부로 수신했길래/ 시뻘건 연옥에서도 고등어는/ 열반에 들 듯 태연할 수 있을까/ 파란만장 난바다를 헤쳐온 생이 못내/ 서럽고 억울할텐데, 육신을 어찌/ 저토록 마음 편히 보시할 수 있을까/ 뻣뻣한 몸이 꼭 서슬 퍼런 칼 같다/ 이판사판! 너 아니면 나 죽기식/ 피비린내 파다한 복수를 꿈꾸는 칼?/ 죽어서도 몸가짐 의젓한 고등어가/ 설마 누구를 찌를 마음을 먹었으랴/ 그렇게 본 내 마음이 멋쩍다/ 다 익은 살을 곧 뜯어먹을 나보다/ 등급이 몇 수쯤 위라는 생각/ 그래서 이름까지 高等魚?//

매미소리 / 임영조

감나무 가지 매미가 악쓰면/ 벚나무 그늘 매미도 악쓴다/ 그 무슨 열 받을 일이 많은지/ 낮에도 울고 밤에도 운다/ 조용히들 내 소리나 들어라/ 매음매음… 씨이이… 십팔십팔/ 저 데뷔작 한 편이 대표작일까/ 경으로 읽자니 날라리로 읽히고/ 노래로 음역하면 상스럽게 들린다.//

덩굴장미 / 임영조

오월 한낮 햇볕 아래/ 나른한 골목길 인적 뜸하다/ 누가 사는 집일까?/ 화사한 웃음소리 담을 넘는다/ 새빨간 립스틱 진하게 칠한/ 저 여자들 오늘이 곗날인가?/ 모처럼 하나같이 화색이 돈다/ 낮술 한 잔 걸친 듯 농염한 입술/ 귀 빌려주면 무슨 말 할까?/ 온몸이 지레 후끈거린다/ 못본 척 그냥 걷는다, 이봐!/ 새파란 덩굴손이 어깨 툭 친다/ 왜요? 돌아다보니, 오호호……/ 선혈이 낭자한 드라큐라/ 화려한 염문처럼 뒤따라온다/ 사방에 짜한 매혹적인 저 몸내/ 그 여자 입이 참 얇다/ 색이 너무 진하면 담을 넘듯/ 그 여자 입이 참 얇다/ 색이 너무 진하면 담을 넘듯/ 가시울 쳐도 새는 화냥끼/ 슬쩍 한 송이 꺾어?/ 그 여자 몸은 온통 가시다!//​

나비 -곤충 채집 8 / 임영조

찬하의 바람둥이/ 건들건들 봄바람 몰고 오네/ 아직도 백일몽에 취한 듯/ 어질어질 갈지자로 날아오네// 오색 무늬 빛부신 錦扇/ 여봐란 득 살랑살랑 흔들면/ 햇빛가루 흩날리는 현기증/ 세상은 또 한차례 色이 動하네// 저 황홀한 춤사위로/ 꽃입술 헤벌어진 산도화/ 사리꽃 노린재꽃 엉겅퀴꽃 앵초꽃/ 일제히 손짓하며 발을 구르네/ 오빠! 오빠! 열광하는 십대들처럼// 오, 기가 승한 풍객이여!/ 너는 천지간에 수놓듯/ 소리없는 박수로 이승을 소요하니/ 가난도 한낱 사치겠구나/ 어디에 머문들 정 두지 않고/ 훨훨 자주 털고 가니/ 일생이 무겁지 않겠구나// 저 눈부신 율동/ 그 어느 대목을 주목해야/ 마음 한결 헐거워질까?/ 삶 또한 부끄럽지 않을까?/ 아랫죽지 자꾸만 시큰거리네.//​

사마귀 -곤충 채집 11 / 임영조

햇볕 따가운 시선/ 머위잎 양산으로 가리고/ 목하 교미중인 사마귀 한 쌍/ 화끈한 외설이 눈길을 끈다/ 두 몸이 죽자사자 부둥켜안고/ 무아경을 헤매는 합궁, 아니/ 세상에 저런! 암컷이 수컷을/ 머리부터 아작아작 씹어먹다니!/ 얼마나 사랑했으면/ 온몸을 송두리째 먹고 싶을까?/ 얼마나 황홀했으면/ 목숨마저 기꺼이 주고 싶을까?/ 알다가 모를 엽기적 순애/ 나도 그런 사랑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열락에 빠져/ 사람 살려! 외칠 새 없이/ 마음 주고 몸 주는 마지막 보시/ 자살인지 타살인지 도무지/ 감잡기 힘든 논픽션 같은 죽음/ 두 개의 半身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가 되는 사랑이라면/ 나도 하나 만났으면 좋겠다/ 머리에 사마귀 감춘 여자/ 팔 다리 온통 톱니 세운 여자/ 말끝마다 오싹 가시 돋친 여자/ 참 지독한 여자 하나 만나고 싶다/ 너 정말 임자 만났다는 듯.//​

반딧불 -곤충 채집 13 / 임영조

내 가슴속 어두운 방에/ 반딧불 하나 키웠으면 좋겠네/ 낮에는 풀잎 뒤 이슬로 숨었다가/ 밤이면 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깨우는/ 가장 절실하게 빛나는 언어가 되/는/ 더러는 꽃이 되는 원죄가 되는// 나 눈 번히 뜨고도 세상 어두워/ 지척을 분간하지 못할 때/ 아차! 발 삐끗 미망 속을 헤맬 때/ 반짝반짝 나만 아는 신호를 보내는/ 먼 그리움 같은 반딧불 하나/ 아무도 모르게 가졌으면 좋겠네// 내 영혼의 배터리가 다 닳아/ 삶이 시큰둥 깜박거릴 때/ 온몸을 짜릿짜릿 충전해주는/ 그 은밀한 사랑, 그게 혹/ 황홀한 고통의 마약일지라도/ 나는 죄짓듯 기꺼이 음독하겠네// 손만 대면 확! 뜨겁게 점등하는/ 알전구처럼 성감대가 민감한/ 반딧불 하나 환히 켜졌으면 좋겠다/ 쓸쓸하고 어두운 나의 빈방에.//

성냥 / 임영조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출옥하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다// 오랜 연금으로/ 흰 뼈만 앙상한 체구에/ 표정까지 굳어버린 돌대가리들/ 언제나 남의 손끝에 잡혀/ 머리부터 돌진하는 하수인이다// 어둠 속에서 갇히면/ 누구나 오히려 대범해지듯/ 저마다 뜨거운 적의를 품고 있어/ 언제든 부딪치면 당장/ 분신을 각오한 요시찰 인물들//

이발(理髮)을 하며 / 임영조

일요일 아침/ 이발소 거울 앞에 앉으면/ 한 달 전에 헤어진 나를 만난다.// 말없이 주고 받는 눈인사/ 그새 우리는 많이 수척해졌군,/ 그것은 결코 새로 미친 바람탓.// 스스로 전부를 맡긴다/ 서슬 퍼런 가위와 칼날 앞에/ 머리를 맡기고, 얼굴을 맡긴다/ 손발을 맡기고, 믿음까지 맡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듯/ 타인(他人)의 독선 앞에 관대했던가.// 정중하게 빛나는 가위 속에서/ 검게 자란 시간이 잘려나간다/ 턱밑에 무성하던 교만(驕慢)이/ 단칼에 모조리 스러질 때는/ 감격으로 차라리 눈을 감는다.// 조심조심 귀를 후빈다/ 밖에서 들은 치욕(恥辱)의 말씀들이/ 귓밥이 되어 웃음이 되어/ 시원하고 간지럽게 빠져나온다.// 그러나 눈에 박힌 가시는 또/ 어디 가서 파낼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노상/ 죄지은 사람처럼/ 속으로나 눈물 글썽거리며/ 날마다 시력을 잃고 사는가//

겨울 만다라 / 임영조

대한 지나 입춘날/ 오던 눈 멎고 바람 추운 날/ 빨간 장화 신은 비둘기 한 마리가/ 눈 위에 총총총 발자국을 찍는다/ 세상 온통 한 장의 수의에 덮여/ 이승이 흡사 저승 같은 날/ 압정 같은 부리로 키보드 치듯/ 언 땅을 쿡쿡 쪼아 햇볕을 파종한다/ 사방이 일순 다냥하게 부풀어/ 내 가슴속 빈터가 확 넓어지고/ 먼 마을 풍매화꽃 벙그는 소리/ 들린다, 참았던 슬픔 터지는 소리/ 하얀 운판을 쪼아 또박또박 시 쓰듯/ 한끼의 양식을 찾는 비둘기/ 하루를 헤집다 공친 발만 시리다/ 아니다, 잠시 소요하듯 지상에 내려/ 요기도 안 될 시 몇 줄만 남기면 되는/ 오, 눈물겨운 노역의 작은 평화여/ 저 정경 넘기면 과연 공일까?/ 혼신을 다해 사바를 노크하는/ 겨울 만다라!//​

겨울 산행 / 임영조

눈 오다 그친 일요일/ 흰 방석 깔고 좌선하는 산/ 아무리 불러도 내려오지 않으니/ 몸소 찾아갈 수밖에 딴 도리 없다/ 가까이 오를수록, 산은/ 그곳에 없다, 다만/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로 남아/ 오랜 침묵으로 品을 세울 뿐/ 어깨는 좁고 엉덩이만 큰 보살/ 도량이 워낙 넓고 깊으니/ 나무들은 제멋대로 뿌리를 박고/ 별의별 짐승까지 다 받아주는/ 이승의 마지막 대자대비여!/ 뽀드득/ 뽀드득 잔설을 밟고/ 숨가쁘게 비탈길을 오르면/ 귀가 맑게 트이는 법열이여!/ 잡목들이 받쳐든 푸른 하늘에/ 간간 수묵을 치는 구름/ 눈짐 진 노송이 문득/ 잘 마른 화두 하나 던지듯/ 옜다! 솔방울을 떨군다/ 덤불 속에 멧새들이 화들짝 놀라/ 재잘재잘 산경을 읽는 소리/ 은유인지 풍자인지 아니면 해학인지/ 들어도 모를 난해시 같다/ (좌우간 정상에 있을 때 몸조심하고/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더욱 조심하도록)/ 귀뺨을 때리는 눈보라여!/ 단지 헝클어진 마음이나 빗으러/ 겨울산을 오르는 나는/ 리얼리스트인가?/ 로맨티시스트인가?/ 그것이 알고 싶어 산에 오른다.//​

고백 / 임영조

저 지난가을 어느날/ 야생의 너와 만나던 순간/ 나는 대뜸 첫눈에 반했다/ 휘는 듯 곧고 푸른 절개와/ 새침한 듯 서늘한 자태가 좋아/ 내 마음속 빈터에 너를 심었다/ 허나 너는 삼동 내내 언 가슴 닫고/ 말을 일절 삼가고 침묵하더니/ 연둣빛 유두 하나 내놓고 또다시 침묵/ 내 깊은 心處에 그리움만 키웠다/ 그리움도 터지면 꽃이 되는가?/ 별러온 사랑 오늘사 고백하듯/ 혼신으로 피워내는 명명한 절창/ 청향 진한 몸내로 세상을 여는/ 오, 이름없는 춘란꽃이여!/ (나는 너무 쉽게 시를 써왔다)/ 그래 너는 얼마나 아프냐?/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게/ 얼마나 쓸쓸하고 서러운 축복이냐?/ 나는 당장 네 꽃술 속에 들어가/ 남은 생을 수펄처럼 잉잉잉/ 내가 대신 아프고 싶다/ 내 슬픔 골라 읽는 애독자처럼.//​

화려한 오독 / 임영조

장마 걷힌 칠월 땡볕에/ 지렁이가 슬슬 세상을 잰다/ 시멘트 길을 온몸으로 긴 자국/ 행서도 아니고 예서도 아닌/ 초서체로 갈겨쓴 일대기 같다/ 한평생 초야에 숨어 굴린 화두를/ 최후로 남긴 한 행 절명시 같다/ 그 판독이 어려운 일필휘지를/ 촉새 몇 마리 따라가며 읽는다/ 혀 짧은 부리로 쿡쿡 쪼아 맛본다/ 제멋대로 재잘대는 화려한 오독/ 각설이 지렁이의 몸보다 길다/ 오죽 답답하고 지루했으면/ 隱者가 몸소 나와 배밀이 하랴/ 쉬파리떼 성가신 무더위에/ 벌겋게 달아오른 肉頭文字로//

시인의 모자 / 임영조

나의 새해 소망은/ 진짜 '시인'이 되는 것이다/ 해마다 별러도 쓰기 어려운/ 모자 하나 선물 받는 일이다/ '시인'이란 대저,/ 한평생 제 영혼을 헹구는 사람/ 그 노래 멀리서 누군가 읽고/ 너무 반가워 가슴 벅찬 올실로/ 손수 짜서 씌워주는 모자 같은 것/ 돈 주고도 못 사고 공짜도 없는/ 그 무슨 백을 써도 구할 수 없는/ 얼핏 보면 값싼 듯 화사한 모자/ 쓰고 나면 왠지 궁상맞고 멋쩍은/ 그러면서 따뜻한 모자 같은 것/ 어디서나 팔지 않는 귀한 수제품/ 아무나 주지 않는 꽃다발 같은/ '시인'이란 작위를 받아보고 싶다/ 어쩌면 사후에도 쓸똥말똥한/ 시인의 모자 하나 써보고 싶다/ 나의 새해 소망은.//

비누 / 임영조

이 시대의 희한한 성자(聖者)/ 친수성(親水性) 체질인 그는/ 성품이 워낙 미끄럽고 쾌활해/ 누구와도 군말 없이 친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온몸을 풀어 우리 죄를 사하듯/ 더러운 손을 씻어 주었다/ 밖에서 묻혀 오는 온갖 불순을/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 주었다/ 그는 성직(聖職)도 잊고 거리로 나와/ 냄새 나는 주인을 성토하거나/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들의 가장 부끄러운 곳/ 숨겨 온 약점 말없이 닦아 줄 뿐/ 비밀은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살면 살수록 때가 타는 세상에/ 뒤끝이 깨끗한 소모(消耗)는/ 언제나 아름답고 아쉽듯/ 헌신적인 보혈로 생(生)을 마치는/ 이 시대 희한한 성자// 나는 오늘/ 그에게 안수(按水)를 받듯/ 손발을 씻고 세수를 하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몸을 씻었다//

그네 / 임영조

어디서 명퇴한 중년일까/ 아파트단지 어린이 놀이터에서/ 반백의 사내가 아침을 민다/ 서너 살 손주 놈을 그네 위에 앉히고/ 줄을 꼭 잡아라! 놓치지 마라!/ 거듭 당부하면서 힘껏 밀어올린다/ 와와, 둥근 해가 솟는다 아이가 뜬다/ 허공 가득 퍼지는 해맑은 웃음소리/ 나뭇잎들 팔랑팔랑 손뼉을 친다/ 땅을 박차고 하늘 높이 올라라/ 올라가서 세상을 내려다보라/ 검버섯 핀 손등으로 그네를 미는/ 저 반백의 사내는 지금, 놓쳐버린 꿈/ 흘리고 온 세월을 미는 것일까/ 남은 생을 밀어내는 것일까/ 생이란 무릇 그네 타기 같은 것/ 아무리 밀어도 밀어 올려도 그네는/ 다시 제자리로 내려올 것이다//

해동갑 / 임영조

이제 다 와 간다, 아내여/ 두어 마장만 더 가면 정동진/ 우리는 지금 일출을 보러 간다/ 온갖 소음과 멀미로 잠을 설치며/ 새벽길을 내쳐 함께 달려왔으니/ 이명의 바다에서 솟는 해를 보리라/ 고요한 안식의 새아침을 꿈꾸며/ 우리가 밤마다 머리 두고 자는 곳/ 마음속의 해돋이가 정동진이다/ 아직도 가는 길이 낯설다 해도/ 여기가 어디냐고 묻지는 말자/ 오면서 우리가 떨구고 온 낙엽은/ 지상의 냉기를 다 덮진 못해도/ 볍씨들의 추위야 가려 주리라/ 어깨 참 뻐근하게 지고 온 등짐/ 무게도 달지 말고 계산도 말자/ 달아봤자 땀에 전 내복 같은 생/ 해지고 색 바랜 신발 같은 짐이다/ 이 남새스런 입성을 어디 버릴까/ 길 가다 슬그머니 꽁초 버리듯/ 그냥 아무데나 떨썩 부리고 갈까/ 구름도 흘러가서 오지 않고/ 바람도 불려가서 오지 않는 곳/ 미처 못 가본 세상 정동진으로/ 세월의 열차 타고 가는 길이다/ 몰래 마실 가듯 해동갑하듯/ 거의 다 와간다, 아내여.//
* ‘해동갑’ : 어떤 일을 해가 질 무렵까지 해나가는 것을 일컫는 말.

앞뜰의 살구나무 / 임영조

앞뜰에서 내내 빈 손 들고 서 있던/ 살구나무 한 그루 간 곳이 없고, 홀연/ 꽃상여 한 채가 기다리고 있었다/ 환등을 켜놓은 듯 사방 온통 환해서/ 나비도 어릿어릿 앉다가 이내 뜬다/ 다시 보면 연분홍꽃 새 이불/ 알몸으로 푸욱 묻히고 싶은/ 꿈도 없이 한 시절쯤 잠들고 싶은/ 꽃구름 한 채 둥두렷이 떠 있다/ 간밤 꿈에 어머니가 뵈더니/ 살구꽃 가마 한 채 보내신걸까//


 

임영조(任永祚, 1943~2003) 시인
충남 보령에서 출생. 서라벌예대 문에창작과 졸업. 1970년 《월간문학》 제6회 신인상에 시<出航>이,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木手의 노래>가 당선되어 등단. 2003년 사망하기 이전까지 6권의 시집『바람이 남긴 은어』, 『그림자를 지우며』,『갈대는 배후가 없다』,『귀로 웃는 집』,『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시인의 모자』와 수상시집 『고도를 위하여』, 시선집 『흔들리는 보리밭』 등을 출간. (주)태평양 홍보실 출판부장과 1994~1996년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과 2002~2003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장을 역임. 1995부터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교수로 출강. 1991년 제1회 '서라벌문학상'과 1993년 제38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2003년 췌장암으로 타계.

 

 

 

임영조 시인의 시비

선배님께 국상을 당해 정신없이 며칠을 보내는 바람에 선배님의 6주기를 맞아 묘소에도, 시비가 세워져 있는 보령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2003년 5월 28일, 회갑을 몇 개월 앞두고 있을 때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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