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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는 봄날 / 임영조 얼마 전 섬진강에서 가장 예쁜 매화년을/ 몰래 꼬드겨서 둘이 야반도주를 하였는데요/ 그 소문이 매화골 일대에/ 쫘악 퍼졌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도심의 공원에 산책을 나갔더니/ 아, 거기에 있던 꽃들이 나를 보더니만/ 와르르 웃어젖히는데 어찌나 민망하던지요/ 거기다 본처 같은 목년(목련)이/ 잔뜩 부은 얼굴로 달려와/ 기세등등하게 널따란 꽃잎을/ 귀싸대기 때리듯 날려대지요/ 옆에 있는 산수유년은/ 말리지도 않고 재잘대기만 하는 품이/ 꼭 시어머니 편드는 시누이년 같아서/ 얄밉기만 하고요./ 개나리도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꼼지락 거리며/ 호기심어린 싹눈을 내미는데요./ 아이고 수다스런 고년들의 입심이 이제/ 꽃가루로 사방 천지에 삐라처럼 날리는데요./ 이 대책 없는 봄을 어찌해야겠습니까요.//
아지랑이 / 임영조
가파른 보릿고개 넘어/ 부황 든 얼굴로 어질어질/ 동구 밖 한길까지 따라와/ 눈물 그렁그렁 배웅하시던/ 어머니! 어머니!// -어여 가, 내 걱정 말구/ -가서 몸 성히 공부 잘허구/ 아직도 가물가물 손 흔드신다.//
대책 없는 봄 / 임영조
무엇이나 오래 들면 무겁겠지요/ 앞뜰의 목련이 애써 켜든 연등을/ 간밤에 죄다 땅바닥에 던졌더군요/ 고작 사나흘 들고도 지루했던지/ 파업하듯 일제히 손을 털었더군요/ 막상 손 털고 나니 심심했던지/ 가늘고 긴 팔을 높이 뻗어서 저런!/ 하느님의 괴춤을 냅따 잡아챕니다/ 파랗게 질려 난처하신 하느님/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지만/ 마을 온통 웃음소리 낭자합니다/ 들불 같은 소문까지 세상에 번져/ 바야흐로 낯 뜨거운 시절입니다/ 누구 짓일까 거명해서 무엇하지만/ 맨 처음 발설한 것은 매화년이고/ 진달래 복숭아꽃 살구꽃이 덩달아/ 희희낙락 나불댄 게 아니겠어요/ 싹수 노란 민들레가 망보는 뒤꼍/ 자꾸만 수상쩍어 가보니 이런!/ 겂없이 멋대로 발랑까진 10대들/ 냉이 꽃다지 제비꽃 환하더군요/ 몰래 숨어 꼬나문 담뱃불처럼/ 참 발칙하고 앙증맞은 시절입니다/ 나로서는 대책 없는 봄날입니다//
염소를 찾아서 2 / 임영조
그만 탈출하고 싶다/ 검은 절망의 외투를 벗고/ 구닥다리 수염도 깎고/ 이 외진 마을을 떠나고 싶다// 한평생을 옭아맨/ 밧줄을 풀고, 인연도 끊고/ 출가하듯 일상을 박차고 나가/ 고산 준령(高山峻嶺) 햇볕 바른 산림대/ 그 푸른 산록으로 내닫고 싶다// 오늘도 어제처럼 끌려 나와/ 온 하루 들판에서 서성거리다/ 강물에 비춰 보는 슬픈 자화상(自畵像)/ 해지면 돌아와 건초나 씹는/ 따분하고 헛배부른 일과(日課)가 싫다// 더러는 죽고, 더러는/ 헤어져 소식 없는 이웃들/ 이 적막한 유형(流刑)의 땅에/ 말뚝박고 사는 것이 괴롭듯/ 일용할 양식을 뜯기 위해 날마다/ 목매고 사는 일은 거북하고 아프다// 난세(亂世)를 치받기엔 미력한 뿔로/ 허공만 쿵쿵 들이받다가/ 눈망울에 그렁그렁 슬픔이 고여/ 까슬한 혀를 빼물고 우는/ 염소는 이제 텅 빈 시골이 싫다//
염소를 찾아서 3 / 임영조
삼십년 지난 오늘/ 이제야 비로소 깨닫느니/ 내가 염소를 내다판 게 아니라/ 염소가 나를/ 대처에 내다판 걸 알았다// 간재재 넘어 삼십여 리 길/ 팔려가는 낌새를 알아차린 듯/ 거품 물고 버티며 울부짖던 염소를/ 판교장에 끌고 가 헐값에 팔았다// 이 고달픈 生을/ 어디에 안녕히 부려놓지 못하고/ 세월의 볼모처럼 덜미 잡힌 채/ 날마다 헐레벌떡 끌려온 내가/ 굴레 쓴 염소임을 알았다.//
간 / 임영조
푸성귀는 간할수록 기죽고/ 생선은 간할수록 뻣뻣해진다/ 재앙을 만난 생의 몸부림/ 적멸의 행간은 왜 그리 먼가// 여말에 요승이 임금 업고 까불 때/ 간 잘 맞춘 임박은 승지가 되고/ 간하던 내 선조 임향은 괘씸죄 쓰고/ 남포 앞 죽도로 귀양 가 소금이 됐 다// 세상에 간 맞추며 사는 일/ 세상에 스스로 간이 되는 일/ 한 입이 내는 奸과 諫 차이/ 한 몸 속 肝과 幹 사이는 그렇게 먼가// 꼴뚜기는 곰삭으면 무너지지만/ 멸치는 무너져도 뼈는 남는다/ 꽁치 하나 굽는데도 필요한 소금/ 과하면 짜고 모자라면 싱거 운/ 간이란 그 이름을 세워주는 毒이다// 간이 맞아야 입맛이 도는/ 입맛이 돌아야 살 맛 나는 세상에/ 그 어려운 소금 맛을 늬들이 알어?//
눈 그친 대숲 / 임영조
눈 그친 대숲 속/ 부리 작은 참새떼가 떠들썩/ 어둠 쪼는 소리로 먼동이 튼다/ 선잠 깬 대숲이 햇귀 받아 부신지/ 용쓰듯 눈짐 털고 푸르게 선다/ 가문을 함부로 넘보지 말라!/ 울울창창 일제히 궐기한 형국이다/ 숲 온채를 빗자루로 하늘을 쓸어/ 지체를 세우려는 환한 몸부림/ 서늘하고 올곧은 안간힘이 보인다/ 하늘로 머리 두고 사는 자는/ 거저 받는 서설도 짐이 된다고/ 서걱서걱 어깨 터는 청죽비소리/ 알겠다, 늘 푸르고 곧게 서려면/ 한살이의 마디는 매끄럽고 분명히/ 생의 보푸라기는 자주 터는 것임을/ 마음 비운 전신의 빨대를 세상에 박고/ 한 우물만 젖 먹듯 빠는 것임을/ 눈 그친 대숲은 보여주는 것이다/ 삭신 온통 얼얼하고 시리게.//
우리나라 풀잎은 / 임영조
원래 조용한 말씀/ 순리대로 흔들리는 몸살이다.// 늘 푸른 서슬을 지녔으되/ 오직 죽은듯이 숨어서/ 숨쉬는 비밀이다, 아우성이다.// 어쩌다가 비바람치면/ 말없이 눕는 듯 금세 일어나/ 새로운 바람이 되어/ 도처에 자빠진 혼을 깨운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모두들 깨어나 하늘을 보라,/ 저토록 너무 맑아서/ 오히려 눈물겨운 하늘을 보라.//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 뿌리 내린 풀잎은/ 저마다 물 오르고 피가 뛰어도/ 모른다 모른다고 손을 젓는다.// 비가 오면 젖은 만큼 기울고/ 바람이 불면 그 무게대로/ 흔들리는 天性이다, 몸짓이다/ 우리나라 풀잎은.//
도꼬마리씨 하나 / 임영조
멀고 긴 산행길/ 어느덧 해도 저물어/ 이제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어 왔을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김에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할부금 갚듯 정 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자목련 / 임영조
화창한 봄날/ 고궁 뜰을 혼자서 거닐다가/ 우연히 마주친 여인/ 빙긋이 웃으며 아는 체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얼핏 생각 안 나는/ 저 지체 높고 우아한 자태/ 어느 명문가 홀로된 마님 같다/ 진자줏빛 비로드 저고리에/ 이루 다 말로 못할 슬픔이 서려/ 앞섶에 살짝 꽂은 금빛 브로치/ 햇빛 받아 더욱 눈부셔/ 함부로 범접하기 황송한지고/ 세상에 아직 잔정이 많아/ 서둘러 치장하고 봄마중 나온 마님/ 안부를 묻듯 실바람만 건듯 스쳐도/ 금세 눈물이 앞을 가려/ 하르르 꽃잎부터 떨구는 작별/ 그 후로 세상은 또 한차례/ 화사한 소문이 나돌 듯/ 별의별 꽃말이 분분하였다.//
산나리 꽃 / 임영조
지난 사월 초파일/ 산사(山寺)에 갔다가 해탈교를 건너며/ 나는 문득 해탈하고 싶어서/ 함께 간 여자를 버리고 왔다/ 그런데 웬지 자꾸만/ 그 여자가 가엾은 생각이 들어/ 잠시 돌아다 보니 그 여자는 어느새/ 얼굴에 주근깨 핀 산나리가 되어/ 고개를 떨군 채 울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또/ 내가 사는 마을까지 따라와/ 가장 슬픈 한 마리 새가 되어/ 밤낮으로 소쩍소쩍/ 비워 둔 내 가슴에 점을 찍었다/ 아무리 지워도 지울 수 없는/ 검붉은 문신처럼 서러운 점을.//
고등어 / 임영조
등짝에 해조음 문신 알록달록한/ 간고등어 한 마리가 점잖게/ 가스레인지 그릴 속에 누워있다/ 불꽃이 온몸을 지글지글 구워도/ 오늘 같은 다비를 기다렸다는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있다/ 평생을 무슨 공부로 수신했길래/ 시뻘건 연옥에서도 고등어는/ 열반에 들 듯 태연할 수 있을까/ 파란만장 난바다를 헤쳐온 생이 못내/ 서럽고 억울할텐데, 육신을 어찌/ 저토록 마음 편히 보시할 수 있을까/ 뻣뻣한 몸이 꼭 서슬 퍼런 칼 같다/ 이판사판! 너 아니면 나 죽기식/ 피비린내 파다한 복수를 꿈꾸는 칼?/ 죽어서도 몸가짐 의젓한 고등어가/ 설마 누구를 찌를 마음을 먹었으랴/ 그렇게 본 내 마음이 멋쩍다/ 다 익은 살을 곧 뜯어먹을 나보다/ 등급이 몇 수쯤 위라는 생각/ 그래서 이름까지 高等魚?//
매미소리 / 임영조
감나무 가지 매미가 악쓰면/ 벚나무 그늘 매미도 악쓴다/ 그 무슨 열 받을 일이 많은지/ 낮에도 울고 밤에도 운다/ 조용히들 내 소리나 들어라/ 매음매음… 씨이이… 십팔십팔/ 저 데뷔작 한 편이 대표작일까/ 경으로 읽자니 날라리로 읽히고/ 노래로 음역하면 상스럽게 들린다.//
덩굴장미 / 임영조
오월 한낮 햇볕 아래/ 나른한 골목길 인적 뜸하다/ 누가 사는 집일까?/ 화사한 웃음소리 담을 넘는다/ 새빨간 립스틱 진하게 칠한/ 저 여자들 오늘이 곗날인가?/ 모처럼 하나같이 화색이 돈다/ 낮술 한 잔 걸친 듯 농염한 입술/ 귀 빌려주면 무슨 말 할까?/ 온몸이 지레 후끈거린다/ 못본 척 그냥 걷는다, 이봐!/ 새파란 덩굴손이 어깨 툭 친다/ 왜요? 돌아다보니, 오호호……/ 선혈이 낭자한 드라큐라/ 화려한 염문처럼 뒤따라온다/ 사방에 짜한 매혹적인 저 몸내/ 그 여자 입이 참 얇다/ 색이 너무 진하면 담을 넘듯/ 그 여자 입이 참 얇다/ 색이 너무 진하면 담을 넘듯/ 가시울 쳐도 새는 화냥끼/ 슬쩍 한 송이 꺾어?/ 그 여자 몸은 온통 가시다!//
나비 -곤충 채집 8 / 임영조
찬하의 바람둥이/ 건들건들 봄바람 몰고 오네/ 아직도 백일몽에 취한 듯/ 어질어질 갈지자로 날아오네// 오색 무늬 빛부신 錦扇/ 여봐란 득 살랑살랑 흔들면/ 햇빛가루 흩날리는 현기증/ 세상은 또 한차례 色이 動하네// 저 황홀한 춤사위로/ 꽃입술 헤벌어진 산도화/ 사리꽃 노린재꽃 엉겅퀴꽃 앵초꽃/ 일제히 손짓하며 발을 구르네/ 오빠! 오빠! 열광하는 십대들처럼// 오, 기가 승한 풍객이여!/ 너는 천지간에 수놓듯/ 소리없는 박수로 이승을 소요하니/ 가난도 한낱 사치겠구나/ 어디에 머문들 정 두지 않고/ 훨훨 자주 털고 가니/ 일생이 무겁지 않겠구나// 저 눈부신 율동/ 그 어느 대목을 주목해야/ 마음 한결 헐거워질까?/ 삶 또한 부끄럽지 않을까?/ 아랫죽지 자꾸만 시큰거리네.//
사마귀 -곤충 채집 11 / 임영조
햇볕 따가운 시선/ 머위잎 양산으로 가리고/ 목하 교미중인 사마귀 한 쌍/ 화끈한 외설이 눈길을 끈다/ 두 몸이 죽자사자 부둥켜안고/ 무아경을 헤매는 합궁, 아니/ 세상에 저런! 암컷이 수컷을/ 머리부터 아작아작 씹어먹다니!/ 얼마나 사랑했으면/ 온몸을 송두리째 먹고 싶을까?/ 얼마나 황홀했으면/ 목숨마저 기꺼이 주고 싶을까?/ 알다가 모를 엽기적 순애/ 나도 그런 사랑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열락에 빠져/ 사람 살려! 외칠 새 없이/ 마음 주고 몸 주는 마지막 보시/ 자살인지 타살인지 도무지/ 감잡기 힘든 논픽션 같은 죽음/ 두 개의 半身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가 되는 사랑이라면/ 나도 하나 만났으면 좋겠다/ 머리에 사마귀 감춘 여자/ 팔 다리 온통 톱니 세운 여자/ 말끝마다 오싹 가시 돋친 여자/ 참 지독한 여자 하나 만나고 싶다/ 너 정말 임자 만났다는 듯.//
반딧불 -곤충 채집 13 / 임영조
내 가슴속 어두운 방에/ 반딧불 하나 키웠으면 좋겠네/ 낮에는 풀잎 뒤 이슬로 숨었다가/ 밤이면 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깨우는/ 가장 절실하게 빛나는 언어가 되/는/ 더러는 꽃이 되는 원죄가 되는// 나 눈 번히 뜨고도 세상 어두워/ 지척을 분간하지 못할 때/ 아차! 발 삐끗 미망 속을 헤맬 때/ 반짝반짝 나만 아는 신호를 보내는/ 먼 그리움 같은 반딧불 하나/ 아무도 모르게 가졌으면 좋겠네// 내 영혼의 배터리가 다 닳아/ 삶이 시큰둥 깜박거릴 때/ 온몸을 짜릿짜릿 충전해주는/ 그 은밀한 사랑, 그게 혹/ 황홀한 고통의 마약일지라도/ 나는 죄짓듯 기꺼이 음독하겠네// 손만 대면 확! 뜨겁게 점등하는/ 알전구처럼 성감대가 민감한/ 반딧불 하나 환히 켜졌으면 좋겠다/ 쓸쓸하고 어두운 나의 빈방에.//
성냥 / 임영조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출옥하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다// 오랜 연금으로/ 흰 뼈만 앙상한 체구에/ 표정까지 굳어버린 돌대가리들/ 언제나 남의 손끝에 잡혀/ 머리부터 돌진하는 하수인이다// 어둠 속에서 갇히면/ 누구나 오히려 대범해지듯/ 저마다 뜨거운 적의를 품고 있어/ 언제든 부딪치면 당장/ 분신을 각오한 요시찰 인물들//
이발(理髮)을 하며 / 임영조
일요일 아침/ 이발소 거울 앞에 앉으면/ 한 달 전에 헤어진 나를 만난다.// 말없이 주고 받는 눈인사/ 그새 우리는 많이 수척해졌군,/ 그것은 결코 새로 미친 바람탓.// 스스로 전부를 맡긴다/ 서슬 퍼런 가위와 칼날 앞에/ 머리를 맡기고, 얼굴을 맡긴다/ 손발을 맡기고, 믿음까지 맡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듯/ 타인(他人)의 독선 앞에 관대했던가.// 정중하게 빛나는 가위 속에서/ 검게 자란 시간이 잘려나간다/ 턱밑에 무성하던 교만(驕慢)이/ 단칼에 모조리 스러질 때는/ 감격으로 차라리 눈을 감는다.// 조심조심 귀를 후빈다/ 밖에서 들은 치욕(恥辱)의 말씀들이/ 귓밥이 되어 웃음이 되어/ 시원하고 간지럽게 빠져나온다.// 그러나 눈에 박힌 가시는 또/ 어디 가서 파낼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노상/ 죄지은 사람처럼/ 속으로나 눈물 글썽거리며/ 날마다 시력을 잃고 사는가//
겨울 만다라 / 임영조
대한 지나 입춘날/ 오던 눈 멎고 바람 추운 날/ 빨간 장화 신은 비둘기 한 마리가/ 눈 위에 총총총 발자국을 찍는다/ 세상 온통 한 장의 수의에 덮여/ 이승이 흡사 저승 같은 날/ 압정 같은 부리로 키보드 치듯/ 언 땅을 쿡쿡 쪼아 햇볕을 파종한다/ 사방이 일순 다냥하게 부풀어/ 내 가슴속 빈터가 확 넓어지고/ 먼 마을 풍매화꽃 벙그는 소리/ 들린다, 참았던 슬픔 터지는 소리/ 하얀 운판을 쪼아 또박또박 시 쓰듯/ 한끼의 양식을 찾는 비둘기/ 하루를 헤집다 공친 발만 시리다/ 아니다, 잠시 소요하듯 지상에 내려/ 요기도 안 될 시 몇 줄만 남기면 되는/ 오, 눈물겨운 노역의 작은 평화여/ 저 정경 넘기면 과연 공일까?/ 혼신을 다해 사바를 노크하는/ 겨울 만다라!//
겨울 산행 / 임영조
눈 오다 그친 일요일/ 흰 방석 깔고 좌선하는 산/ 아무리 불러도 내려오지 않으니/ 몸소 찾아갈 수밖에 딴 도리 없다/ 가까이 오를수록, 산은/ 그곳에 없다, 다만/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로 남아/ 오랜 침묵으로 品을 세울 뿐/ 어깨는 좁고 엉덩이만 큰 보살/ 도량이 워낙 넓고 깊으니/ 나무들은 제멋대로 뿌리를 박고/ 별의별 짐승까지 다 받아주는/ 이승의 마지막 대자대비여!/ 뽀드득/ 뽀드득 잔설을 밟고/ 숨가쁘게 비탈길을 오르면/ 귀가 맑게 트이는 법열이여!/ 잡목들이 받쳐든 푸른 하늘에/ 간간 수묵을 치는 구름/ 눈짐 진 노송이 문득/ 잘 마른 화두 하나 던지듯/ 옜다! 솔방울을 떨군다/ 덤불 속에 멧새들이 화들짝 놀라/ 재잘재잘 산경을 읽는 소리/ 은유인지 풍자인지 아니면 해학인지/ 들어도 모를 난해시 같다/ (좌우간 정상에 있을 때 몸조심하고/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더욱 조심하도록)/ 귀뺨을 때리는 눈보라여!/ 단지 헝클어진 마음이나 빗으러/ 겨울산을 오르는 나는/ 리얼리스트인가?/ 로맨티시스트인가?/ 그것이 알고 싶어 산에 오른다.//
고백 / 임영조
저 지난가을 어느날/ 야생의 너와 만나던 순간/ 나는 대뜸 첫눈에 반했다/ 휘는 듯 곧고 푸른 절개와/ 새침한 듯 서늘한 자태가 좋아/ 내 마음속 빈터에 너를 심었다/ 허나 너는 삼동 내내 언 가슴 닫고/ 말을 일절 삼가고 침묵하더니/ 연둣빛 유두 하나 내놓고 또다시 침묵/ 내 깊은 心處에 그리움만 키웠다/ 그리움도 터지면 꽃이 되는가?/ 별러온 사랑 오늘사 고백하듯/ 혼신으로 피워내는 명명한 절창/ 청향 진한 몸내로 세상을 여는/ 오, 이름없는 춘란꽃이여!/ (나는 너무 쉽게 시를 써왔다)/ 그래 너는 얼마나 아프냐?/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게/ 얼마나 쓸쓸하고 서러운 축복이냐?/ 나는 당장 네 꽃술 속에 들어가/ 남은 생을 수펄처럼 잉잉잉/ 내가 대신 아프고 싶다/ 내 슬픔 골라 읽는 애독자처럼.//
화려한 오독 / 임영조
장마 걷힌 칠월 땡볕에/ 지렁이가 슬슬 세상을 잰다/ 시멘트 길을 온몸으로 긴 자국/ 행서도 아니고 예서도 아닌/ 초서체로 갈겨쓴 일대기 같다/ 한평생 초야에 숨어 굴린 화두를/ 최후로 남긴 한 행 절명시 같다/ 그 판독이 어려운 일필휘지를/ 촉새 몇 마리 따라가며 읽는다/ 혀 짧은 부리로 쿡쿡 쪼아 맛본다/ 제멋대로 재잘대는 화려한 오독/ 각설이 지렁이의 몸보다 길다/ 오죽 답답하고 지루했으면/ 隱者가 몸소 나와 배밀이 하랴/ 쉬파리떼 성가신 무더위에/ 벌겋게 달아오른 肉頭文字로//
시인의 모자 / 임영조
나의 새해 소망은/ 진짜 '시인'이 되는 것이다/ 해마다 별러도 쓰기 어려운/ 모자 하나 선물 받는 일이다/ '시인'이란 대저,/ 한평생 제 영혼을 헹구는 사람/ 그 노래 멀리서 누군가 읽고/ 너무 반가워 가슴 벅찬 올실로/ 손수 짜서 씌워주는 모자 같은 것/ 돈 주고도 못 사고 공짜도 없는/ 그 무슨 백을 써도 구할 수 없는/ 얼핏 보면 값싼 듯 화사한 모자/ 쓰고 나면 왠지 궁상맞고 멋쩍은/ 그러면서 따뜻한 모자 같은 것/ 어디서나 팔지 않는 귀한 수제품/ 아무나 주지 않는 꽃다발 같은/ '시인'이란 작위를 받아보고 싶다/ 어쩌면 사후에도 쓸똥말똥한/ 시인의 모자 하나 써보고 싶다/ 나의 새해 소망은.//
비누 / 임영조
이 시대의 희한한 성자(聖者)/ 친수성(親水性) 체질인 그는/ 성품이 워낙 미끄럽고 쾌활해/ 누구와도 군말 없이 친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온몸을 풀어 우리 죄를 사하듯/ 더러운 손을 씻어 주었다/ 밖에서 묻혀 오는 온갖 불순을/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 주었다/ 그는 성직(聖職)도 잊고 거리로 나와/ 냄새 나는 주인을 성토하거나/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들의 가장 부끄러운 곳/ 숨겨 온 약점 말없이 닦아 줄 뿐/ 비밀은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살면 살수록 때가 타는 세상에/ 뒤끝이 깨끗한 소모(消耗)는/ 언제나 아름답고 아쉽듯/ 헌신적인 보혈로 생(生)을 마치는/ 이 시대 희한한 성자// 나는 오늘/ 그에게 안수(按水)를 받듯/ 손발을 씻고 세수를 하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몸을 씻었다//
그네 / 임영조
어디서 명퇴한 중년일까/ 아파트단지 어린이 놀이터에서/ 반백의 사내가 아침을 민다/ 서너 살 손주 놈을 그네 위에 앉히고/ 줄을 꼭 잡아라! 놓치지 마라!/ 거듭 당부하면서 힘껏 밀어올린다/ 와와, 둥근 해가 솟는다 아이가 뜬다/ 허공 가득 퍼지는 해맑은 웃음소리/ 나뭇잎들 팔랑팔랑 손뼉을 친다/ 땅을 박차고 하늘 높이 올라라/ 올라가서 세상을 내려다보라/ 검버섯 핀 손등으로 그네를 미는/ 저 반백의 사내는 지금, 놓쳐버린 꿈/ 흘리고 온 세월을 미는 것일까/ 남은 생을 밀어내는 것일까/ 생이란 무릇 그네 타기 같은 것/ 아무리 밀어도 밀어 올려도 그네는/ 다시 제자리로 내려올 것이다//
해동갑 / 임영조
이제 다 와 간다, 아내여/ 두어 마장만 더 가면 정동진/ 우리는 지금 일출을 보러 간다/ 온갖 소음과 멀미로 잠을 설치며/ 새벽길을 내쳐 함께 달려왔으니/ 이명의 바다에서 솟는 해를 보리라/ 고요한 안식의 새아침을 꿈꾸며/ 우리가 밤마다 머리 두고 자는 곳/ 마음속의 해돋이가 정동진이다/ 아직도 가는 길이 낯설다 해도/ 여기가 어디냐고 묻지는 말자/ 오면서 우리가 떨구고 온 낙엽은/ 지상의 냉기를 다 덮진 못해도/ 볍씨들의 추위야 가려 주리라/ 어깨 참 뻐근하게 지고 온 등짐/ 무게도 달지 말고 계산도 말자/ 달아봤자 땀에 전 내복 같은 생/ 해지고 색 바랜 신발 같은 짐이다/ 이 남새스런 입성을 어디 버릴까/ 길 가다 슬그머니 꽁초 버리듯/ 그냥 아무데나 떨썩 부리고 갈까/ 구름도 흘러가서 오지 않고/ 바람도 불려가서 오지 않는 곳/ 미처 못 가본 세상 정동진으로/ 세월의 열차 타고 가는 길이다/ 몰래 마실 가듯 해동갑하듯/ 거의 다 와간다, 아내여.//
* ‘해동갑’ : 어떤 일을 해가 질 무렵까지 해나가는 것을 일컫는 말.
앞뜰의 살구나무 / 임영조
앞뜰에서 내내 빈 손 들고 서 있던/ 살구나무 한 그루 간 곳이 없고, 홀연/ 꽃상여 한 채가 기다리고 있었다/ 환등을 켜놓은 듯 사방 온통 환해서/ 나비도 어릿어릿 앉다가 이내 뜬다/ 다시 보면 연분홍꽃 새 이불/ 알몸으로 푸욱 묻히고 싶은/ 꿈도 없이 한 시절쯤 잠들고 싶은/ 꽃구름 한 채 둥두렷이 떠 있다/ 간밤 꿈에 어머니가 뵈더니/ 살구꽃 가마 한 채 보내신걸까//
임영조(任永祚, 1943~2003) 시인
충남 보령에서 출생. 서라벌예대 문에창작과 졸업. 1970년 《월간문학》 제6회 신인상에 시<出航>이,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木手의 노래>가 당선되어 등단. 2003년 사망하기 이전까지 6권의 시집『바람이 남긴 은어』, 『그림자를 지우며』,『갈대는 배후가 없다』,『귀로 웃는 집』,『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시인의 모자』와 수상시집 『고도를 위하여』, 시선집 『흔들리는 보리밭』 등을 출간. (주)태평양 홍보실 출판부장과 1994~1996년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과 2002~2003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장을 역임. 1995부터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교수로 출강. 1991년 제1회 '서라벌문학상'과 1993년 제38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2003년 췌장암으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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