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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주하 시인

부흐고비 2021. 4. 3. 23:04

추신 / 박주하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붉어진 앵두 같은 일
시다 달다 말도 못하고
핏방울 맺힌 혀끝으로만 굴리다가
밤길 홀로 걷다가 만난
빨간 우체통에 얼굴을 들이밀고
남몰래 중얼거렸지
사랑한다 너만 알고 있어라

 

벚꽃 회의 / 박주하

납골당 마당에서 긴급하게 가족회의가 열렸다 부친의 유골은 2층에 봉안되었는데 자식의 뼛가루를 3층에 올리는 것은 불효라고 주장하는 유족들, 울타리 넘어 봄날의 꽃밭으로 날아간 영혼의 행적은 묘연한데 고인의 뼛가루가 남아서 여전히 식솔들을 통섭한다. 납골당의 원칙을 내미는 관리인들과 생을 졸한 순서를 따지며 핏대를 세우는 유족들의 대치가 팽팽하다 오래된 벚나무들이 인간의 별난 절차를 경청하며 잎 먼저 틔운 삶과 꽃 먼저 피운 저들의 생애를 배심한다 생사의 위계질서가 설왕설래 하는 마당에 산벚의 꽃잎들이 하얗게 흐드러지고 겹친다 죽음이란 어쩌면 지는 저 꽃잎처럼 가볍고 아름답고 무정한 일, 멀리 간 사람은 입을 잃었으니 지나가는 바람의 목이나 한번 죄어볼 뿐, 꺾이지 않는 가족이란 말이 가죽처럼 질기다 고인의 여정이 소풍처럼 즐거웠으려나, 끝나도 끝난 게 아니어서 마지못해 불멸을 생각한다//

나의 진화론 / 박주하

모태에 들기 전/ 나는 사실 암컷이 아니었다/ 수컷이 될 수도 있었는데/ 어떤 이유로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그때 잠시 전투력을 잃었던 순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여러 면에서/ 갈등의 여지는 있지만 그 중/ 들어서는 안 될/ 강한 놈만 수컷이 된다는 말/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놈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투명 / 박주하

투명함이 번진다. 꿈을 감춘 새의 발가락은 점점 가늘어진다. 적막한 식욕으로 어딘가를 다녀오는 꿈, 어딘가를 다녀오는 생각들. 서랍 속에는 투명한 망설임들이 가득하다. 이렇게 한 생애가 저물 수 있겠다. 밖으로 새어나가는 어린 새의 투명한 울음//
파도 끝에서 새는 솟아오른다. 새가 울음소리를 풀어놓자 공중은 곧 흔적을 지운다. 투명의 자취를 지운 허공으로 새의 그림자가 모래알처럼 잘게 부서진다. 투명에 비친 이야기를 투명은 기억하지 못한다. 부서진 욕망들은 꿈에 가까워질수록 거꾸로 놓인다. 새는 투명의 내막을 알게 되었고 노래들은 후렴을 지우기 시작했다.//
고요에 몸을 씻은 새가 의자에 투명하게 앉아 있다. 늘 그랬듯 저녁은 낡은 기억들을 더듬으며 무거운 입술을 깨문다.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 마음을 만들지 않는 새들의 세계. 머무를 까닭을 버린 새는 칠흑의 밤을 날아오른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더 깊이 어두워지는 맨발//

나무에서 연잎 떨어지다 / 박주하

당신은 누구의 아픔으로부터 태어났습니까. 세상에 나와 보니 빗방울이 듣고 있었고 나는 마악 어떤 꽃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중인데요. 혹시 나를 돌아보았던가요. 막장을 거두는 새벽의 무늬가 아른아른 당신을 따라갔던가요. 간밤의 독주가 바늘을 끊어 마신 흔적처럼 목을 죄는데 막상 나는 꽃의 문을 열 수가 없군요. 꽃의 입구가 심장의 절정보다 뜨겁단 걸 정말 몰랐습니다. 내가 빠져나온 문은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까맣게 잊었는데 여명이여, 낙하하는 울음이여. 어디선가 떠도는 햇빛 한 줄기로 내 동공을 파낼 테니 그 자리에 목련 한 그루를 심어주시렵니까. 이 검은 연못의 상처를 발목 삼아 당신의 희고 화사한 생을 담는 물관이 되어드리지요.//

심장보다 높은 곳에 / 박주하

오른쪽 손가락을 깊이 베여/ 동네 병원에 갔다/ 바람의 방향이 불길하다 말하니/ 의사가 손가락을 꿰매면서 말했다// 손을 심장보다 높은 곳에 두세요// 난로에 왼쪽 손바닥을 데어서/ 다시 병원에 갔다/ 물집 속에서/ 나를 후려치는 험한 말들이/ 잔뜩 고여 농을 치는데/ 의사가 붕대를 감으며 말했다// 손을 심장보다 높은 곳에 두세요// 국숫물이 가슴팍에 쏟아져/ 살껍질이 꽃잎처럼 나달거렸다/ 후회가 붉게 열렸다/ 더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심장보다 높은 곳에 손이 닿지 않았다/ 심장보다 높은 곳에 얹어둘/ 그리움도 보이지 않았다//

사막의 잠 / 박주하

꽃이 아무리 추하게 진다해도 피어날 적의 아름다움은 영원하다지요. 나는 오늘도 부끄러운 하루를 꺾어들고 슬픈 얼굴로 잠을 청합니다. 수척한 잠의 행색으로 등이 휜 별들이 바닥으로 파닥파닥 내려갑니다. 별들은 밤 사이 낙타의 등에서 샘을 파고 바람이 불면 힘껏 날아오르겠지요. 투명한 얼음처럼 빛나던 별들은 또 얼마나 소란스러울지. 그러나 눈을 감고 참겠습니다. 이 지독한 세월, 본디 희망이란 부산스러운 것이니까요. 별들이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한 생을 가뿐히 넘는 동안 어디선가 꺾이지 못한 질긴 소망이나 젖지 못한 죄를 오래오래 반성하겠습니다. 적이 먼 이국의 강에서 모래바람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그래도 지금 바람에 묻어오는 어떤 꽃씨도 접수할 계획이 없습니다. 내 가슴에는 이미 가시 돋힌 붉은 선인장 하나가 처연히 자라나고 있으니까요. 내가 길러낸 날카로운 가시가 장난처럼 폐부를 깊숙이 찔러옵니다. 이 고통은 참을 수 없이 즐겁습니다. 피어날 꽃을 위하여 나는 오래오래 건조해지겠습니다.//

물왕리에서 / 박주하

그러나 이미 살구꽃 핀/ 저녁들을 후회하던 참,/ 골목마다/ 헐값으로 꿈을 밀어 넣고 나자/ 모든 것이 사소하고 충분했으며/ 비에 젖을수록 맨발은 딱딱해진다/ 위로가 습관임을 발설하기는 쉽지 않아/ 슬그머니 손을 놓고 돌아서지만/ 물 깊어 건너지 못하는 다리는/ 결코 당신의 불운이 아니다/ 꽃을 사랑한다면/ 끔찍한 마음은/ 그 꽃 밑에 누워야하는 일인데/ 마음을 다쳐 몸 안에 갇혔으니/ 입 벌린 고요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 캄캄하고 작아진 마음들이/ 아득아득 밀려드는 저녁/ 공복을 핑계 삼아/ 질기게 불안을 껴안으니/ 불행을 너무 쉽게 불태우고 난 기분,/ 소리 없이/ 혼자 뜨거워진 심장을 버리고/ 흰 새떼가 떠나간다//

몰(歿) / 박주하

숲은 나비의 운세를 접었다. 춘몽과 길몽 사이를 오가며 한가로이 춤을 출 것이란 말, 온 들에 꽃이 만발하였으니 그 향기를 탐낼 것이란 말, 그런 희망은 아무래도 미래에 닿지 않는다. 다만 오늘의 힘겨운 숨을 몰아 묵시(默示)의 수렁에 흘려 넣는다. 심호흡을 물방울에 적셔 후박나무 잎새에도 적어둔다. 햇빛을 쫓아 자리를 가려 앉는 나비의 잔등이 반짝인다. 저렇게 여리고 아름다운 등짝을 가진 자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 되기 이전의 문법. 일생을 등만 보이며 목숨을 일군 이를 안다. 그는 미래를 가진 적이 없으며 미래를 원한 적도 없다. 미래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더 깊은 미래에 있는 것 같은 그의 그림자에선 향기가 났다.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는 그의 겨드랑이에서 풍기는 몰(沒)의 내음. 가뭇가뭇 흔들리는 그 숨결을 더듬다가 붉은 꽃잎처럼 문드러진 전생이 있다. 찢어진 날개를 접는 나비에게 넌 누구의 상처냐, 물었을 때 그는 말했다. 나는 언어들이 지나가는 몸, 벌레들이 꾸는 꿈. 숲은 최초의 감정으로 나비를 받아 안는다. 더 어둡고 더 먼 곳을 바라보는 나비의 눈빛 속에서 바람이 분다. 沒의 틈이 격하게 벌어진다.//

폭풍의 언덕 / 박주하

당신의 입술에서 피냄새가 났다. 그 시간 거울 속으로 알몸의 가을이 들어와 석양에 물든 강물을 꽂기 시작했고, 강의 저편으로 늘 마지막인 듯한 기차가 언덕을 스쳐갔다, 순간 지난한 슬픔의 당신이 미뤄두었던 여행처럼 빈정거렸다, 자긴 누구야? 검은 침묵과 생의 잡목에 대못을 박고 재빨리 회전하는 당신을 보았다, 자긴 왜 발자국을 남기지 않아? 나는 벌떡 일어나 당신의 가슴을 뜯어보았다, 파도의 바닥이 펼쳐지고 당신의 갯벌에선 마른 신음소리가 났다, 아직은 아냐, 음악이 되기까지 당신의 비명은 조금 색다른 저음을 품어야만 했다, 위태로운 바람은 떨고 있는 당신의 영혼을 한사코 깊은 숲속으로 몰아넣었다, 더, 더 깊은 흑암(黑巖)의 연못에 이르기 위해 휘몰아치는 당신 곁에서 나는 내 잎의 여름을 모두 비워버렸다, 거울 속의 가을이 뿌옇게 울기 시작했다, 이 단풍잎은 당신이 가져,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나를 창백하게 돌아다보는 당신의 젖은 눈에서 철지난 앵두꽃이 피었다, 사랑을 끝낸//


 

박주하 시인
1967년 경남 합천에서 출생.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불교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항생제를 먹은 오후』와 『숨은 연못』이 있음.

2006년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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