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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황성희 시인

부흐고비 2021. 4. 2. 08:45

부부 / 황성희

낱말을 설명해 맞추는 TV 노인 프로그램에서
천생연분을 설명해야 하는 할아버지
"여보 우리 같은 사이를 뭐라고 하지?"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 손가락 넷을 펴 보이며
"아니 네 글자"
"평생 웬수"

어머니의 눈망울 속 가랑잎이 떨어져 내린다
충돌과 충돌의 포연 속에서
본능과 본능의 골짜구니 사이에서
힘겹게 꾸려온 나날의 시간들이
36.5 말의 체온 속에서

사무치게 그리운
평생의 웬수

 

어머니의 봄 / 황성희

날씨가 풀렸으니 된장도 담그고 고추장도 담아/ 보내신다는 어머니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낯익은 담벼락에 나풀거리는/ 메모지 한 장으로 날아왔다/ (주차하세요, 저는 8시에 돌아옵니다)/ 광고전단처럼 가볍게// 앞뒤 마음 안에 쌓인 적막을 털어 내며/ '내 한참 때는' 그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시는 팔순 어머니// 자식은 평생 애물단지라고 늘/ 말씀하시는 종려나무 어머니/ 어머니 봄에서는 왕 눈깔사탕 맛이 난다/ 어릴 적/ 온종일 입안에 넣고 추억처럼 굴렸던//

가을 유서 / 황성희

환히 웃을수록 우는 얼굴이 된다/ 맹그로브나무 아버지/ 텅 빈 시간의 놀이터에/ 마른기침 소리를 내며 단풍잎으로 구르고 있다// 뻘 세상 속에서 가장이라는 짐을 지고/ 부딪치며 떠돌며 흘러온 날들/ 한잔 술에 기대어 하루치 외로움을/ 달랬던 순간, 순간들이// 한잎두잎 시간의 금빛 흔적이 되어/ 철지난 유서로 쌓이고 있다//

마음의 고향 / 황성희

좌판 위에 놓여 있는 한 무더기 감 속에는/ 말간 하늘빛 고향이 어려 비친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산 마을// 저녁연기 피어오르고/ 한 집 두 집 창호 문에 흐른 불빛이 번져나면/ 어머니 품속 같은 노을이 내려온다/ 골목을 적시는 밥 짓는 내음 속에// 누구야 밥 먹어라 외치는 소리/ 아래 웃마을 개짓는 소리에/ 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고단한 하루가 옷깃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낸다// 딸그락 딸그락 숟가락 소리/ '우리 강아지 많이 묵어라'며/ 아이들 엉덩이 토닥이는 소리에/ 붉게 익어가던 가을 고향이 들려 온다//

꽃게의 하루 / 황성희

세상은 날마다 위험하고/ 인생은 갈수록 위태하다고 했던가// 제 몸보다 큰 생선을 뜯고 있다 쉬임없이/ 구럭에 갇힌 투구게 몇 마리/ 치열한 격랑의 시간을 거품으로 물었다 품어내기도 하며/ 고단한 하루를 차 오르는 포만감으로/ 밀어내기도 하며/ 간간이 망고 빛 하늘 침묵에 잠기기도 하면서// 저 깊은 곳 야성의 외침도 들으며/ '여기 꽃게탕 이 인분'// 길고도 짧은 게의 한 생애가 끓고 있다//

앨리스네 집 / 황성희

일렁이는 수면 위로 밤하늘이 비친다./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가 다가온다./ 놀란 그림자들이 몸 밖을 뛰쳐나간다.// 물고기 한 마리가 도시락을 들고 종종걸음을 칠 때의 풍경이다.// 집들은 눈을 감은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아무 질문도 하지 못한 지 수천 년./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 지 수천 년./ 헤엄을 치는 물고기는 자신이 물고기임을 의심치 않는다.// 회색의 뻣뻣한 전봇대를 끼고 돈다./ 교묘한 속임수처럼 전선이 뻗어 있다./ 수면 위로 어머니가 몸을 수그리신다./ 담벼락에 바짝 붙어 숨을 죽인다./ 비늘을 떼어줄 테니 그만 물 밖으로 나오너라./ 놀란 물고기는 아가미를 벌렁거린다.//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집은/ 오늘도 멀기만 한데/ 물고기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가고/ 시계 속에는 시계 바늘이 없다.//

그냥 평범한 드라이브 / 황성희

강철로 된 새가 하늘을 나른다./ 나는 차 문을 열고 단물이 빠진 시간을 뱉는다.// 당신과 나./ 우리는 드라이브중이다./ 오늘을 마친 태양이 하늘 밖으로 흘러내린다.// 당신과 나./ 우리는 드라이브중인데/ 우리는 아무도 운전하지 않고/ 우리는 둘 모두 운전을 하며/ 신원미상의 고속도로를 규정속도로 달린다.// 도로가의 기린들이 하나 둘/ 백색 제 머리를 둥글게 부풀린다./ 새로 깐 시간의 알몸에서는 딸기향이 난다./ 당신은 풍선 터지는 소리를 성가셔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속도로 위에서/ 어떤 일도 일어나는 고속도로 위에서/ 당신의 빈 몸을 타고 달리는 내가/ 나의 빈 몸을 타고 달리는 당신이/ 풍선이라도 불지 않으면 역사퀴즈라도 주고받으란 말인가./ 이 드라이브의 기원 같은 뭐 그런.// 오, 제발./ 그냥 풍선이나 터뜨리시지.//

탤런트 C의 얼굴 변천사 / 황성희

사이렌이 울린다. 시계는 오전 10시를 막 넘어섰다. 탤런트 C는 성형수술한 것이 틀림없다. 백색 화환을 공손이 받쳐든 의장대 뒤를 대통령과 영부인이 뒤따른다. 소복을 입고 가슴에 검은 명찰을 단 쪽을 진 여인의 얼굴도 얼핏 뵌다. 나는 물론 그녀를 모른다. 탤런트 C는 턱을 깎았다. 분명하다.// 사이렌이 울린다. 나는 묵념을 하지 않는다. 탤런트 C는 광대뼈도 깎았다. 남편은 내가 그녀를 질투한 나머지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하지만 나는 탤런트 C가 출연한 드라마를 데뷔작부터 전부 알고 있다. 그녀는 분명 변했다.// 45년도에 광복을 맞았는데 어떻게 48주년 현충일이라는 건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나 현충일과 광복절을 혼동했음을 깨닫는다. 탤런트 C의 공백은 정확히 1년 2개월. 안면 윤곽술의 경우 회복기간이 오래 걸린다더니. 오늘은 샌드위치 휴일. 부기는 거의 빠졌지만 그녀는 이미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아.......... 알려줘야 하는데. 원래 어떻게 생겼었는지. 탤런트 C 말이다. 적어도 남편에게는 증명해야 하는데. 그녀를 시샘해 괜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지금 중계되는 현충일 기념식보다도 더 생생한 사실이란 걸, 탤런트 C의 얼굴 변천사 말이다. 알려줘야 하는데//

4를 지키려는 노력 / 황성희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몸짓/ 유리창에 비친 어떤 시간의 눈알/ 4를 지키려는 노력/ 한 손에는 지우개를 꼭 쥐고/ 애처러운 기교, 기만을 닮은 성실/ 한때 고래 지키는 사람을 꿈꾸었지만/ 바다 속을 염탐하지 않겠다는 약속/ 나무를 따라 흘러가는 바람을 두고/ 벽에 비친 내 그림자, 놀라는 게 이상할까/ 멀리 있는 별이 흐릿한 건 당연한 일/ 보이지 않는 것을 궁금해 하지 마/ 심장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닦고 또 닦아라/ 4를 지키려는 노력, 그것만이/ 태양 아래 산책을 즐기는 비법//

구름의 생각 / 황성희

구름이 흘러간다/ 나의 생각이다// 구름 새의 구름 머리/ 나의 생각이다// 구름 새의 구름 깃털/ 나의 생각이다// 구름은 하늘에 없다/ 구름은 나의 생각 속에 있다/ 땅을 베고 누운/ 나의 생각 속에 있다// 땅은 나의 생각이다/ 누웠다는 것도 나의 생각이다/ 팔이 저리다는 것은…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것은 나의 생각이다// 구름에게는 생각이 없다/ 구름은 나에게 생각 당할 뿐이다/ 그것이 매우 억울할 것이다/ 이것만은 구름의 생각이었으면 하지만/ 구름의 생각 또한 나의 생각이다// 생각이 흘러간다/ 나의 구름이다//


 

황성희 시인
1972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200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 <엘리스네 집>, <4를 지키려는 노력>

‘21세기 전망’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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