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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호상好喪 / 김경순

부흐고비 2021. 4. 5. 12:47

호상이라고 했다. 여든여섯 해를 살다간 아버지가 한 평 남짓한 집에 드신 날 사람들은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 위로의 말을 던졌다. 지난밤 아버지는 자정을 몇 분 남기지 않고 먼길로 떠나고 마셨다. 추석을 사흘 앞둔 터라 장례는 짧은 삼일장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마른 고춧대 위에 수북이 쌓인 아버지의 옷가지에선 망자의 혼인 양 습한 연기가 스물스물 기어 나오고 있다. 매캐한 연기는 어머니의 눈가를 뭉그대다 이내 아버지가 소싯적 뛰놀던 마을 쪽으로 몸을 비튼다. 연기는 당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또 그 할아버지 할머니 혼백이 모셔진 마을 위쪽의 사당을 향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상을 치르는 내내 말씀이 없던 어머니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자 집도 잘 찾네 그랴. 거기가 당신 집인 줄은 잘도 아는구먼…….”

어머니는 친척들 간에도 곡을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던 분이었다. 하지만 망자가 되어 먼 길을 떠나는 지아비의 마지막 길엔 구슬픈 곡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인 절도 하지를 않았다. 우리는 어머니의 기이한 행동이 허락도 없이 떠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발로쯤으로 여겼다.

뭐든지 늦게 깨닫는 나는 우리 어머니도 세상의 어머니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아비의 삶에 가려져, 자신의 존재란 언제나 두 손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같아, 지아비가 무너지면 자신마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더 이상 어머니의 하늘은 사라져 버리는 줄만 알았다. 어머니의 이러한 행동의 원인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어 달 전, 아버지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어머니를 불러 앉혔다. 그리고는 불편한 자세로 큰 절을 넙죽 하셨다.

“임자, 자식들 잘 키워줘서 고맙습니다. 그동안 속 썩여서 미안합니다.”

아버지는 근 2년을 뇌경색으로 중환자실과 일반병실을 오가셨다. 병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온 아버지는 대여섯 살의 아이로 변해 있었다. 무엇이 아버지를 두렵게 했던 것일까.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당신이 화장실에서 뒷일을 볼 때도, 어머니가 텃밭의 남새를 뜯으러 갈 때도 어머니의 손을 놓지 못하셨다. 그날의 일은 아마도 가끔씩 본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었는데 그 순간이 그때였지 싶다. 당신 삶의 종착역이 다다른 것을 직감하셨던 것일까.

아버지는 어머니가 열아홉에 시집을 온 이후로 이때까지 어머니의 손에 제대로 돈을 쥐어 준 적이 없었다. 그나마 어머니가 남의 집일을 해주고 받아온 품삯은 아버지의 노름 돈으로 빼앗기기가 다반사였다. 때문에 지난한 세월의 흔적이 어머니의 거친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처럼 옹이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어머니의 삶의 보상을 큰절로 해주려는 것이었을까. 철옹성인줄만 알았던 어머니의 닫힌 마음이 그 이후로 서서히 뚫리고 있었던 것을 자식들 중 그 누구도 몰랐다.

예로부터 곡을 한다는 것은 망자에게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죽은 자를 위한 것보다 산자들을 위한 행동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팔십 고개를 넘은지 두 해가 넘은 어머니가 대소변을 가리지도 못하는 아버지를 아들처럼 보살펴주었는데, 어머니가 곡을 하길 원하고 절을 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인지 모른다.

빈들에 섰다. 텅 빈 밭에는 된서리에 힘을 잃은 콩대 한 무더기가 널브러져있다. 그 속에서 당신의 모습인 양 다 무른 꼬투리를 따는 어머니의 어깨위로 가을볕이 앉아 있다. 멀리 보이는 봉래산 낙엽송이 겨울 문턱 에서 노랗게 신열을 앓는 중이다. 가만 보니 신열을 앓는 것은 낙엽송만이 아니었다. 속도 겉도 다 비워낸 어머니는 동천冬天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몇십 번의 겨울을 맞이하고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해마다 치를 통과의례도 없다. 길고 긴 겨울을 위해 어머니는 저렇게 알맹이도 없는 쭉정이를 당신 가슴속에 가득 채워놓는 중이리라.

가을볕이 어머니의 등을 지나 웃말 산을 다 넘도록 나는 그렇게 밭둑에 붙박이가 되어 앉아 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자리였다. 어머니가 고추밭에 김을 다 매고, 그도 모자라 해가 서산을 다 넘도록 밭둑에 거적을 깔고 앉아 아버지는 어머니를 기다렸다. 주인을 잃은 자리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왜 몰랐을까.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효도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한 달 남짓한 기간을 중환자실에서 생명의 징후를 알려주는 기계들로 의지하고 있었다. 면회를 하러 들어가면 초점도 없는 눈으로 맞아주시던 아버지가 유독 어머니만 보면 침도 넘어가지 못하게 막아놓은 관을 비집고 무어라 말을 하시는 듯 했다. 신기 하게도 오빠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어머니는 단박에 알아듣는다는 사실이었다. 밥을 달라는 말임을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묻는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무어라 물으면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찬이라고는 두세 가지 밖에 없던 어머니가 차려 준 그 밥상이 죽음의 문턱에서 왜 그리 그리웠을까. 면회를 마치고 나오면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가자며 어머니는 자식들을 회유하다가도 자식들이 듣지 않으면 병원 복도에서 큰소리로 실랑이를 벌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뜻대로 한다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생명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기에 우리는 어머니의 간절함에도 매정하게 외면 할 수밖에 없었다.

둥글게 말고 앉아 있는 어머니의 비쩍 마른 등이 노량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나를 느끼신 모양이다.

“올해는 서리태를 못 먹게 생겨서 어쩌냐, 서리가 이렇게 몇 번을 내렸는데도 익지를 않고……. 콩대도 다 죽고 꼬투리도 다 쭉정이여.”

어머니는 서리태 몇 알을 쥔 손을 펴 보이셨다. 어머니의 가슴 빛을 닮은 쭈그렁 까만 서리태가 문득 어머니와 겹쳐 보였다. 만약에 그때 아버지가 잡숫고 싶어 하는 것이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인 줄을 알았더라면, 아니 그토록 그립던 이가 어머니인 줄 알았더라면 나와 오빠는 이렇듯 후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제 막 당신들만의 마음 밭을 그리움이라는 쟁기로 갈기 시작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았더라면 호상이라는 말로 어머니를 숨어서 울게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경순 수필가는 충북 음성에서 나고 자랐으며, 한국교통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월간문학〉 수필로 등단하여, 한국문인협회 회원, 음성문인협회 회원,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수필집 ‘달팽이 소리지르다’ ‘애인이 되었다’ ‘돌부리에 걸채어 본 사람은 안다’ 등을 펴냈으며, 논문으로 ‘김희경 소설의 욕망과 콤플렉스 양상 연구’가 있다. 제4회 충북여성문학상, 제1회 CJB TV백일장 수필부문 장원, 대표에세이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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