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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시조창 / 최문석

부흐고비 2021. 4. 6. 13:03

음악이 가슴에 와 닿을 때가 있다. 그것은 소리를 내는 사람의 능력이기도 하지만 듣는 이의 마음 상태와 맞아떨어져야 되는 일이기에 음악을 들을 때마다 있는 일은 아니다.

최근에 나는 시조창 한 곡을 듣고 참으로 감명을 받은 일이 있다. 경상남도내의 선생님 전통예능 경진대회에 입상한 분들을 시상하는 자리에 앉았다가 대표작 몇 편이 발표되는 기회에 시조창 한 곡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단소로 곡을 잡고 장구로 장단을 맞추면서 머리에 유건을 쓰고 단정히 앉아서 조용히 뿜어내는 가락을 듣는 순간 나는 그만 몸을 바로 세우고 눈을 감고 말았다. 그것은 순전히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을 감고 난 뒤의 나의 모든 신경은 귀로 모였던 것 같다.

청아한 소리가 은은히 가슴을 울리며 나의 전신을 퍼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인간의 뱃속에서 나오는 소리가 그렇게 맑을 수가 있을까. 인간의 몸속에서 떨리는 소리의 흔들림이 그토록 은은할 수가 있을까.

나는 그만 어느 계곡의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듯 물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 같기도 한 창의 소리를 따라서 높고 낮음이나 크고 작음도 잊어버린 채, 그 속에서 나 자신을 완전히 잊고 만 것이다.

호흡이 정지된 듯 내가 머문 시간은 먼 태고의 시간이요, 내가 앉은 자리는 사람이 살지 않는 깊은 산골 같기도 했다. 밤새 헤매다가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고가에서 여우가 둔갑한 예쁜 여인을 만나는 얘기 속의 산골 같기도 하고, 흰 수염을 날리며 긴 막대기를 짚고 내려오는 도인을 만나는 바위 밑의 산골 같기도 하고, 냇가에 숨어서 선녀들의 목욕하는 모습이라도 훔쳐보는 계곡의 산골 같기도 하다. 그야말로 나는 시간과 공간을 잊은 채 소리와 더불어 시공을 꿰뚫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일은 크게 이루는 일이다. 그러한 경지에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도인이리라. 그러나 잠깐이라도 나를 잊고 시공을 넘어서는 순간은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을 하는 순간의 운동선수의 환호라던가, 몇 년 만에 만나는 부부가 공항에서 포옹하는 순간이 그런 것이다. 그 순간에는 사람들의 시선도 내가 선 자리도 잊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현상이다. 고해의 바다에서 피나는 수련으로 깨달음이 얻어지는 것이라면, 오랜 시간의 인내와 노력으로 성공을 얻는 순간의 행복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대학에 합격발표를 보는 순간의 수험생이나, 정상에 오른 등산가의 기쁨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그만 박수 소리에 눈을 뜨고 말았다. 노랫소리가 그친 것이다. 눈을 뜨니 그곳에는 의자에 앉아서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보인다. 합격의 기쁨과 낙선의 슬픔이 있고, 상을 주는 사람과 상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하면서 열심히 각자의 삶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그 각자의 삶을 잠깐 잊고서 모두가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시공을 뛰어넘게 한 음악 한 곡이 그곳을 흘러갔을 뿐이다.

장자는 바람 소리까지도 땅의 음악이라 했다. 세상의 온갖 구멍에서 나오는 만 가지 소리들의 자연스러움, 그것은 하늘의 음악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우리 같은 범인의 가슴에 울려오는 음악은 인간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인간의 소리라야 가슴에 와 닿는 음악인가 싶다. 그런데도 그 목소리는 어찌하여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순간에 내 가슴속에서 스스로 물소리 바람소리로 들려오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시조창 한 곡을 듣고 감격하는 순간에 사람의 음악을 통해서 땅의 음악을 듣는 경험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노래하는 이의 마음과 듣는 이의 마음이 하나로 되는 순간이요, 모두의 마음이 비워지는 순간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에게 참으로 중요한 경험이요, 신비적 경험이다. 무아지경과 무심지경이 무엇인지를 알면 사물에 대한 온갖 어려운 시비를 가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도 열심히 일러준 장자의 말씀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토록 가슴에 와 닿았던 어느 날의 음악 한 곡은 어쩌면 빈 가슴속으로 스쳐간 한 줄기 맑은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최문석(崔文錫) 수필가: 

1941년 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동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대학교 문리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7년 「월간문학」등단, 경남수필문학회 회원,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원.

수필집: 『에세이 첨단과학』 『살아 있는 오늘과 풀꽃의 미소』 『최문석의 시론』 『최문석의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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