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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전봉건 시인

부흐고비 2021. 4. 8. 12:32

피아노 / 전봉건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사랑 / 전봉건

사랑한다는 것은// 열매가 맺지 않는 과목은 뿌리째 뽑고/ 그 뿌리를 썩힌 흙 속의 해충은 모조리 잡고/ 그리고 새 묘목을 심기 위해서 깊이 파헤쳐 내 두 손의 땀을 섞은 흙/ 그 흙을 깨끗하게 실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모진 비바람이 삼킨 어둠이어도/ 바위 속보다도 어두운 밤이어도/ 그 어둠 그 밤을 새워서 지키는 일이다/ 훤한 새벽 햇살이 퍼질 때까지/ 그 햇살을 뚫고 마침내 새 과목이/ 샘물 같은 그런 빛 뿌리면서 솟을 때까지/ 지키는 일이다 지켜보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뼈저린 꿈에서만 / 전봉건

그리라 하면/ 그리겠습니다./ 개울물에 어리는 풀포기 하나/ 개울 속에 빛나는 돌멩이 하나/ 그렇습니다 고향의 것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똑똑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그리겠습니다.// 말을 하라면/ 말하겠습니다./ 우물가에 늘어선 미루나무는 여섯 그루/ 우물 속에 노니는 큰 붕어도 여섯 마리/ 그렇습니다 고향의 일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생생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말하겠습니다.// 마당 끝 홰나무 아래로/ 삶은 강냉이 한 바가지 드시고/ 나를 찾으시던 어머님의 모습/ 가만히 옮기시던/ 그 발걸음 하나하나/ 조용히 웃으시던/ 그 얼굴의 빛무늬 하나하나/ 나는 지금도 말하고 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한 가지만은/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것만은/ 내가 그리질 못하고 말도 못합니다/ 강이 산으로 변하길 두 번/ 산이 강으로 변하길 두 번/ 그러고도 더 많이 흐른 세월이/ 가로세로 파놓은 어머님 이마의/ 어둡고 아픈 주름살.//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말로 하려면 목이 먼저 메이고/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그림으로 그리려면 눈앞이 먼저 흐려집니다./ 아아 이십 육년/ 뼈저린 꿈에서만 뫼시는 어머님이시여.//

코스모스 / 전봉건

가을에 피는/ 코스모스는/ 꼭 가슴께 만큼/ 그 만큼에서 꽃핍니다// 찬바람 부는/ 가을길을 걷다가/ 우리는.../ 잠시 손잡고/ 마주섭니다// 그러면 코스모스는/ 당신과 나의 두가슴 사이에/ 가득히 가득히 넘쳐서/ 꽃 핍니다// 찬 바람부는/ 가을길을 가다가/ 잠시 손잡고 마주선 우리/ 우리의 눈과 눈도/ 코스모스의 꽃잎처럼/ 하얀빛 자주빛 연분홍빛입니다//

처음으로 열리는 / 전봉건

처음으로/ 열리는 하늘인데// 하늘 끝까지/ 처음으로 펼쳐지는 들판인데// 들판을 적시며/ 처음으로 흘러내리는 강물인데// 강물을 흔들며/ 처음으로 쏟아지는 빗발인데// 빗발의 자리마다/ 처음으로 피어나는 꽃들인데// 그것들이 모두 다/ 우리 것인데// 오오 처음으로 꽃닢에서/ 꽃닢으로 이는 바람결인데// 그것들이 모두 다/ 우리 것인데// 어찌 사랑을 우리들 사랑을/ 시작하지 않으리// 꽃닢에서 꽃닢으로/ 이는 바람의 사랑을// 빗발의 자리마다/ 피는 꽃의 사랑을// 강물을 흔들며/ 쏟아지는 빗발의 사랑을// 들판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강물의 사랑을// 하늘 끝까지 푸르게 펼쳐지는/ 큰 들의 사랑을// 오오 하늘 속 눈부시게 밝히며/ 솟는 큰 산의 사랑을// 어찌 그 사랑을 우리들/ 시작하지 않으리//

석류 / 전봉건

여름이/ 두고 간 산을/ 누가 보았던가/ 와 있는/ 가을의 피를/ 누가 보았던가// 다만/ 十月 한낮/ 하늘 꼭대기/ 햇덩이/ 살 한 점/ 피 한 방울/ 아무도 모르게/ 떨어지더니// 저렇게/ 금빛 나는/ 석류 알마다/ 살로 피로/ 터지는/ 극채색이다.//

의식(儀式)·3 / 전봉건

나는 너의 말이고 싶다./ 쌀이라고 하는 말./ 연탄이라고 하는 말./ 그리고 별이라고 하는 말./ 물이 흐른다고/ 봄은 겨울 다음에/ 오는 것이고/ 아이들은 노래와 같다라고 하는/ 너의 말./ 또 그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불꽃의 바다가 되는/ 시이트의 아침과 밤 사이에/ 나만이 듣는 너의 말./ 그리고 또 내게 살며시 깜빡이며/ 오래/ 잊었던 사람의 이름을 대듯이/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는 평화라고 하는 그 말.//

팔월 / 전봉건

저걸 보셔요./ 팔월의 병사들이/ 와아아아 와아아 와/ 소릴 지르면서 왓핫하 왓핫하 하/ 웃음소릴 지르면서 철모에 퍼 담은 강을/ 온몸에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팔월의 병사들은 젊은 사자들./ 아무리 땅이 타고 하늘이 타 들어도/ 젊은 사자들은/ 시시하게 머릴 숙여/ 강물의 물을 마시질 않습니다./ 저길 보셔요./ 팔월의 사자들은/ 아무리 목 줄기가 타 들어도/ 꼿꼿이 세우는 머리위로/ 와아아아 와아아 와/ 소릴 지르면서 왓핫하 왓핫하 하/ 웃음소릴 지르면서/ 번쩍 들어 올린 강을 쏟아/ 온몸으로 들이키고 있습니다.//

옥수수 환상가 / 전봉건

1// 옥수수의 잎사귀가 날린다./ 다산형 공주님을 지키는 늙은 무사의 큰 칼날이다.//
2// 나는 여러 가지의 마음을 가졌다./ 한 대의 옥수수가 그 많은/ 씨앗을 가졌듯이.//
3// 옥수수가 익자/ 길은 바다로 트이고/ 그 위에 낙인처럼/ 찍힌 그림자./ 포플러나무의 진한 그림자에/ 넘쳐나는 푸름./ 나는 거기서도/ 샘물 소리를 보았다.//
4// 내가 먹은 옥수수도/ 번갯불과 장마와 아침 달이 만들었다./ 돌 부스러기, 벌레, 대낮의 해가 만들었다./ 썩은 개 뼈다귀와 저녁 별,/ 그리고 모든 종류의 바람이 그랬다./ 한량없는 꿈과 어둠을 먹고 살찌는/ 한량없는 욕정의 흙이 만들었다./ 내가 먹은 옥수수는.//
5// 무엇을 줄까./ 어느 것일까./ 가장 성스러운 잔인함으로 하여/ 너의 미각을 꽃잎처럼 피어나게 하고/ 눈부시게 할 것이./ 진주의 목걸이와/ 한 대의 옥수수와.//
6// 한 사람의 여자 속에 들어 있는/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랑의 남자 속에 들어 있는 한 사람의/ 여자 속에 들어 있는 한 대의/ 옥수수.//
7// 태양은 몇 개나 있어서/ 매일 아침 새것이 뜨는 것이었을까./ 어떻든 옥수수 한 대의 옥수수 씨알마다/ 태양은 하나씩/ 빛나고 있었다.//
8// 옥수수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밤길이었다./ 한 사람의 여자가/ 한 사람의 남자에게/ 말했다./ "비가 내렸으면/ 자고 갈 건데……"/ 검은 밤길에 잠시/ 젖빛 같은 것이 번졌다.//
9//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람 한점 없는 옥수수밭의/ 옥수수 알들일지도 모른다.//

암흑을 지탱하는 / 전봉건

그날 총알에 가슴으로 피를 뿜는 친구를 어깨에 걸쳐메고 나는 부러진 총부리와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불타는 거리를 더듬어 가끔씩 생각난 듯 눈먼 유탄(流彈)이 와서 박히는 한 건물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깜깜한 문지방을 넘으니 발바닥에 마루인 듯한 널판자가 밟혔고 널판자는 숨죽인 신음 소리 같기도 하고 비명 소리 같기도 한 그런 소리를 냈다. 나는 어깨 위에서 꿈틀거린 그를 고쳐메고 소리나는 어둡고 긴 마루를 지나 마침내 방인 듯한 곳에 이르렀으나 그곳도 역시 어두워 안보이는 눈을 껌벅거리며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깜깜하던 어둠이 차차 엷어지면서 희뿌연 밝음 속에 하나둘 나타나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책 의자 대야 부엌비 그런 것들이었고 또 호미 변기 사진 이불장 옷장 경대 그런 것들이었다. 아 등신대 크기의 경대에 반쯤만 남아서 붙은 거울 거기 비친 내 몰골 피 흘리는 몸뚱이 하나 어깨 위에 짊어멘 내 몰골은 마치 망령과도 같았다. 발끝에 걸리는 것이 있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저고리 치마 속옷 그런 것들이 아무렇게나 널린 두툼한 이부자리였다. 나는 그 위에 조심스러이 몸을 구부려 어깨에 걸쳐멘 그를 내려뉘었다. 이미 임종이 가까운 그의 두 눈은 그저 크게 뜨여 힘없이 벌어져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흔적도 없었고 또 자취도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이었던가. 텅 비어 있음에 다름아니던 그 두 눈에 빛이 고리고 바람도 이는 것이 아닌가. 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이 깃들이고 그 푸름도 깃들였다. 성좌(星座)가 아롱지는가 했더니 강물이 흘렀고 나뭇잎을 흔드는 숲이 들이차기도 했다. 훤하게 트인 길을 거느린 해안과 산맥이 굽이치기도 했다. 나는 그러한 그의 두 눈을 홀린 듯이 들여다보았다. 이제 그의 두 눈은 잔잔한 미소마저 띠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두 눈에 듬뿍 이슬 머금은 꽃덤불로 둘러싸인 샘물이 떠올라 넘칠 듯 넘칠 듯한 바로 그때였다. 그는 검붉은 피 엉겨 찌든 손가락을 들어 어슴푸레한 방 한구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옮겼다.//

거기엔 무엇이 있었던가.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항아리였다. 항아리 하나가 거기서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똑똑히 확인하기 위하여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다. 그런데 모를 일이었다. 내가 다시 눈떠 본 것은 항아리가 아니라 한 여자였다. 가느다란 모가지 고운 젖무덤 늘씬한 허리 풍만한 엉덩이 한 젊은 여자가 거기서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고 있었다. 풀어내는 스스로의 살빛으로 피냄새 절은 어슴프레한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이 모를 것은 넘칠 듯 넘칠 듯한 샘물을 둘러싸고 어우러진 꽃덤붗 듬뿍 이슬 머금은 꽃덤불의 짙은 꽃향기가 내 가슴팍에 젖어들고 아랫배에 젖어드는 일이었다. 이윽고 무지개처럼 광채 영롱한 성욕이 내 정수리를 눈부시게 꿰뚫은 그때였다. 나는 등뒤에서 날카롭게 뜨겁게 솟구치는 절규 한마디를 들었다. 그였다. 하지만 나는 그 한마디가 무슨 소리였는지 그것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는 또 한번 절규를 하려는 듯이 급하게 숨을 몰아쉬면서 안간힘을 써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의 입은 잠시 뒤틀리고 일그러졌을 뿐 절규를 내뿜지는 못하였다. 총알에 뚫린 가슴의 상처가 울컥 검붉은 한줌 핏덩이를 쏟아냈을 뿐이었다.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나는 그 방을 나오면서 어슴푸레한 어둠의 한두석으로 다시 눈길을 옮겼다. 거기서는 항아리 하나가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내 귀는 다시 등뒤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이제 절규가 아니라 그지없이 평화스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무슨 말이었는지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아무튼 그 목소리 그 한마디가 한 여자의 아름다운 이름에 다름아니었음은 분명했다.//
그뒤로부터 나는 확신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의 흙 우리의 땅덩어리가 아무리 처절한 죽음과 엄청난 피로써 얼룩진 암흑이라 할지라도 철 따라 과목을 꽃 피게 하고 열매도 맺게 하는 것은 그것이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는 항아리 또는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해서 지탱되어 있는 까닭이라는.//

겨울에 / 전봉건

찬 하늘/ 커피 한 잔/ 눈 눈 눈 눈 눈/ 구름이 흔들려서 날리던/ 김광섭의 눈/ 혹은 다시금 또 보이고/ 다시금 또 보이는…… 영(嶺) 기슭에/ 한 잎 또 한 잎 내려서 덮이던/ 김소월의 눈/ 또 혹은 북국 강녘에 밀수입 마차/ 지나는 소리 들릴 제 퍼붓던/ 김동환의 눈보라/ 이 문득 몰아치는 6·25의 눈보라/ 찬 하늘 닿은 첩첩 산등성이 퍼붓는 그 눈보라 속에 터지던 눈보라/ 새빨간 피보라 터지고 또 터지던 하얀 눈보라/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찬 하늘 춤고 떨리고 춥고 떨려서/ 비발디 <사계>의 <겨울>에서 불붙은 화로 따끈한 제2악장만 따내고/ 박용래의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는 저녁 눈과/ 서정주의 괜, 찮, 타, …… 괜, 찮, 타, …… 그렇게 수부룩이 내리는 눈발도/ 그리고 춘향이 흰 무릎 같은 눈송이 몇 개/ 황진이 흰 허리 같은 함박눈도 몇 송이/ 그리고 불붙인 담배/ 니코틴이 적은 썬 한 개비/ 그리고 따끈한/ 커피 또 한 잔//

눈 / 전봉건

삼십여 년 전에 나는 이북의 고향을 떠났읍니다 그날은/ 눈보라가 쳤읍니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눈 한 송이가// 내 등어리를 파고 들었읍니다 늙어 한쪽 눈만 보시는 어머/ 님의 그 눈 하나도 산모퉁이까지 쫓아와서 내 등어리를 파/ 고 들었읍니다 그 뒤로 나는 삼십여 년을 이남에서 살고 있/ 읍니다 어느덧 명치 끝에 스며들어 꽁꽁 얼어붙은 채 녹지/ 않는 눈 한 송이와 또 그 어머님의 한쪽 눈 하나와 함께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살고 있습니다//

꽃과 마음 / 전봉건

나는 꽃을/ 만질 수가 있지만/ 내 마음을/ 만질 수는 없어요.// 하지만/ 꽃은/ 내 마음을/ 만질 수가 있답니다.// 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색색가지 예쁘게 물드는 것은// 꽃이/ 색색가지 예쁜 손으로/ 내 마음을/ 만지작거리는 때문입니다.//

능금나무에서 / 전봉건

능금나무 가지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능금/ 나는 능금/ 아직은 어리고 철이 없어도/ 시기만 하진 않아요/ 당신이 깨물면 달기도 해요/ 허지만 허지만/ 가을이 오기까지는/ 햇살이 되어주세요/ 당신은 나를 기다리는/ 해살이 되어주세요//

작은 지붕 위에 / 전봉건

작은 지붕 위에 내리는 것은 눈이고/ 작은 창틀 속에 내리는 것은 눈이고/ 작은 장독대에 내리는 것도 눈이고/ 눈 눈 눈 하얀 눈/ 눈은 작은 나뭇가지에도 내리고/ 눈은 작은 오솔길에도 내리고/ 눈은 작은 징검다리에도 내리고/ 새해 새날의 눈은/ 하늘 가득히 내리고/ 세상 가득히 내리고/ 나는 뭔가 할 말이 있을 것만 같고/ 어디론가 가야 할 곳이 있을 것만 같고/ 한 사람 만날 사람이 있을 것만 같고/ 장갑을 벗고 꼭 꼭 마주 잡아야 하는/ 그 손이 있을 것만 같고//

서정(抒情) / 전봉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무에 걸린 바람도 비에 젖어/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내 팔에 매달린 너./ 비는 밤이 오면/ 그 골목에도 내리고// 비에 젖어 부푸는 어둠 속에서/ 네 두 손이 내/ 얼굴을 감싸고 물었다.//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장 뜨거운 목소리로.//

유방(乳房) / 전봉건

사과는 내 손에 넘친다./ 수밀도는 내 손에 넘친다./ 솜구름이 지나가면서/ 금의 바늘로 건드린다./ 아프고/ 간지러운/ 손바닥./ 둥근 하늘은/ 내 손에 넘친다.// 네 유방은 내 손에 넘친다.//

​속의 바다 –처용(處容)의 노래 / 전봉건

춤을 춘다/ 아직도 나는 춤을 추고 있어/ 나는 맨발이지/ 모래는 자꾸 반짝이면서 뜨겁다/ 물새가 난다/ 바다는 무수한 깃발을 흔들고 있어/ 감청(紺靑)과 빛의 깃발을 무수히 흔들고 있어/ 내가 노래할 수야 있지/ 내가 선언할 수야 있지/ 한 그루의 꽃나무는 꽃으로 해서 향기로웁다/ 가야금의 한 줄은 바람으로 해서 소리를 울린다/ 한 사람의 남자는 여자로 해서 언어를 가진다/ 내가 선언할 수야 있지/ 내가 노래할 수야 있지/ 그러나 이제 바다가 모래를 들먹이는 거기에// 네가 있어 알몸인 네가 있어/ 내 백옥유리(白玉琉璃)의 이로 네 발바닥을 물다가/ 내 만두삽화(滿頭揷花)를 네 가슴에 묻는다 해도/ 다시 하늘은 우리 머리칼 언저리서 열리지 않고/ 구름은 우리의 손가락을 삼키면서 흐르지 않아/ 해는 다시 우리 등허리에 와서 황금의 배를 비벼대지 않아/ 허나 춤을 춘다/ 나는 아직도 춤추고 있어/ 나는 일식(日蝕)의 아들/ 이 모래의 반짝임과 뜨거움과/ 저 물새의 비상이 허망(虛妄)일지라도/ 오오 바다가 흔드는 감청(紺靑)과 빛이 무수한 허망의 깃발일지라도/ 아직도 나는 춤추고 있어/ 오오일식(日蝕)의 춤을 추어//

진주(眞珠) / 전봉건

사랑하는 것의/ 구릿빛 등어리에/ 박힌/ 한 줄기 빛인/ 손가락의 반지의/ 그 은(銀)은/ 내가 캔 것이다../ 그 진주도 내가 키운 것이다.//

봄에 / 전봉건

구름 한점/ 햇살 한줌/ 진달래 몇 송이/ (스스로 죽은 김소월)/ 잎새에 이는 바람 한 자락/ (갇혀서 죽은 윤동주)/ 복사꽃 한 송이/ (미쳐서 죽은 이중섭)/ 모란꽃도 한 송이/ (눈먼 총알 맞아 죽은 김영랑)/ 저 6·25 한 달 전이던가 두 달 전이던가/ 삼팔선을 넘다가 총 맞고 낭떠러지 떨어져 죽은/ 한 소녀의 기억도 한 토막/ 꽃잎처럼 꽃잎처럼 날리면서/ 떨어져 죽은 그 소녀의 기억도 한 토막/ 그러고 보니 슬픈 피비린내 역겨워/ <춘향가>에서 "긴 그네줄을 섬섬옥수로 이리저리 갈라쥐고 몸을 날려 올라 한 번 굴러 앞줄이 높고 두 번 굴러 뒷줄이 높아 점점 높아 공중에 소소쳐……"/ 그 한 가락 따내고/ 비발디의 <사계>에선 <봄>만 따내고/ 비닐하우스에서 나온 별로 맛없는/ 그러나 덩치 큰 딸기 몇 개/ 말라붙은 쥐포 두어 장/ 언제나 시린 속 훤히 들여다보이는/ 소주 한 병//

봄 이제(二題) / 전봉건

(보리밭)
희멀건 것이 스친다/ 미끈하기도 하고/ 두루뭉실하기도 하다/ 검은 점, 두 개가 떠오르더니/ 햇방울로 흔들리다가 스러진다/ 바람이 움직인다/ 바람 아닌 것이 움직인다/ 바람 아닌 것이 움직이는 자리가/ 파란 불길이다.//
(안개)
말하지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지도 않는다/ 다만 적실 뿐이다/ 쇠줄에 매인 작은 배를 적실 뿐이다/ 작은 배에 실린 검은 어둠을 적실 뿐이다/ 부드럽게 촉촉이 적실 뿐이다/ 작은 배에 실린 검은 어둠에/ 한두 점 핏방울 같은 것이 돋는다/ 그것만은 적시어지지 않는다/ 바다도 하늘도 목베인 잿빛이다//

돌 2 / 전봉건

달밤엔/ 소문이 돌았다// 제주도/ 통영/ 마산/ 부산/ 또는/ 원산의/ 바닷가/ 젖은 모래톱에/ 달밤이면 달빛 같은 색깔의/ 고운 돌 하나가 서서/ 달빛 같은 소리로 운다는/ 소문이 돌았다.// 더러는/ 대구나/ 서울의/ 달빛 스며든 뒷골목에서/ 그 돌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중섭의 웃기만 하는 아이들 가운데/ 자지 달린 한 아이더라는 소문이었다.//

6 · 25 13 / 전봉건

동이 트는데// 햇살보다 먼저 총소리가 터지고 대포 소리가 터졌다 안방에서 터지고 건넌방에서 터지고 문간방에서 터졌다 마루방에서 터지고 사랑방에서 터지고 마구간에서 터졌다 때는 유월 이른 새벽 동이 트는데 햇살보다 먼저 수없이 많은 총소리가 터졌다 대포 소리가 터졌다 곳간에서 터지고 움 속에서 터지고 부엌에서 터지고 그리고 아궁이 속에서도 터졌다 그렇다 하늘에서 터지고 땅에서도 터졌다 햇살보다 먼저 터졌다//

6 · 25 17 / 전봉건

우리는/ 물동이를 버리고/ 가마솥을 버리고/ 논으로 가는 길도 버렸다/ 밭으로 가는 길도 버렸다/ 삽과 갈쿠리도 버렸다/ 닭을 버리고 돼지를 버리고 개도 버렸다/ 낫을 버리고 도리깨를 버리고 멍석을 버렸다/ 책과 책상과 연필과 지우개도 버렸다/ 비도 걸레도 버렸다/ 진달래가 우거졌던 언덕을 버리고/ 개나리가 들이찼던 골짜구니도 버렸다/ 우리는 버리고 또 버렸다/ 하나하나 우리는 죄다 버리고 그리고 떠났다/ 동트는 6월의 이른 아침에/ 이슬비 젖은 햇살이 퍼질 때에/ 우리는 다 버리고 떠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마시던/ 또 내가 마시던/ 샘물도 버리고 떠났다/ 촉촉이 내린 이슬비 젖은/ 햇살이 퍼질 때에/ 우리는 우리를 버리고/ 떠났다//

6 · 25 25 / 전봉건

어머니는/ 솥뚜껑을 열어놓고/ 보리밥을 푸다가/ 죽어 있었다// 누렁소는/ 가래를 멘 채/ 밭이랑을 베고/ 죽어 있었다// 아버지는/ 밭머리에 앉아서/ 막걸리 바가지를/ 기울이다가 죽어 있었다// 어린 동생은/ 제 머리통만한/ 개구리참외 반쯤이나 먹다가/ 죽어 있었다// 모두/ 그렇게 죽어 있었다/ 죽음 밖의 죽음을/ 죽어 있었다//

6 · 25 33 / 전봉건

문이/ 열리면/ 드륵// 새가/ 날아도/ 드르륵// 우리는/ 총을 쏴갈겼다// 지붕 위에서/ 햇살이 번쩍거리면/ 드르륵// 여울물에서/ 달빛이 들썩거려도/ 드르르륵// 길 아닌 데서/ 그리고 물론 길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나기만 하면/ 드륵 드르르륵// 우리는/ 총을 쏴갈겼다// 꽃덤불이/ 흔들려도/ 드르르르륵// 우리는/ 총을 쏴갈겼다//

과수원과 꿈과 바다 이야기 / 전봉건

이/ 창가에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오붓한 자리// 빵에는 쨈을 바르지요/ 오 아니에요./ 우리가 둘이서 빵에 바르는/ 이 쨈은 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 우리는 과수원 하나씩을/ 빵에 얹어 먹어요.// 이/ 불빛 아래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고요한 자리/ 잔에는 포도주를 따르지요/ 오 아니에요./ 우리가 둘이서 잔에 따르는/ 이 포도주는 포도주가 아니라 꿈의 즙/ 우리는 진한 꿈의 즙을 가득히/ 잔에 따라 마셔요.// 나는/ 당신 앞에 당신은/ 내 앞에/ 둘이서만 만난 둘만의 자리/ 사실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오 배가 불러요/ 보세요/ 우리가 정결한 저를 들어/ 생선의 꼬리만 건들어도/ 당신과 내 안에 들어와서 출렁이는/ 이렇게 커다란 바다 하나를.//

꽃. 천상의 악기. 표범 / 전봉건

눈 내린 광장(廣場)을/ 한 마리의 표범의 발자욱이 가로질렀다./ 너는 그렇게 나로부터 출발(出發)해 갔다./ 만월(滿月)이 된 활처럼 팽창(膨脹)한 욕망(慾望)./ 너는 희안한 살기(殺氣)를 뿌리면서 내달았다./ 검은 한 점(點)이었다./ 나의 모든 꿈의 투기(投企)인 너.// 그 후/ 나는 몇 번인가 너를 보았다./ 귀마저, 너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창(窓)이 무너져 내리는 전쟁(戰爭)의 거리에서도/ 그때마다 돌맹이가 꽃을 낳았을 것이다./ 모래밭은/ 꽃밭을 낳았을 것이다.// 죽음을 역습(逆襲)하였을 것이다./ 눈부신 연애(戀愛)가/ 햇살처럼 지구(地球)를 지배(支配)하는/ 시간(時間)을 위하여서 너의 천상(天上)의 악기(樂器)가/ 불붙는 암흑(暗黑)속에서/ -- 죽음을.// 나는 알고 있다/ <하늘에 핀 꽃> 그러한 것이/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서/ 태어날 것인가. 허나/ 아 젊은 표범처럼/ 불붙는 암흑(暗黑) 속으로 언제나/ 언제 까지나 내닫는 너를.//

물 / 전봉건

나는/ 물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웅뎅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개울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샘이나 늪 못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강이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바다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또 있습니다/ 이슬이라는 말입니다// 삼월 어느날 시월 어느날 혹은 오월의 어느날/ 꽃잎이나 풀잎에 맺히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물/ 가장 여리고 약한 물 가장 맑은 물을/ 얼음인 이 말과 만날 때면/ 내게서도 물기운이 돌다가/ 여위고 마른 살갗 저리고 떨리다가/ 오 내게서도 물방울이 방울이 번지어 옵니다/ 그것은 눈물이라는/ 물입니다//

치맛자락 / 전봉건

비가 오면/ 당신이 오시리라고// 꽃이 피면/ 당신이 오시리라고// 나비가 가면/ 당신이 오시리라고// 아 그러나// 한 잎 꽃잎이 지면 전쟁이/ 아니라 오신 당신의 펄럭이는/ 연분홍 치맛자락의 탓이라 알겠습니다.//

전봉건(全鳳健) 시인

△1928년 평남 안주 출생, 1988년 영면. △평양 숭인중학교 졸업 후 월남. △1950년'문예'에 시 '원(願)' '사월(四月)' '축도(祝禱)' 등 미당과 영랑의 추천으로 등단. △'예술시보' '문학춘추' 등 편집 실무, '현대시학' 창간 및 주간, 자유문협 상임위원, 문총 중앙위원, 한국시인협회 간사 및 중앙위원 역임. △제3회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 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시집 : '사랑을 위한 되풀이' '춘향연가' '속의 바다' '북의 고향' '돌' '트럼펫 천사' '기다리기'

 

 

전장서 살아온 뒤 생명에 대한 갈망 노래

1986년 무렵의 전봉건 시인.[중앙포토] 전봉건 시인은 흔히 ‘6·25의 시인’ 혹은 ‘전쟁 시인’이라고 불린다. 6·25전쟁을 전장에서 직접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그 체험을 시적으로 승화시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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