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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나해철 시인

부흐고비 2021. 4. 12. 09:05

쓸쓸한 그것 / 나해철

 

나뭇잎을 물들이다 떨어지게 하는 것
세월을 밀어 한 시대를
저물게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로 밀려와
저만큼 조용히 있다

시집도 편지도 태워서 재가 되게 하는 것
살도 뼈도 누우면 흙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로 밀려와
저만큼 조용히 있다

 

어머니 / 나해철

어머니/ 한 말씀 하세요/ 그 때 범람한 강물에/ 잠겨 흐느끼던 문전옥답을 바라보며/ 하시던 한 말씀 다시 들려 주세요/ 어머니/ 끊기지 않는 뿌리손으로/ 우리를 끌어안고 일어서시는 어머니/ 안식의 밤에도/ 고이 쉴 수 없는 별같은 뜬 눈장이들의/ 지새움의 산하를 기어코 일구어 푸르게 하시는/ 어머니 한 말씀 듣고 싶어요/ 그 때 모질던 어느 때에도/ 삼천리 방방곡곡 울리던 그 말씀/ 다시 토해 주세요/ 어머니/ 이 땅 이 하늘 이 세상이신/ 우리 어머니.//

아버지 / 나해철

나는 나의 아버지/ 내가 앞서가며 나를 불렀다/ 알 수 없는 곳에도 길을 놓고/ 디뎌 밟으며 뒤따르는 나에게/ 무어라 이름 가르치며 살았다/ 앞이 안 보일 때도/ 나를 위하여 아버지인 나는/ 마음을 숨긴 채 웃었다//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의 오랜 병은 언제나 끝나나요/ 저를 언제나/ 끌어안고 볼기짝을 때려주실라나요/ 하늘의 큰곰자리를 가르쳐주실라나요/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요/ 다 커서/ 나의 아버지 노릇도 이제 더 못 해요//

산을 그리며 / 나해철

일없이/ 산계곡 길을 걷고 싶어라/ 가을에/ 맑아서 이승이 아닌 것만 같은 산기슭에/ 앉았다가 드러누웠다가/ 단풍처럼 얇아진 얼굴을 들고/ 서고 싶어라/ 길어진 햇살을 받아 빛나는 몸으로/ 어두워지는 길을 따라/ 걷고 싶어라/ 어느 별에서 누군가 바라보며/ 아득한 저곳에도 별이 있다고/ 말할 때까지 텅 비워져/ 은빛으로 울리는 내 가슴을/ 홀로 들여다보고 싶어라//

 

봄 삼만리 / 나해철

강물이 꽃길 데리고/ 흐르네/ 하얀 꽃 노란 꽃/ 봄 삼만리// 봄날에 강물 외롭지 않네// 나란히 흐르다/ 곱이마다/ 꽃을 껴안고 가네/ 몸에 아로새기며 가네// 강물은 아네/ 이 봄 끝이면/ 행복도 끝나/ 마음 파랗게 식은 채/ 나머지 계절을 살아야 한다는 걸// 강물이 가네/ 한 굽이 강물이 꽃이 피네/ 또 한 굽이 꽃이 강물이 되어/ 강물이 가네/ 꽃이 가네/ 봄 삼만리//

봄날과 시 / 나해철

봄날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시가 씌어지기나 하나/ 목련이 마당가에서 우윳빛 육체를 다 펼쳐보이고/ 개나리가 담 위에서 제 마음을 다 늘어뜨리고/ 진달래가 언덕마다 썼으나 못 부친 편지처럼 피어있는데/ 시가 라일락 곁에서 햇빛에 섞이어 눈부신데/ 종이 위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씌어진 게 시이기는 하나 뭐//

동해일기 3 / 나해철

바다에 서면/ 이제는 잃어버린 아름다운 것들이 생각난다/ 부서진 유리창처럼/ 상처의 숲을 이룬 가슴이/ 구석구석 따뜻해지면 평화로워진다.//

영산포(榮山浦) 1 / 나해철

배가 들어/ 멸치젓 향내에/ 읍내의 바람이 달디달 때/ 누님은 영산포를 떠나며/ 울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 늘 같이 흐르고/ 개나리꽃처럼 여윈 누님과 나는/ 청무를 먹으며/ 강둑에 잡풀로 넘어지곤 했지// 빈손의 설움 속에/ 어머니는 묻히시고/ 열여섯 나이로/ 토종개처럼 열심이던 누님은/ 호남선을 오르며 울었다// 강물이 되는 숨죽인 슬픔/ 강으로 오는 눈물의 소금기는 쌓여/ 강심을 높이고/ 황시리젓배는 곧 들지 않았다// 포구가 막히고부터/ 누님은 입술과 살을 팔았을까/ 천한 몸의 아픔, 그 부끄럽지 않은 죄가/ 그리운 고향, 꿈의 하행선을 막았을까/ 누님은 오지 않았다/ 잔칫날도 큰집의 제삿날도/ 누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들은 비워지고/ 강은 바람으로 들어찰 때/ 갈꽃이 쓰러진 젖은 창의/ 얼굴이었지/ 십년 세월에 살며시 아버님을 뵙고/ 오래도록 소리 죽일 때/ 누님은 그냥 강물로 흐르는 것/ 같았지// 버려진 선창을 바라보며/ 누님은/ 남자와 살다가 그만 멀어졌다고/ 말했지// 갈꽃이 쓰러진 얼굴로/ 영산강을 걷다가 누님은/ 어둠에 그냥 강물이 되었지/ 강물이 되어 호남선을 오르며/ 파도처럼 산불처럼/ 흐느끼며 울었지.//

영산포(榮山浦) 2 / 나해철

개산 큰집의 쥐똥바퀴새는/ 뒷산 깊숙이에 가서 운다/ 병호 형님의 닭들은/ 병들어 넘어지고/ 술 취한 형님은/ 강물을 보러 아망바위를 오른다/ 배가 들지 않는 강은상류와 하류의 슬픔이 모여/ 은빛으로 한 사람 눈시울을 흐르고/ 노을 속에 雲谷里를 적신다/ 冷山에 누운 아버님은/ 물결 소리로 말씀하시고/ 돌절벽 끝에서 형님은/ 잠들지 않기 위해 잡풀처럼/ 바람에 흔들린다/ 어머님 南平아짐은 마른 밭에서/ 돌아오셨을까 /귀를 적시는 강물 소리에/ 늦은 치마품을 움켜잡으셨을까/ 그늘이 내린 九津浦/ 형님은 아버님을 만나 오래 기쁘고/ 먼발치에서/ 어머님은 숨죽여 어둠에/ 엎드린다//

지금, 자화상 / 나해철

온몸을 던지지/ 두터운 옷을 입고/ 조심스러운 듯이 관계를 하지만/ 실은 송곳같이 뾰족해진 몸으로/ 아슬아슬하게 살지/ 치욕은 입 속의 혀처럼/ 흉곽에서 자라나/ 쉴새없이 속삭이지만/ 소리내지 않게 꼭 다문 입술의/ 가슴을 안아들고서/ 비면 비, 바람이면 바람 속에서/ 온몸을 내놓고 살지/ 온몸을 던지며 살지//

집 / 나해철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빛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와/ 벽지에 남은 어린 아들의 희미한/ 그림이 보인다/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들리던 것들이 들린다/ 베란다를 지나는 바람과/ 부엌에서 딸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들린다/ 지친 몸일 때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그들이 안 들리던 그들이/ 눈도 귀도 어루만지며/ 곁에 와 함께 눕는다//

손 / 나해철

외로운 사람들의 방에 드는/ 햇빛처럼 따사로운 손/ 병 깊어 쓸쓸한 이들에게/ 다가가 쓸어주는 손/ 아름다운 손/ 새해에는/ 나의 오른손 왼손 중/ 하나라도 그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면// 불의한 사람들은 깨우치는/ 용기 있는 손/ 더러운 것을 맑게 씻어주는/ 깨끗한 손/ 어여쁜 손/ 새해에는/ 아아 나의 손 중 하나라도/ 그처럼 어여쁠 수 있다면.//

넥타이 / 나해철

그렇게 말고 이렇게/ 매듭을 묶을 수도 있다고/ 가르쳐주지 않았니/ 그 후로 그렇게 말고/ 이렇게도 인생을/ 묶으며 살아왔다/ 아니 늘 이렇게만/ 살았다/ 이렇게 묶을 때마다/ 네가 준 내 인생 때문에/ 사무쳐 목이 메인다//

등을 껴안을 때 / 나해철

고등어를 굽고 있는 당신의 등을/ 견딜 수 없어 달려가/ 껴안을 때/ 훗날 당신이 없을 때라/도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될/ 정신의 합일을 경험하는 거야/ 살과 뼈가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불가능을 실현하고 있는 거야/ 내 정신이 당신과 하나가 되었는지/ 내 육체가 당신과 하나가 되었는지/ 내 정신을 바람으로/ 내 육체를 불로 만드는 거야/ 살과 뼈를 기고 태워서/ 바람과 불이 되어 당신과 섞이어/ 하나가 되고자 하는 거야/ 하나가 되고자 내 생을/ 당신 속에 집어넣고 또 집어고/ 봉인을 하는 거야//

한 사람 / 나해철

한 사람을 만나고 싶네/ 마음에 사랑이 샘솟고/ 눈이 맑은 그 사람/ 지칠 줄 모르고 타오르는 정열/ 세월 갈수록 굳어지는 신념/ 언제나 아름다운 그 사람/ 들판에 서면 농군으로/ 공장에서 땀흘리면 일꾼으로/ 겨레를 위해서만 헌신하는/ 형제들을 그리며 몸 살으르는/ 귀하고 소중한 사람/ 땅 위에 소롯한 한 송이 꽃처럼/ 하늘에 초롱한 한 떨기 별처럼/ 무더기 속에선 외지게 피었지만/ 어둔 밤이면 또렷이 보이는 그 사람/ 부드러운 손도 가슴도/ 이미 뜨거운 강철로 달구어져/ 땅 위에선 부서지지 않는 그 사람/ 고통 속에서도 눈부시게 웃으며/ 어서 가자 앞서 걸으며 눈빛 빛내고/ 어서 오라 새벽을 부르는/ 그 미소 그 목청 잊을 수 없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네.//

모든 것 / 나해철

추억한다/ 모든 것을/ 입술을/ 입술이 했던 모든 것을/ 추억한다/ 손을/ 손이 했던 모든 것을/ 추억한다/ 모든 것을/ 시간을/ 시간이 했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 나해철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때로는 나란히 선 키 큰 나무가 되어/ 때로는 바위 그늘의 들꽃이 되어/ 또 다시 겨울이 와서/ 온 산과 들이 비워진다 해도/ 여윈 얼굴 마주보며/ 빛나게 웃어라/ 두 그루 키 큰 나무의/ 하늘쪽 끝머리마다/ 벌써 포근한 봄빛은 내려앉고/ 바위 그늘 속 어깨 기댄 들꽃의/ 땅 깊은 무릎 아래서/ 벌써 따뜻한 물은 흘러라/ 또 다시 겨울이 와서/ 세월은 무정타고 말하여져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벌써 봄 향기속에 있으니/ 여윈 얼굴로도 바라보며/ 빛나게 웃어라//

두엄자리 / 나해철

두엄은 썩어서 금비가 되는데/ 지푸라기, 돼지똥, 닭똥 그리고 오줌이/ 섞여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비료가 되는데/ 벼가 먹고 보리가 마셔서/ 살이 통통 오르는 영양식이 되는데/ 헛헛한 내 가슴은/ 썩어도 어디 붙일 데 없다/ 가슴을 두엄자리에 내려/ 독새풀, 엉겅퀴, 억새, 물풀들과 포개어져/ 다 탄 재와 똥오줌에 달구어져/ 질 좋은 퇴비가 되면 좋겠는데/ 땅 위에 떠서 흔들리는 저 가벼운/ 내 가슴/ 누구를 만나 껴안아도/ 안기는 건 저같이 무게도 없는/ 빈 뼈의 집//

내 마음의 첼로 / 나해철

텅 빈 것만이 아름답게 울린다/ 내 마음은 첼로/ 다 비워져/ 소슬한 바람에도 운다/ 누군가/ 아름다운 노래라고도 하겠지만/ 첼로는 흐느낀다/ 막막한 허공에 걸린 몇 줄기/ 별빛같이/ 못 잊을 기억 몇 개/ 가는 현이 되어/ 텅 빈 것을 오래도록 흔들며 운다/ 다 비워져/ 내 마음은 첼로/ 소슬한 바람에도/ 온몸을 흔들어 운다//

풀잎도 운다 / 나해철

동생아 울지 마라/ 우리가 울면 풀잎도 운다/ 불치병을 앓는 동생을 보고/ 배운 것 없는 언니가 뱉는 말/ 어려서부터 두 자매뿐/ 부모 혈육 없이 여자들 몸으로/ 대한민국 땅에서/ 사십 년 되도록 목숨을 부지해왔으니/ 천한 삶을 이어왔으니/ 고생, 고통, 슬픔, 설움/ 하 얼마나 많았으랴/ 그러니 언니가 쏟는 말/ 우리가 울면 풀잎도 운다/ 몸부림 해왔어도 가난은 벗어날 수 없어/ 병원비 대느라 단칸방값 빼내어/ 퇴원해도 돌아갈 곳이 없어/ 울고, 그렇게 살아도 사는 게 더 좋아/ 한 십 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네 하며/ 우는, 동생을 끌어안고 언니가 하는 말/ 동생아 울지 마라/ 우리가 울면 풀잎도 운다//

비 / 나해철

비 오는 날은/ 젖었다/ 함께라면 기쁨에/ 따로라면 그리움에/ 젖었다/ 시간이 흐르고/ 비 오는 날은 젖었다/ 당신은 뼈아픔에/ 나는 슬픔에/ 젖었다/ 당신 얼굴에 흐르는 비로/ 멀리서도/ 내 얼굴 젖었다//

세탁기 / 나해철

한 세상 잘 놀다 간다는 말은/ 나, 게으르게 살았다는 말/ 나, 죄가 크다는 말/ 나, 한 세상 잘 놀고 있다/ 양심은 팬티와 같은 것/ 가끔 벗어서 세탁기에 빤다/ 말려서 다시 입는다// 한 세상 슬픔을 잊고 웃다 간다는 말은/ 나, 독하게 살았다는 말/ 나, 한을 주었다는 말/ 나, 한 세상 늘 웃고 있다/ 의무는 런닝셔츠와 같은 것// 나의 세탁기에서는/ 땟물과 함께/ 눈자위 붉은 그리움이/ 배수구를 통해 흘러나간다//

겨울 버스 / 나해철

코끝이 어는 승강장에 서면/ 너처럼 오고 또 너처럼 오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가족을 모아 고향을 일구고 싶은 아버지의 꿈과/ 산바위 위에서나 소리쳐 부르는 스무 살 동생의 터질 듯/ 한 가슴과/ 끝끝내 기다림의 불쏘시개만 넣고 마는 새벽마다의 시/ 뱃속까지 시원하고 다디단 바람의 어느 봄/ 일렁이며 터져 남이나 북 개울과 마을을 환히 밝힐/ 그날의 빛들을 생각한다./ 길이 멀고 끝이 없으면 그만큼 더디 오고/ 기다리는 사람이 몇 안될수록 애터지게 오지 않는/ 너는 그러나 온다./ 황혼 그리고 어둠이 들어 모두들 쓰러져 눕기 전/ 언제나 눈부신 소리로 먼저 온다./ 얼어붙은 손끝은 가슴 하늘과 산그림자가 깨어나며/ 달려가 맞이하는 기다림의 끝. 평화와 따뜻한 것./ 버스에 오르면 풀밭처럼 잡목림처럼 안기고 섞이어/ 살의 온기로 데우고 서로 녹여/ 살붙이로 하나가 되는 사람들./ 희망은 너처럼 오지 않고 또 너처럼 온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기쁨과 눈물겨움/ 감사와 복된 춤 노래와 빛이 터지는/ 그날의 이 땅 위에 서듯/ 흙도 피도 얼어붙는 칼바람 속에서 버스에 오르면/ 기어코 너처럼 오고야 마는 우리들의 희망에 대해서 생각한다./ 몸은 덥혀지고/ 누군가를 데우면서.//


 

나해철 시인
1956년 전남 나주 영산포 출생. 전남대 의대 및 동대학원을 졸업. 의학박사.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영산포」가 당선되어 등단. 1984년 첫시집 『무등에 올라』 간행 이후, 『동해일기』 『그대를 부르는 순간만 꽃이 되는』 『아름다운 손』 『긴 사랑』 등이 있음.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 중.

※ 나해철 시인의 더 많은 시를 감상할 수 있음

 

 

나해철님의 블로그 : 네이버 블로그

자기소개가 없습니다.

blo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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