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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덕자 만나다 / 구활

부흐고비 2021. 4. 8. 06:43

덕자는 못 만날 줄 알았다. 만날 가망이 없었다. 덕자가 살고 있는 곳은 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전라도여서 길이 너무 멀었다. '죽을 때까지 못 만나면 어쩌나'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못 만나도 그만이지'하고 포기해 버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덕자를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다. 다만 덕자의 사촌들 모습을 보고 얼굴과 몸매를 그려 볼 수는 있었다. 만난 적 없는 덕자를 왜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을까. 풍문 때문이다.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전해오는 덕자의 소문은 굉장했다. 글래머 스타일이 숨겨져 있는 맛이 숨을 죽일 정도라고 했다.

덕자는 잘생긴 여인이 아니라 고급에 속하는 생선 이름이다. 농어목 병어과에 속한다. 영문명은 코리안 폼프렛이며​ 우리말 정식 이름은 덕자병어다. 일반 병어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닮았다. 꼬리지느러미의 아래 꼬리가 병어보다 길고 대가리 부분의 파도 무늬가 병어보다 좁게 퍼져 있다. 글로 아무리 설명해도 어물전에서 만나면 구분하기가 어렵다. 가게 주인이 "이건 덕자예유"라고 말하는 그것이 바로 덕자다.

전라도 고창 읍내 전통시장에서 덕자를 만났다. 간혹 술 취한 취객이 웃통 벗고 신발 벗고 제집 안방인 줄 알고 올라가 잠을 잔다는 어물전 어판 위에 친구들과 나란히 누워 있는 덕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야, 덕자야"하고 부를 뻔했다. 덕자란 이름을 알면 혹시 비싸게 달랄까 봐 "이 고기 이름이 뭐예요?" 하고 물었다. 심청깨나 있어 보이는 주인 여자는 '니깐 놈이 사긴 뭘 사'하는 투로 "덕잔데유. 비싸유. 3만 5천원이유"하고 헛말처럼 지껄였다.

나의 여행 도반들은 바닷가 경치에 질렸는지 요즘은 편백 숲 탐방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번에는 장성의 축령산 편백 숲을 찾아갔다. 금곡지구 영화마을 민박집에 방 두 칸을 빌렸다. 낯선 곳의 먹거리 사정이 어떤가 싶어 어슬렁거리며 산을 내려와 고창전통시장에 들른 것이 덕자를 만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나의 식도록 버킷 리스트에 올라 있는 덕자를 만났으니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

병어나 덕자는 5,6월 산란철이 오면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신안군 일대의 사니질(모래)갯벌로 모여든다. 산란의 시기와 습성이 민어와 비슷하여 민어 그물에 병어가 잘 걸려들어 지도 부근에 있는 송도 어시장에는 민어와 병어가 파시를 이룬다.

병어는 흔히 '병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갈치, 멸치, 준치 등 '치'자를 돌림자로 쓰는 생선들은 하나같이 성질이 급하다. 그물에 걸려 땅 냄새를 맡기만 하면 바로 죽어 버린다. 그래서 병어 활어 맛보기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그래도 무너진 하늘 밑에 솟아나는 구멍처럼 병어 낚싯배를 타거나 병어회 전문집을 잘 만나면 간혹 맛볼 수는 있다. 대체로 병어는 선어 상태로 냉장 보관됐다가 전문 식객들의 입맛을 충족시켜 준다. 뼈째 썬 병어회 맛은 "쥑인다 아니가"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병어 맛이 이럴진대 덕자 맛은 필설로 형용하기가 좀 어렵다. 우선 값이 병어보다 두세 배 비쌀 분 아니라 맛 또한 값에 제곱 비례한다고 보면 틀림없다. 바다 낚시꾼들이 최고로​ 치는 생선회는 돌돔, 다금바리(자바리). 붉바리, 대형 민어 등이지만 낚시로 방금 잡은 병어도 그 축에 끼워 줄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병어는 한글날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한글날은 4대 국경일엔 들어가지 않아도 의식 있는 사람들은 이 날도 태극기를 게양하고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판 위에서 얼음 이불을 덮어쓰고 있는 덕자를 흥정 끝에 3만원에 모셔왔다. 하룻밤 동침하기 위해서다. 덕자와의 해우를 돈 몇 푼 때문에 무산시킬 수는 없었다. 선도가 조금만 더 좋았으면 갯가​ 사람들처럼 회를 쳐 깻잎에 마늘을 얹어 날된장에 쌈을 싸서 먹었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큰 냄비에 간을 맞춰 조림을 했더니 비린내가 없는 생선살은 달고 달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덕자란 이름은 잡은 어부가 맛을 보니까 어찌나 맛이 있던지 자신이 짝사랑하고 있는 동네 처녀 이름을 갖다 붙였다고 한다. 아마 그 어부는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덕자의 맛(?)을 상상 속에서 꿈꾸고 즐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덕자를 만난 것은 내가 한 일 중에서 임오군란 이후에 가장 잘한 일인 것 같다. "덕자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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