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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원식 시인

부흐고비 2021. 4. 15. 13:15

울음 감옥 / 김원식

수번 1258, 죄명은 불효다
수원법원 가는 하늘 길에
낮달이 조등처럼 떠 있다
어머니 떠나신 지 백 일째
슬픔을 견뎌온 시간들이
빨간 신호등에 걸려 있다
고개 돌리면 배롱나무 꽃
그리움을 꾹꾹 쟁여서
백 일 동안 달군 울음 덩어리를
벌서듯 매달고 서 있다
상엿소리 홀로 가던 날
목백일홍 떨어질 때마다
꽃상여는 자주 발길을 멈췄다고
그때마다 엄마는 뒤돌아보며
갇힌 자의 울음을 들었으리라
마지막 인사도 못 드린 나는,
엄마의 칠월을 밤이면 울었다

 

데칼코마니-아버지 / 김원식

아버지는 칭찬도 화를 내며 하셨다/ 전교 우등상을 받던 날/ 궐련은 물며 아버지는 혀를 차셨다/ “노름판에서 논밭뙈기 쏵 날려 불고/ 저것을 어찌 갤 켜, 먼 조화여 시방.”/ 눈보라에 빈 장독 홀로 울던 새벽,/ 몰래 생솔가지로 군불을 때주시며/ 한숨이 구만 구천 두이던 아버지는/ 자식 사랑도 당신 타박으로 하셨다/ 사립문 옆 헛청에서 나뭇짐을 부리며/ 시침 떼듯 진달래를 건네주던 당신께/ 나의 숨김은 하나만은 아닌 듯하다/ 구들장 틈으로 새는 연기를 참으며/ 자는 척, 당신의 눈물을 본 것이요/ 꼭 탁한 아비가 된 나를 본 것이다/ 아직 서슬 퍼런 지청구는 여전한데/ 여태 당신 속정까지는 닮지 못했다//

자목련을 읽다 / 김원식

목적어가 필요 없는 꽃봉은/ 수식어 같은 이파리는 사치다/ 오직 思慕, 주어만 필요하다/ 허공의 행간을 겨우내/ 서리꽃 목필로 채운 뜻,/ 숭고한 사랑의 징표 때문이리라/ 황홀한 수줍음 여전한 너,/ 두 손 번쩍 들고 마중하다가/ 4월 첫 자리에 홍자색 연정/ 죄 엎지른 네 설렘을 알겠다/ 자지러지듯 고혹적인 점등식/ 혼절한 단문, 자목련을 읽는다//

지게 / 김원식

비틀거리거나 넘어져도/ 받쳐 줄 이도 없는 생/ 개울가 저녁노을에 걸려/ 이따금 나뒹군 적도 있다/ 그때마다 절박한 끼니는/ 제 무릎을 딛고 일어섰다/ 사랑도 사치라던 지게질/ 그렇다고 작대기 없이/ 홀로서기를 감행한 적도 없다/ 바람이 먼저 쓰러져도/ 결코 넘어지면 안 되는 生/ 기댈 곳 없는 사람이여/ 그대 무릎은 내가 받쳐주겠다//

산에서 / 김원식

등산하는 목적을 묻기에/ 등산이라 했네// 등산하는 재미를 묻기에/ 또 등산이라 했네// 등산에서 얻은 걸 묻기에/ 등산이라 했네// 등산에서 남은 걸 묻기에/ 또 등산이라 했다네.//

귀천 소풍 / 김원식

지리산 소풍을 간다/ 눈과 귀를 가시러 중산리 계곡에 간다/ 문자로 함부로 지은 죄/ 씻은 듯 부신 듯 첫 마음을 헹구러간다/ 청대 섶 귀천시비가 대붕처럼 날아오른다/ 이내, 운해를 들치고 내려오는 천왕봉/ 두류산 자작시를 큰물소리 내며 읽는다/ 귀천이 여기 사는 이유며/ 소풍객 잦은 까닭 이제사 알 법하다/ 만 천백 일흔둘의 문자로 그린 시월/ 세상의 여백은 단풍 든 시로서 충분하다/ 내 詩살이 끝내는 날/ 한 마리 청새 되어 귀천길 노래하며 가리라//
※ 두류산: 지리산의 다른 이름

2월의 기도 / 김원식

앙상하게 뼈만 남은 나목(裸木)의 가지에도/ 단단히 얼어붙은 오월의 한 고비를 넘으면,/ 가지마다 싹이 되고 잎이 되고,/ 꿈이 되고 노래가 되는,/ 그러한 봄이 기어이 올 것이라는,/ 것은 당신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신앙/ 그러나 2월은 밤 깊도록 온 방을 훤하게 밝혀주다가,/ 신랑이 오시기쯤 하여,/ 가물가물 꺼져가는 등불처럼 안타깝게 견디기 힘든 계절/ 이빨을 앙 다물고,/ 아픔을 참는 산모의 애처로운 모습처럼,/ 정말로 한 고비를,/ 넘기기만 하면 사랑이 꽃 피고 평화의 잎새가 움트는 봄,/ 봄은 기어이 오고 말 것이라는 당신의 말씀이었네/ 정말로 한 고비만 넘기기만 하면,/ 봄이 오고 꿈은 아지랑이처럼 가슴에서 가슴으로/ 번져갈 것인데 오오, 오래 참으시는 이여,/ 당신의 그 참으시는 인고(忍苦)를,/ 내 목을 안고 속삭이듯이 들려주지 않으시렵니까//

등짐 / 김원식

주고받는 그 하나만으로도 사랑이었다/ 누구에게든 짐은 있게 마련이고/ 내려놓을 곳을 찾아 같이 걸어가는 길이다// 왔다가 가는 것, 갔다가 다시 오는 것은/ 마음 따라 오고 가는/ 등에 짊어진 보따리에 있다// 편안하게 해 주는 이, 사랑이었다/ 첫눈 내린 날,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걸어간/ 발자국을 따라가게 하는 이/ 오래도록 기억되고 함께하고 싶은 이다// 같이 한다는 것은 나눔이다/ 노송이 우거진 산사의 숲속에서/ 신발을 벗어들고 머리에 쓴 모자도 벗고/ 발바닥에 느껴지는 묵직한 땅의 기운과/ 가느다란 머리카락에서부터 하늘의 기운을 받아드리는/ 그 순간, 꽁꽁 동여매어 짊어진 보따리를/ 풀어놓게 된다// 누가 내려 놓아주는 것도 아니고/ 활짝 풀어 제쳐놓고 다시 챙겨주는/ 보따리 사랑이다//


 

김원식 시인은 1962년 전북 완주 대둔산 자락에서 태어나 1988년 시집 『꿰맨 글 맞춘 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사)한국예술인총연합회 특선시인으로 선정되었고, 제12회, 제13회 천상병 문학제 대회장과 김소월문학대상 추진위원장. (사)한국문인협회 홍보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과 한국스토리문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4회 천상병 문학제 <귀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MBC S.R 프로덕션과 (주)S.J필름&엔터테인먼트 대표로 ‘핑클 3D MV’를 제작했으며, 영화 〈사마리아〉를 기획 제54회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白愛낭송시집 Ⅰ, Ⅱ』 『주간 덤과 거스름』이 있으며, 시집으로 『꿰맨 글 맞춘 세상』(1988) 『쓸쓸함 그 견고한 외로움 시낭송 음반 Ⅰ.Ⅱ』(2006) 『그리운 지청구』(2015) 『사각바퀴』(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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