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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함민복 시인

부흐고비 2021. 4. 13. 17:12

막걸리 / 함민복


윗물이 맑은데
아랫물이 맑지 않다니
이건 아니지
이건 절대 아니라고
거꾸로 뒤집어 보기도 하며
마구 흔들어 마시는
서민의 술
막걸리


긍정적인 밥 / 함민복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 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 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나를 위로하며 / 함민복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 함민복 

밥을 머리에 이고/ 어머니 들판을 건너오신다/ 아지랑이 아지랑이//

 

가난을 추억함 / 함민복

이 시장 바닥이 끝나는 저편에/ 아버지 사진 한 장 걸어 놓고/ 제사라도 한 번 올리고 싶구랴//

 

 

뻘에 말뚝 박는 법 / 함민복

뻘에 말뚝을 박으려면/ 긴 정치망 말이나 김 말도/ 짧은 새우 그물 말이나 큰 말 잡아 줄 호롱 말도/ 말뚝을 잡고 손으로 또는 발로/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어야 한다/ 힘으로 내리 박는 것이 아니라/ 흔들다보면 뻘이 물러지고 물기에 젖어/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으로 빨아들일 때까지/ 좌우로 또는 앞뒤로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 뻘이 말뚝을 빨아들여 점점 빨리 깊이 빨아주어/ 정말 외설스럽다는 느낌이 올 때까지/ 흔들어주어야 한다// 수평이 수직을 세워//그물 가지를 걸고/ 물고기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 상상을 하며/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며 지그시 눌러주기만 하면 된다//

달의 소리 / 함민복

달의 소리 들으러/ 서해 바다에 가면// 말렸다 풀리는/ 달이짠 비단 자락// 밀물 소리 썰물 소리/ 갯벌 위에 가득// 수만년여인의 자궁에/ 아이의 심장을 직조한//

 

초승달 / 함민복

배고픈 소가/ 쓰윽/ 혓바닥을 휘어/ 서걱서걱/ 옥수수 대궁을 씹어 먹을 듯//

달의 눈물 / 함민복

금호동 산동네의 밤이 깊다/ 고단한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노루들의 잠자리나 되었을 법한/ 산속으로 머리를 눕히러 찾아드는 곳/ 힘들여 올라왔던 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몸 더럽히고/ 흘러내리는 하수도 물소리/ 숨찬 산중턱에 살고 있는 나보다/ 더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많아/ 아직 잠 못 이룬 사람들 많아/ 하수도 물소리/ 골목길 따라 흘러내린다/ 전봇대 굵기만한 도랑을 덮은/ 쇠철망 틈새로 들려오는/ 하수도 물소리/ 누가 때늦은 목욕을 했는지/ 제법 소리가 커지기도 하며/ 산동네의 삶처럼 경사가 져/ 썩은내 풍길 새도 없이 흘러내리는/ 하수도 물소리// 또 비린내가 좀 나면 어떠랴/ 그게 사람 살아가는 증표일진대/ 이곳 삶의 동맥처럼/ 새벽까지 끊기지 않고/ 흐르는/ 하수도 물소리/ 물소리 듣는 것은 즐겁다// 쇠철망 앞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물면/ 달의 눈물/ 하수도 물소리에 가슴이 젖는다//

 

부부 /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앉은뱅이저울 / 함민복

물고기 잡는 집에서 버려진 저울 하나를 얻어왔다// 저울도 자신의 무게를 달아보고 싶지 않았을까/ 양 옆구리 삭은 저울을 조심 뒤집는다// 삼 점 칠 킬로그램/ 무한천공 우주의 무게는/ 0이더니/ 거뜬히 저울판에 지구를 담은/ 네 무게가 지구의 무게냐/ 뱃장 크다/ 지구에 대한 이해 담백하다// 몸집 커 토막 낸 물고기 달 때보다/ 한 마을 바지락들 단체로 달 때 더 서러웠더냐/ 목숨의 증발 비린내의 처소/ 검사필증, 정밀계기 딱지 붙은 기계밀정아/ 생명을 파는 자와 사는 자/ 시선의 무게에서도 비린내가 계량되더냐// 어머, 저 물고기는 물 속에서 부레 속에/ 공기를 품고 그 공기로 제 무게를 달더니/ 이제 공기 속에 제 몸을 담고 공기 무게를 달아보네/ 봐요, 물이 좀 갔잖아요/ 푸덕거림 버둥댐 오역하던 이도 지금은 없고/ 옅은 비린내만 녹슨 페인트 껍질처럼 부러진다// 저울은 반성인가// 늘 눌릴 준비가 된,/ 바다 것들 반성의 시간 먹고 살아 온/ 간기에 녹슨 앉은뱅이저울은/ 바다의 욕망을 저울질해주는/ 배 한 척과 같은 것이냐// 닻 같은/ 바늘을 놓아버릴 때까지 저울은 저울이다//

꽃 /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 함민복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세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커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집/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짜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짜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우표 / 함민복

판셈하고 고향 떠나던 날/ 마음 무거워 버스는 빨리 오지 않고/ 집으로 향하는 길만 자꾸 눈에서 흘러내려/ 두부처럼 마음 눌리고 있을 때/ 다가온 우편배달부 아저씨/ 또 무슨 빚 때문일까 턱, 숨 막힌 날/ 다방으로 데려가 차 한 잔 시켜주고// 우리가 하는 일에도 기쁘고 슬픈 일이 있다며/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 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라고/ 손목 잡아주던/ 자전거처럼 깡마른 우편배달부 아저씨/ 낮달이 되어 쓸쓸하게 고향 떠나던 마음에/ 따뜻한 우표 한 장 붙여주던//

섬 / 함민복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닻 / 함민복

파도가 없는 날/ 배는 닻의 존재를 잊기도 하지만// 배가 흔들릴수록 깊이 박히는 닻/ 배가 흔들릴수록 꽉 잡아주는 닻밥// 상처의 힘/ 상처의 사랑// 물 위에서 사는/ 뱃사람의 닻// 저 작은 마을/ 저 작은 집//

호박 / 함민복

호박 한 덩이 머리맡에 두고 바라다보면/ 방은 추워도 마음은 따뜻하네/ 최선을 다해 딴딴해진 호박/ 속 가득 차 있을 씨앗/ 가족사진 한장 찍어 본 적 없는 나(我)라/ 소박네 마을 벌소리 붕붕/ 후드득 빗소리 들려/ 품으로 호박을 꼬옥 안아 본 밤/ 호박은 방안 가득 넝쿨을 뻗고/ 코끼리 귀만한 잎사귀 꺼끌꺼끌/ 호박 한 덩이 속에 든 호박들/ 그새 한 마을 이루더니// 봄이라고 호박이 썩네/ 흰곰팡이 피우며/ 최선을 다해 물컹쿨컹 썩어 들어가네/ 비도 내려 흙내 그리워 못 견디겠다고/ 썩는 내로 먼저 문을 열고 걸어나가네//

빨래집게 / 함민복

옷을 집고 있지 않을 때/ 내 몸을 매달아본다/ 몸뚱이가 되어 허공을 입고/ 허공을 걷던 옷가지들/ 떨어지던 물방울의 시간/ 입아귀 근력이 떨어진/ 입 다무는 일이 일생인/ 나를 물고 있는 허공/ 물 수 없는/ 시간을 깨물다/ 철사 근육이 삭아 끊어지면/ 툭, 그 한마디 내지르고/ 훑어지고 말/ 온몸이 입인//

전구를 갈며 / 함민복

잠시 빛을 뽑고 다섯 손가락으로 어둠을 돌려/ 삼십 촉 전구를 육십 촉으로 갈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는 더 밝게 못 박히고/ 십자가는 삼십 촉만큼 더 확실히 벽에 못 박힌다/ 시계는 더 잘 보이나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고/ 의자는 그대로 선 채 앉아 있으며/ 침대는 더 분명하게 누워 있다/ 방안의 그림자는 더 색득해지고/ 창 밖 어둠은 삼십 촉만큼 뒤로 물러선다// 도대체 삼십 촉만큼의 어둠은 어디로 갔는가/ 내 마음으로 스며 마음이 어두워져/ 풍경이 밝아져 보이는가/ 내 마음의 어둠도 삼심 촉 소멸되어 마음이 밝아져/ 풍경도 밝아져 보이는가// 어둠이 빛에 쫓겨 어둠의 진영으로 도망쳤다면/ 빛이 어둠을 옮겨주는 발이란 말인가/ 십자가에 못 박혀 벽에 못 박혀 있는 깡마른 예수여/ 연꽃에 앉아 법당에 앉아 있을 뚱뚱한 부처여/ 죽음을 돌려 삶을 밝힐 수밖에 없단 말인가// 잠시 다섯 손가락으로 빛을 돌려 어둠을 켜고/ 삼십 촉 전구를 육십 촉으로 갈면//

선천성 그리움 / 함민복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샐러리맨 예찬 / 함민복

쥐가 꼬리로 계란을 끌고 갑니다 쥐가 꼬리로 병 속에 든 들기름을 빨아먹습니다 쥐가 꼬리로 유격 훈련처럼 전깃줄에 매달려 횡단합니다 쥐가 꼬리의 탄력으로 점프하여 선반에 뛰어 오릅니다 쥐가 꼬리로 해안가 조개에 물려 아픔을 끌고 산에 올라가 조갯살을 먹습니다 쥐가 물동이에 빠져 수영할 힘이 떨어지면 꼬리로 바닥을 짚고 견딥니다 30분 60분 90분 - 쥐독합니다 그래서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살아가는 삶은 눈동자가 산초 열매처럼 까맣고 슬프게 빛납니다//

동운암2 / 함민복

비 긋고/ 달 뜨자// 할머니,처녀,애송이 계집/ 민망하게 불룩한 배마다// 환한 달 산파의 눈길// 임산부만 모여 섰는/ 장독대//

오래된 잠버릇 / 함민복

파리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날개 휘젓던 공간밖에 믿을게 없어/ 날개의 길밖에 믿을 게 없어/ 천장에 매달려 잠자는 파리는 슬프다/ 추락하다 잠이 깨면 곧 비행할 포즈/ 헬리콥터처럼 활주로 없이 이착륙하는 파리/ 구더기를 본 사람은 알리라/ 왜 파리가 높은 곳에서 잠드는가를// 저 사내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지구의 밑 부분에 집이 매달리는 시간/ 나는 바닥에 엎드려 자는데/ 저 사내는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잔다/ 발 붙이고 사는 땅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중력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잠드는 저 사내는 슬프다/ 어떤 날은 저 사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늦게 거꾸로 쭈그려 앉아 전화를 걸기도 한다/ 저 사내처럼 외로운 사람이 어디 또 있나 보다//

개 / 함민복

망둥이를 낚으려고/ 노을 첨벙거리다가 돌아오는 길/ 어둠 속에서도 개는 내 수상함을 간파하고/ 나를 겁주며 짖는다/ 내가 여기 더 오래 살았어/ 네가 더 수상해/ 나는 최선을 다해 개를 무시하다/ 시끄러워/ 걸음 멈추고 개와 눈싸움을 한다/ 사십여 년 산 눈빛으로/ 초저녁 어둠도 못 뚫고/ 똥개 하나 제압 못 하니/ 짖어라/ 나도 내가 수상타/ 서녘 하늘에/ 낚싯바늘 같은 달 떠 있고/ 풀 꿰미에 꿴 망둥이 댓 마리/ 푸덕거린다//

몸이 많이 아픈 밤 / 함민복

하늘에 신세 많이 지고 살았습니다/ 푸른 바다는 상한 눈동자 쾌히 담가주었습니다/ 산이 늘 정신을 기대어주었습니다/ 태양은 낙타가 되어 몸을 옮겨주었습니다/ 흙은 갖은 음식을 차려주었습니다/ 바람은 귓속 산에 나무를 심어주었습니다/ 달은 늘 가슴에 어미 피를 순환시켜주었습니다//

공터의 마음 / 함민복

내 살고 있는 곳에 공터가 있어/ 비가 오고, 토마토가 왔다 가고/ 서리가 오고, 고등어가 왔다 가고/ 눈이 오고, 번개탄이 왔다 가고/ 꽃소식이 오고, 물미역이 왔다 가고// 당신이 살고 있는 내 마음에도 공터가 있어// 당신 눈동자가 되어 바라보던 서해바다가 출렁이고/ 당신에게 이름 일러주던 명아주, 개여뀌, 가막사리, 들풀이 푸르고/ 수목원, 도봉산이 간간이 마음에 단풍 들어/ 아직은 만선된 당신 그리움에 그래도 살 만하니// 세월아 지금 이 공터의 마음 헐지 말아다오//

흐린 날의 연서 / 함민복

까마귀산에 그녀가 산다/ 비는 내리고 까마귀산자락에서 서성거렸다/ 백번 그녀를 만나고 한번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였다/ 예술의 전당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고/ 먼저 전화 걸던 사람이/ 그래도 당신/ 검은 빗방울이 머리통을 두드리고/ 내부로만 점층법처럼 커지는 소리// 당신이 가지고 다니던 가죽가방 그 가죽의 주인/ 어느 동물과의 인연 같은 인연이라면/ 내 당신을 잊겠다는 말을 전하려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독해지는 마음만/ 까마귀산자락 여인숙으로 들어가/ 빗소리보다 더 가늘고 슬프게 울었다/ 모기가 내 눈동자의 피를 빨게 될지라도/ 내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리라/ 그래도 당신//

라면을 먹는 아침 / 함민복

프로 가난자인 거지 앞에서/ 나의 가난을 자랑하기엔/ 나의 가난이 너무 가난하지만/ 신문지를 쫙 펼쳐놓고/ 더 많은 국물을 위해 소금을 풀어/ 라면을 먹는 아침/ 반찬이 노란 단무지 하나인 것 같지만/ 나의 식탁은 풍성하다/ 두루치기 일색인 정치면의 양념으로/ 팔팔 끓인 스포츠면 찌개에/ 밑반찬으로/ 씀바귀 맛 나는 상계동 철거 주민들의/ 눈물로 즉석 동치미를 담그면/ 매운 고추가 동동 뜬다 거기다가/ 똥누고 나니까 날아갈 것 같다는/ 변비약 아락실 아침 광고하는 여자의/ 젓가락처럼 쫙 벌린 허벅지를/ 자린고비로 쳐다보기까지 하면/ 나의 반찬은 너무 풍성해/ 신문지을 깔고 라면을 먹는 아침이면/ 매일 상다리가 부러진다.//

만찬(晩餐) / 함민복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반찬이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김치보다 먼저 익은/ 당신 마음/ 한 상//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종이상자 시론(詩論) / 함민복

종이상자가 납작하게 접혀 있다/ 종이상자는 겸손하다/ 물건을 담기 전 자신의 모습을 내세우지 않는다/ 종이상자에도 글씨가 있다/ 글씨가 내용이 되지 않고/ 내용물을 대변한다/ 주로 질 낮은 종이로 만든다지만/ 파도 모양 골판지로 음양의 힘을 깨치며/ 중심에 어깨 맞댄 비움의 뼈대를 촘촘히 채운다/ 종이상자는/ 나란히 연대하고/ 차곡차곡 공간을 절제한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담아내는/ 시(詩)가 더 깊은 시라면/ 종이상자는/ 과묵한 시집이다/ 나무처럼 우직한 시인이다//

내 귀가 섹스 쪽으로 타락하고 있다 / 함민복 

잘 벗겨지지 않아요/ 제비(?)표 페인트/ 알아서 빨아줘요/ 대우 봉(?) 세탁기/ 구석구석 빨아줘요/ 삼성(?) 세탁기/ 빨아주고 비벼주고 말려주고/ 금성(?) 세탁기/ 우리는 그이가 다 빨아줘요/ 잘 빨아주니 새댁은 좋겠네/ 럭키 슈퍼타이// 무엇이, 무엇을 의작으로 빠는 이 광고에/ 우리는 무엇을 꼭 집어 넣으라고 욕해야 할지//

 


 

함민복 시인
1962년, 충청북도 충주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88년 세계의 문학 '성선설' 등단

수상 제18회 유심작품상, 제비꽃 서민시인상, 제6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 제2회 애지 문학상

 

 

함민복 시인에게 듣는 위로

강화도의 겨울 바다에서 시인을 만났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님 배 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라고 노래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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