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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물처럼 사노라면 / 김학

부흐고비 2021. 4. 19. 09:12

모처럼 얻은 황금 같은 여름철 휴가가 장마에 떠내려가 버렸다.
제11호 태풍 세실이 빼앗아 간 나의 휴가다.

연일 비가 내렸다. 줄곧 비가 내린 날이 있었는가 하면, 비가 내리다 해가 뜨다 하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듯 무덥고 구름 낀 날도 있었다.비가 내리는 날은 하염없이 빨래줄 같은 빗줄기를, 옥구슬 같은 빗방울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날이면 내 대신 선풍기가 휴가를 즐겼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로 말끔히 세수를 한 뜨락의 초목들이 마냥 푸르렀다. 물놀이를 하다 밖으로 기어나오는 하동(河童)들 같이 싱싱해 보였다. 홈통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마당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빗물과 손을 마주잡고 도란거리며 낮은 곳으로 흘러갔다.

물방울들은 너와 나가 없었다. 구정물과 맑은 물도 편을 가르지 않았다. 만나면 한 줄기로 융합을 한다. 인간이 물로부터 배울 것이라면 이것이로구나 싶었다.

지저분한 쓰레기통 주변에 떨어진 방울이나 아름다운 백합꽃 위에 내린 빗방울도 엉클어지면서 하나가 되었다. 부러울 만큼 너그러운 물의 포용력이다.

'海不讓水'
소강 선생(素江先生)이 써주신 오묘한 뜻이 가슴에 와 닿는다.

물은 높은 곳을 탐하지 않는다. 모자란 곳을 메워 수평이 되도록 애쓴다. 물의 고유한 기능이자 특성인 것이다. 인간이 물의 생리를 생활철학으로 터득한다면 이 지상의 불행은 가시게 되려니 싶다. 높은 자리를 탐하여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지 않게 될 테고, 많은 재물을 탐하여 치사한 짓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니까. 물은 시내(川)로 흐르면 시냇물이 되고, 강(江)으로 흐르면 강물, 바다(海)로 흐르면 바닷물이 된다. 시냇물이라고 하여 강물이나 바닷물을 부러워하지 않고, 바닷물이라 하여 강물이나 시냇물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시냇물은 꾸준히 흐르노라면 언젠가는 강을 거쳐 바다에 닿을 수 있음을 안다. 바닷물 역시 시냇물과 강물을 거쳐 바닷물이 되었음을 잊지 않는다.

물방울 중에는 흐르다가 땅속으로 스며들거나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사라지는 바람에 시내나 강, 바다를 구경조차 못 하는 놈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자연의 순리(順理)라면 어찌 거역할 수 있을 것인가.

또 비가 내린다.
지난여름이 생각난다. 모를 내던 농민들이나 고지대에 사는 도시의 서민들이 가뭄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던가.

빗줄기가 더욱 굵어진다. 바늘귀 같던 빗방울이 신부 약지(藥指)에 끼어진 결혼반지의 3부 다이어 만큼이나 커졌다. 백 밀리가 넘게 폭우가 쏟아진 곳도 있다는데 물난리가 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牛飮水成乳 巳飮水成毒
물은 같은 물이로되 소가 마시면 사람에게 이로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사람에게 해로운 독이 된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이것은 물의 야누스적 성질 탓이 아니라 물의 포용력으로 받아드려야 할 일이다.

이처럼 장마가 계속될 때면 버튼 한 번 눌러서 햇빛을 되돌려주고, 또 지난여름처럼 가뭄이 극심할 때엔 버튼 한 번 눌러 비가 내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 수가 있다. 그러나, 현대과학이 거기까지 미치지는 않는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과학기술이 반드시 선의(善意)로 쓰여진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인간을 태운 우주선이 달나라를 이웃집 드나들 듯한다. 시험관에서 태어난 아기가 무럭무럭 자란다. 컴퓨터가 인간의 두뇌를 대신해 준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력을 감당해 줄 날도 멀지 않다. 유전공학(遺傳工學)의 발달은 명석한 인간을 양산(量産)해 내게 되리라고 한다. 엄청난 과학의 개가(凱歌)가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는 무엇인가 빼앗긴 것 같은 허탈감에 휩싸인다.

과학의 발달은 가공할 대량 살상용 무기의 개발을 동반한다. 더불어 자연의 파괴와 인간성의 비정화(非情化)를 촉진한다. 여기에 우리들 인간이 겪어야 할 불행의 빌미가 있다면 역설일까.

후두둑후두둑 나뭇잎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스럽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구르는 소리인 양 가슴을 친다. 고달프고도 험난했던 그 길을 역사의 수레바퀴는 한시도 쉬지 않고 굴러왔다. 또 영원히 굴러가리라.

배달겨레의 역사 4천 3백 여 년,
덮여진 역사의 기록을 훑어보면 9백 31회의 처절한 국난(國難)울 겪었다. 이것을 다시 시간의 길이로 이어보면 역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천년 세월이다. 국회의원 선거를 하듯 4년마다 한 번씩 외세(外勢)에 시달려온 셈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슬퍼하거나 패배감에 짓눌릴 일만은 아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인 동북아시아를 살펴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17세기의 중국 대륙에 청나라를 세우고 떵떵거리며 우리나라를 괴롭히던 만주족(滿洲族)은 오늘날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찌 만주족뿐이겠는가. 쇠는 불에 달굴수록 강해지는 법이다. 우리 겨레는 고난의 역사를 보약처럼 복용하면서 지탱해 온 끈질긴 민족임을 알아야 한다.

사납던 빗줄기가 잠잠해졌다. 빗물이 도랑이 되어 흐른다. 졸졸 흐르는 그 물소리가 7천만 배달겨레의 합창 소리처럼 들린다. 먹구름이 꽁무니를 빼는 걸 보면 이제 긴 장마도 걷히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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