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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망덕(亡德)의 한(恨) / 윤주홍

부흐고비 2021. 4. 19. 09:47

나는 스승의 은혜를 저버린 망덕한(亡德漢)이다. 국문학을 공부하던 대학 시절 그렇게도 따르던 스승님을 생전에 자주 찾아뵙지 못하다가 뒤늦게 망덕비 앞에 꿇어 엎드렸다.

송구스러워 숙인 망덕한의 머리 위에 정월의 매서운 바람이 사정없이 매질을 한다. 어느 해 늦 정월 아버님 묘소 앞에 엎드려 풍수지탄(風樹之嘆)이더니, 스승에 대한 망덕의 참회로 흐느끼게 되는구나.

선생님 문하에서 공부하던 시절 간간이 찾아뵈면 ‘윤 군인가 어서 오게나’ 하시던 음성이 바람결에 들려오니, 내 망덕의 한(恨)은 더더욱 쌓여만 간다.

뉘우쳐 부르는 ‘선생님……’ 지금은 대답이 없으시다. 나는 일어나 비신(碑身)을 어루만진다. 바람은 여전히 망덕한을 꾸짖는 듯 차갑기만 하다. 나는 눈을 감는다. 순간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선생님의 얼굴이 영상 되어 소소(昭蘇)이 비췄는가 했더니 금세 지워져 버리는 구나. ‘선생님! 용서하소서! 비록 망덕의 제자이지만 다시 한번 존영을 비추어 주소서.’ 눈을 비비며 부르짖지만 무상한 인생사. 그 세월 앞에 어쩔 수 없는 별리(別離)가 살을 찢는다.

아내에게 들렸던 꽃바구니를 비대 위에 놓고 분향하듯 예를 올린다.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풍목지비(風木之悲)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구나.

결혼 기념으로 주셨던 두 마리 소가 그려진 이응노 화백의 그림 한 폭을 대할 때마다 아내와 함께 인사드리러 가야겠다고 수없이 별러 왔건만 이렇게 선생님의 추모비 앞에서 복받치는 망덕의 한을 가눌 길이 없다. 그 옛날 아버님께 용서를 빌 때처럼 아내와 함께 온 것 역시 다행이었다. 며느리 앞에서 아들의 체면을 세워 주시려고 크게 나무라지 않으시던 아버지같이, 선생님 또한 그러하시려니 믿는 제자의 나이도 이미 이순의 고개를 넘고 있다. ‘나무는 고요하게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 하고자 하나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선형의 말씀을 이제서야 알 듯하여 더욱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비신에 새겨진 장암지헌영선생학덕추모비(藏菴池憲英先生學德追募碑)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 여변(餘邊)에 새겨진 유작시 ‘아 大田아’를 읽으며 선생님의 크고도 높으신 덕을 우러러 새삼스레 추모의 예를 올렸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문과 대학 일학년 첫 시간이었다. 아직도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는 그분의 모습은 호리호리한 체구에 유난히도 빛나는 두 눈이었다. ‘나는 지현영(池憲英)이여’ 하시며 시험지를 나누어 주신다. 그리고 ‘시험(試驗)’에 대하여 쓰라 하시지 않는가? 그 후 나는 그분을 뵈올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고, 이토록 훌륭한 교수님의 지도를 받게 된 것을 더없는 긍지로 삼게 되었다.

대쪽같은 성품이 전형적인 선비풍이었다. 제자에게 학문을 가르칠 때는 엄격하시나 평소에는 부모와 같으셨다. ‘아무개는 오늘 왜 안나왔어?’ 하시면서 가정 사정까지 자세하게 챙기셨다. 그때는 전후의 어려운 시절이라 혹 학자금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시느라 동분서주하셨다. 학문에는 한 치의 빈틈도 없으셨고 학생을 교수함에는 너무나 정열적이셨다. ‘나는 건강이 좋지 못했요. 어쩌면 이 시간이 마지막일지도 몰라요!’ 하시며 빛나는 크신 눈에 이슬 꽃을 피우시던 선생님은 정말 분초를 아끼면서 강의에 열중하셨다. 언제나 시간 전에 들어오셔서 다음 교시 때문에 밀려 나가셨다. ‘책을 읽어요’ ‘공부를 해요’ ‘공부 안 하면 학점 안 나와요’ ‘참된 학문적 업적을 남기는 것이 억만금을 남기는 것보다 나아요’ 하시면서 젊은 학생들을 감동 시키셨다. 그분의 강의는 강의실이 따로 없었다. 길을 동행할 때나 혹 찻집에서나 또는 댁을 방문했을 때에도 늘 한국학(韓國學)의 범주에 속한 문학, 국어학, 역사학, 종교학, 철학, 경학, 민속학, 고고미술사학, 지명학, 서지학, 국악 등을 종횡무진으로 강론하셨다. 그 어떤 분야에 대해서도 전인미답의 탁견을 갖고 계셨으며 후학을 일깨워 주시는데 혼신의 힘을 다 쏟으셨다. 그러시면서도 학문 이전에 성실한 인간성을 지녀야 한다면서 학자적 교양인으로서의 도리로 일깨워 주셨다.

‘참된 스승은 가르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잘 살게 해주어야 한다’면서 국어국문학과에 ‘경제원론’ ‘부기법’ ‘신문학’ 등을 두어 취직 문제까지도 도우셨던 분이시다.

그 많은 서책으로 쌓여 있는 선생님 댁 사랑방. 그분은 궐련을 좋아하셨다. 재떨이에 재가 떨어지면 침으로 환(丸)을 지으시듯 뭉쳐 놓으신다. 그 동그라미가 커질수록 “금매 글세, 그래요”라시며 특유의 말씀을 이어가실 때 그분의 눈망울은 유난히 번득이시었다.

‘학자에게 책은 농부의 논밭보다 더 소중한 밑천’이라며 책을 권하시던 스승님. ‘호랑이가 호랑이 새끼는 기르는 법이어’ ‘호랑이가 아무리 독해도 제 새끼는 안 잡아먹는다’라고 의미심장한 사도(師道)를 말씀하시어 제자들을 독려하던 훌륭한 선생님을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뿌듯해진다.

어느 봄날 비가 내려 교정이 질퍽할 때였다. 선생님은 꽤 멀리서 뒤따르던 나를 기다리시다가 ‘윤 군은 기독교를 믿는다고 했지. 그러니 그 전래와 성경 번역이 우리 문장에 끼친 영향을 공부하면 참 좋은 논문이 될 거야! 내게 경교(景敎)라는 책이 있으니 갖다 보아!’ 하셨는데 끝내 선생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했음이 송구스럽다. 그 후 나는 다시 의학 공부를 하느라 겨를이 없었다. 이제와서 이런 말씀 드린다고 망덕의 한을 씻을 수야 없겠지만 이렇게나마 선생님께 고백을 하고 나니 약간은 마음이 후련하다.

선생님께 대한 지극히 깊은 감회와 감당키 어려운 회한을 안고 보문산 사정공원을 내려온다. 그러면서 깊은 상념에 잠겨 본다. 선생님의 숭고한 학덕을 기리는 후학들이 줄을 잇는다는 소문을 들으니 뿌듯하기 그지없다. 이젠 ‘장암학파’를 이룰 만큼 후계학 학자도 퍽 많이 배출되었다니 이 어찌 나만의 자랑이라 할 것인가. 스승님에 대한 추모의 정이 깊어질수록 내 가슴에서 솟구치는 망덕의 한 또한 걷잡을 수가 없다.


 

윤주홍 수필가 

△1934년생, △충남대 국문과, 고려대 의대, 고려대 대학원 졸업(의학박사)

△《월간문학》수필, 《시조생활》 시조 등단 

△관악문인협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장,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관악문입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역임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 

△한국수필문학상, 펜 문학상 외 다수 수상 

△수필집 『작은 소망』, 『낙조에 던진 사유의 그물』 ,『고구려의 자존심』, 『뻐꾸기 신문에서 울다』 

△시조집 『매향을 훔치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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